제 269화
269화 – 마지막 선택
#1
평범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영광을 누리고 싶은가.
사실 누구라도 영광을 좇고 싶어 할 것이다.
한번 태어난 인생, 이름 한 번 남겨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제 평범한 삶이 좋아.’
드레젠은 이미 영광을 맛봤다.
그에겐 허울뿐인 인생이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한 계기도 그러지 않았는가.
게임을 시작했을 때부터 정해두고 했다.
“제 대답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이쪽 세계에 관여하는 건, 사절이었다.
그냥 행복하고 평범하게, 조금 돈이 많은 수준으로 살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미 이룰 건 다 이뤘으니까.
“니오베와 하이디엔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니오베는 네 기억을 온전하게 가지고 싶어 할 거야.”
“니오베는…….”
고민이었다.
눈 딱 감고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드레젠이라는 존재를 모를 테니까.
현실에서 하이디엔이 했던 발언이 생각났다.
그녀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
과연 하이디엔의 말을 듣는 것이 맞을까?
‘니오베.’
그녀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봤다.
인연은 짧았지만, 맹약까지 맺은 사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현은 드레젠의 고민을 끝까지 기다려줬다.
드레젠이 원한다면 니오베를 현실로 이동시켜줄 수도 있었다.
그녀가 현대에 적응하는 건,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지만.
‘드래곤이 거기서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이 조용히 쓴웃음을 머금었다.
드레젠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확실히 답을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니오베와는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의중을 물어볼게요. 그리고…… 저는 역시 평범한 삶이 좋습니다.”
“좋아. 그렇게 해 줄게. 대신, 니오베는 네가 설득해야 해.”
“네.”
“여기, 내 번호.”
뜬금없이 쪽지 하나를 건네는 현.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과연, 지구 출신답달까.
다른 지구는 대체 어떻게 생활하기에 창조주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일반적인 전화로 걸어도 되는 겁니까?”
“응. 언제 어디서든 받을 수 있으니까, 걸어.”
“놀러 가도 되는 겁니까?”
“응, 우리 우주선에 초대도 해 줄게.”
현은 동네 형처럼 굴었다.
드레젠은 조용히 웃었다.
창조주와의 인연이라니, 이런 건 언제든지 환영이지.
현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작전이 준비되면, 내가 연락하마. 드래곤 로드와 함께 화신체 여섯을 다 죽여야 해.”
“알겠습니다.”
“많이 죽을 거야.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도 있어.”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이미 각오한바.
어차피 게임이라고 생각해야겠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지원군도 많이 있고요.”
“그래, 현실에 있는 지원군들이 있었지. 반드시 이길 거라고 본다.”
“맡겨 주세요.”
전쟁은 반드시 이긴다.
그리고, 그 끔찍했던 기억의 사슬을 끊어 버리리라 다짐했다.
현은 드레젠의 의지를 이해했다.
존중해줘야지.
지금은 베리드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우선.
작전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준비를 많이 해 둬. 그럼, 나중에 보지.”
“내 힘도 잘 쓰고!”
“밤의 아이들도 찾아가 보거라.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게이트가 열리고 모두가 퇴장하는 도중, 헬라가 말했다.
밤의 아이들이라니.
드레젠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밤의 아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관문 군주에게 찾아가라. 이 증표를 가지고.”
“알겠습니다.”
헬라가 손을 휘젓자, 작은 패가 생겼다.
그녀가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걸 끝으로, 주변이 고요해졌다.
방송에서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했다.
-무슨 얘기 했음?
-아 왜 음소거 했냐고오오오!
-ㄹㅇ 궁금하다구ㅜㅜㅜ
-말해라 말해!
시청자들의 성화에, 드레젠은 간단하게 말했다.
이 게임은 스토리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이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드레젠이 시청자를 구워삶을 방법은 많았다.
“스토리의 아주 중요한 분기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 보시죠.”
-앗!
-그건 킹정이지
-어쩔 수 없짘ㅋㅋㅋ
-그래서, 어떤 엔딩을 선택했죠?
“그것도 비밀입니다. 직접 진행하는 걸 확인하시죠.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부에서 뵙죠.”
밤의 아이들.
새로운 키워드가 생겼다.
이건 드레젠이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키워드였으니, 탐구할 가치가 있었다.
마지막 전쟁은 정말 엄청나게 치열하겠지.
최대한 전력을 끌어모으는 것이 좋았다.
“공지를 올릴 겁니다. 대규모 시참이니, 다들 준비해 두세요.”
-드디어!
-오예!
-이거지! 우린 이걸 원했다고!ㅋㅋㅋㅋㅋ
-오늘부터 육성 들어갑니다
-진짜 무적권이다 무적권!
수많은 시청자가 기대했다.
전쟁!
지금까지 있었던 국지적인 전투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
메인 이벤트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슈였다.
엄청난 경험치, 다양한 아이템, 그리고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였다.
“잠깐 쉬고, 2부로 오겠습니다.”
#2
드레젠, 강일이 캡슐에서 나오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금발의 머리칼이 오늘따라 더욱 찰랑거렸다.
그녀, 하이디엔이 손을 내밀었다.
“고생하셨어요.”
“언제 왔어?”
“한 30분 됐죠? 창조주분이랑 얘기하시는 거 다 들었어요.”
“그래. 이제 조금 있으면 고향을 되찾겠네.”
강일은 그녀의 미소를 기대하며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씁쓸한 미소였다.
부드러운 손을 잡고 일어서자, 하이디엔의 눈망울이 바로 앞에 보였다.
“이젠 여기가 더 좋더라고요. 부하들은 보내고, 저는 여기서 계속 살고 싶어요.”
“뭐? 왜, 원래 소원은 브락시아를 되찾는 거였잖아.”
“이젠 강일 님이 여기 있으니까요. 저에겐 그게 더 중요하거든요.”
밝게 웃는 모습이 정말 천사 같았다.
강일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이럴 거면 왜 게임을 시작했는가.’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그건 하이디엔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 그러면 됐지. 다른 이들은?”
“원천을 넘길 거고, 남고 싶은 이들은 남게 해 줄 거예요. 가상 현실 기술을 더 개발해서, 좋은 게임도 만들어야죠.”
“그거 좋은데.”
그녀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제일 가는 기업을 만들기로 했다.
강일이 있으니까.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
“저는 제 삶의 이유를 브락시아에서 찾았어요. 그곳이 없다면, 저도 없는 거라 생각했죠.”
그녀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강일을 바라봤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삶이 강일로 바뀌어버렸던 것이.
사실 브락시아에 있을 때부터 그를 바라보고 살았는지도 몰랐다.
그가 엘프를 구원했을 때부터였을지도.
“지금 깨달았어요. 제 삶의 이유가, 사실 브락시아가 아니었다는 걸.”
“그러면?”
“어머, 두 번 말하게 하시는 거예요? 여기 있잖아요. 제 삶의 이유.”
“아-.”
그녀가 강일에게 폭 안겨 왔다.
하이디엔이 있는 세상이라.
포근한 기분.
이토록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행복하다.’
그래, 강일에겐 이곳이 바로 집이었다.
이곳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준비, 그리고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난다면 새 출발을 할 수 있겠지.
더 치열하게 살 필요는 없었다.
용사 강일은 이제 은퇴해야지.
“난 처음부터 여기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걸.”
“좋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이디엔도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준비를 마쳤다.
이젠, 여기가 집이었다.
둘이서 잠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이디엔의 전화기가 울렸다.
“엘리스네요.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 얼른 받아봐. 아, 요리 좀 해 줄까?”
“네, 좋죠.”
강일은 어머니가 사 온 재료를 확인했다.
그동안, 하이디엔은 전화를 받았다.
엘리스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저, 로드. 지금 기사 하나가 났는데, 확인해보시겠어요?”
“응? 기사?”
“네.”
“어 잠깐만, 다시 전화할게.”
그녀가 통화를 종료하고 인터넷을 들어가 봤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그녀의 얼굴.
굴욕이라는 것이 없는 하이디엔의 모습과 기사의 제목이 드러났다.
[(주)브락시아 대표 하이디엔, 미모의 스트리머와 연애?]
“음?”
실시간 검색어에도 그녀의 이름과 드레젠이라는 검색어가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이런 기사는 뭐랄까, 지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녀가 엘리스에게 톡을 보냈다.
-그냥 인정해버려. 조만간 결혼하면 되겠다.
-넵 알겠습니다! 축하드림다 로드!
-그래, 고마워.
이렇게 된 거, 그냥 시원하게 인정하고 편안하게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강일에게 쪼르르 가서 기사를 보여줬다.
“이거 봐요. 우리 기사 났는데요?”
“응? 진짜?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
조금 있으면 2부 방송인데, 또 질문 공세를 받게 될 것 같았다.
하이디엔이 잘 손질된 재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 공개해 버릴까요?”
“그럴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요새는 연예인들도 공개 연애를 많이 하는 추세였다.
하물며 연예인도 아닌 강일과 하이디엔인데, 뭐 어떤가.
두 사람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댓글들도 보면 모두가 잘 어울린다는 소리뿐이었다.
“요즘 사진 기술이 참 좋아. 들어오는 거 찍혔네.”
“그러게요. 이 사람은 좀 고소해버릴까요?”
“좀 괘씸하긴 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연애를 한다는 거, 엄청 신기해요.”
엘프 로드의 삶에서, 연애란 것이 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몇백 년 동안 연애 한 번 하지 않은 몸이었다.
모쏠이란 소리지.
강일 역시 몇 번의 연애 경험이 있었지만, 브락시아 내에선 없었다.
“그럼, 엘리스에게 전달하면 되나?”
“그럴게요. 사실 이미 전달했지만.”
“그럼…… 나도 방송에서 얘기해야겠다.”
“밥 먹고, 마저 잘 얘기해요.”
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청자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다.
과연, 사람들은 그의 연애를 좋아할까?
아니면 싫어할까?
“일단 먹자.”
“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전골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너 원래 스튜 좋아했잖아. 전골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 것도 다 알았나?
딱 한 번.
그녀와 딱 한 번 식사한 적이 있었다.
드래곤을 잡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다니, 역시 하이디엔은 강일과 함께 있기로 한 것이 잘한 선택이라는 걸 확신했다.
“역시, 여기가 최고라니까요.”
이젠 천상 지구인인 하이디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