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8화
268화 – 침공
#1
드레젠은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엄청난 군세가 몰려올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정신으로 움직이는데,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쳐 적들을 막아내야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연락책은 어떻게 할 겁니까?”
“연락책이요?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드레젠이 말했다.
전쟁이라고 하지만, 전투는 딱 한 번만 일어날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도록 설계할 거니까.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했다.
전쟁에서 연락책은 필수였다.
정보, 그리고 교란.
이것들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 전투보다 더 클 정도였으니까.
“딱 한 번. 한 번만 전투할 겁니다. 거대한 회전이겠죠.”
“그게 말이 되나?”
“너무…… 이상적인 것 같은데.”
멀리서 참관하고 있던 드래곤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으니까.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이라면서, 딱 한 번의 회전으로 끝을 보겠다니.
-그러게. 전쟁이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닌데
-맞지.
-한 번만 딱 전투하고 끝내면 더없이 깔끔하긴 하지.
-ㅇㅈㅇㅈ
-과연ㅋㅋㅋㅋ
다만, 그 회전은 대륙 일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사람들이 만든 것이든, 본래부터 있었던 자연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
그 지역은 수백 년 동안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이 되겠지.
“할 수 있습니다. 저 녀석들은 대륙을 몰살시키는 것이 일차 목적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우리 같은 이들. 소위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잡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해 봐서 알았다.
베리드는 분열과 배신, 서로 뭉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분란을 조정했고, 파벌을 만들게 했다.
구심점을 찾아 없애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계략을 퍼붓지 않았던가.
“애초에 유명인사가 모두 뭉쳐있는 곳이라면, 머리 아프게 전략을 짤 필요도 없죠.”
“……정말 베리드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일까?”
“민간인들은 어차피 우리가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너무 터무니없어서 문제였지.
딱 한 번.
한 번만 모두가 뭉치면 그런 계략도 소용없을 거다.
거기에, 성좌들의 도움이 살짝 첨가된다면, 적의 심장부를 그대로 노출시킬 수도 있겠지.
“그들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까?”
“한 번만 이기면 되니, 총력전이 되겠죠. 우리의 수를 충분히 줄여놓기만 해도 좋다는 생각일 겁니다.”
“어차피, 그들은 다시 침공할 수 있으니까.”
드레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량으로 계속 소모만 시켜줘도, 필멸자인 브락시아 주민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을 테지.
“이론은 그럴 듯해.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알고 있는가?”
“성좌들이 개입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어떻습니까.”
성좌.
드레젠은 성좌와 실질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존재였다.
확실히 그들의 도움이 있다면, 해 볼 만한 수였다.
드래곤 로드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정말로 성좌들이 도움을 줄까?”
“지금까지 나타나지도 않았던 성좌인데, 진정 그들이 나타날까?”
다른 로드도 의문문으로 물었다.
어느새, 이들의 머릿속엔 성좌에 대한 불신이 자라난 것.
드레젠은 드래곤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했다.
“저에게 약속했습니다. 반드시 도움을 주겠다고.”
이럴 때 성좌가 딱 나타나서, 멋지게 동조해주면 좋으련만.
지금 성좌들은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테지.
드레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웅-.
그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작은 울림이 일었다.
“-어?”
누군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 누군가가, 위대하신 종족인 드래곤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푸른 머리칼을 맵시 있게 땋은 여인이었다.
푸른 비늘, 블루 드래곤 일족의 수장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모든 이들이 뒤를 돌아봤다.
“마침…… 오시는 것 같군요.”
드레젠이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 그리고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존재는 성좌들밖에 없었다.
무의 추종자나 베리드가 이곳을 습격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들도 어마어마한 도박을 걸어야겠지.
화신체는 와야 살아 나갈 수 있을 테니.
“다들 모여 있었군.”
“와, 생각보다 잘 만들어 놨는데?”
드레젠도 모르는 성좌가 나타났다.
아니, 한 명은 알고 있는 사람이긴 했다.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이지.
총 셋.
검은색, 흰색으로 대비되는 여인 둘과 평범하게 생긴 남자 한 명이었다.
은빛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등장한 푸른 눈의 여인은 모두가 알고 있는 자였다.
“대모, 어서 오세요.”
“응. 오랜만이다. 인사해. 우리를 만드신 분이니까.”
그녀의 말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성좌들을 만들었다는 말.
함부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모든 성좌들을 만든, 창조주란 뜻이었으니까.
드래곤 로드는 물론이고, 이곳에 모인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다들 괜찮아. 편하게 있어.”
“위, 위대하신…….”
평소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드래곤들이 허둥지둥하는 꼴은, 그다지 우습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랬으니까.
그나마 드래곤들은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다른 이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이들인가. 제법…….”
옆에 있던 검정 머리 여인이 말했다.
스텔라가 발랄한 목소리로 그녀를 소개했다.
그녀의 정체를 듣고, 다시 한번 사람들이 까무러쳤다.
“헬라야. 다들 들어봤지?”
“바, 밤의 여신…….”
“이렇게 모여 있다니, 얘기가 편하겠네.”
지직-.
성좌가 나타날 때마다 방송에 문제가 생겼다.
캠에서 송출하는 화면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걸 눈치챈 것인지, 스텔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방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대부분 그냥 넘겨버렸다.
“여기 있는 내 후계자 말대로, 마지막 전쟁은 우리가 힘을 좀 써 볼 거야.”
창조주가 말했다.
그 말도 말이었지만, 그가 한 다른 말이 더욱 충격이었다.
분명, ‘후계자’라고 했으니.
교황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이 자가, 창조주의 후계자란 말씀입니까?”
“응, 이만한 인물이 없더라고.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일을 말해 주지.”
창조주는 세계를 관리하고, 생명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의 창조주와 한판 붙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그 다른 세계의 창조주가 바로 무의 추종자들을 이끄는 자였다.
“무의 추종자들은 너희들이 상대하기엔 너무 거대한 상대라…… 나설 필요도 없어.”
“베리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강력한 패지. 이곳, 브락시아는 꽤 중요한 곳이고.”
헬라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경청했다.
성좌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세 명이라 했다.
밤과 어둠, 몬스터의 성좌 헬라.
빛과 태양, 인류의 성좌 스텔라.
마지막으로 모든 생물을 굽어보는 창조주.
“너희들은, 우리가 만들어 준 전장에서 베리드를 쳐부수면 돼.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드레젠은 그들을 편하게 바라봤다.
스텔라의 힘을 받아서 그럴까, 그들이 친인척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창조주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직접 그리고, 내가 직접 생각해 만든 이들의 후손이란다.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다오.”
창조주의 인자한 웃음.
그 장면에 안 넘어갈 자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너희들이 살아갈 이 땅을 지켜다오.”
창조주로서, 그간 챙겨주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역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또한, 이제 은퇴할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드레젠, 자네는 나를 잠깐 보지.]
드레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일까.
회의는 드레젠과 창조주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아주 간단했다.
아르게논 대륙의 대평원.
그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로 했다.
“물자들을 옮겨야 하겠군. 내 힘써 보겠네.”
황자가 일어섰고, 다급히 그를 따라온 기사들을 찾았다.
황제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전쟁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 되겠지.
브레이시스 제국의 존폐가 걸린 일이기도 했다.
“대리인이시여, 저희 신성 왕국도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고마워, 약속 시각에 보자.”
“모쪼록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보는 크리스가 드레젠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성장기라 그런지, 게임 시간으로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부쩍 큰 느낌이었다.
드레젠이 없는 타지에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스승님,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일은 다 잘 되고 있지?”
“네. 절 도와주는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사도들도 한 번 물갈이가 됐고요.”
“샤페론은, 언제 데려갈 거야?”
크리스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 크리스를 좋아하던 시청자들이 난리가 났다.
-애기 어떡하냐!
-우리 크리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이제 남성미가 아주 뿜뿜하넼ㅋㅋㅋ
-우리가 널 업어 키웠어ㅜㅜㅜ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드레젠이 열심히 방송할 수 있게 키워준 것도 사실이었다.
드레젠이 크리스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몸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크리스도 훌쩍 떠나버렸다.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렸던 주동자들이 있는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니.
정말 배짱도 두둑한 녀석이었다.
거인족도, 드워프족도, 드래곤도 각자 준비할 것들이 있다며 떠났다.
드레젠의 곁에는 니오베, 그리고 하이디엔과 엘프들만 남아 있었다.
“이제부턴 난 그대와 함께 행동할 거다.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하니, 내가 그댈 도와주겠어.”
“알겠어요. 든든한데요?”
“성좌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다녀오거라.”
니오베의 배웅을 받으며, 드레젠은 창조주와 독대했다.
그는 드레젠에게 손을 뻗었다.
가벼운 악수였다.
“이야, 나랑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게 얼마 만인지 몰라.”
“어떻게 된 겁니까?”
“잠깐 실례.”
방송에서 음향만 뺀 창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구 출신이라니, 처음에 봤을 땐 엄청 놀라웠어.”
“창조주님도 지구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아. 내 고향도 지구지. 네가 사는 지구랑은 좀 다르고. 평행세계 알지? 뭐 그런 거야.”
수많은 세계가 있었고, 창조주는 그중 하나의 지구에서 태어났다고.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다고 얘기해줬다.
드레젠이 자신과 닮았다면서.
“은퇴를 해야겠다는 건, 어떤 뜻입니까?”
“전쟁이 끝나면, 그리고 이곳을 진짜 세계로 만들고 나면 한동안 쉬려고. 아, 그리고 현이라고 불러라. 내 이름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후계자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흘끔, 시청자들을 보니 소리가 안 들린다고 난리였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라서 안타까웠지만.
자신을 현이라고 밝힌 그가 말했다.
“지금 이야기에선 그다지 필요 없는 주제지. 몇 세기는 지나야 할 테니까. 선택해. 너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아니면 이곳, 브락시아에서 영광을 누리고 싶어?”
드레젠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과연, 이 질문의 저의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