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5화
255화 – 억지의 국가
#1
사기라의 일까지 모두 마친 드레젠.
그는 오늘 하루 방송을 무사히 끝냈다.
수인족과 탑을 빠져나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뤘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나, 새벽 5시에 육박했기 때문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도 있으니, 아쉽긴 하네.’
드레젠의 방송이란 그랬다.
한번 온 사람들은 밤잠도 잊고 그의 방송에 빠져들었다.
간혹 이런 메일까지 오곤 했다.
회사 사원들의 근무 태만 이유가 자신의 방송 때문이라고.
“그만큼 내 방송이 인기 있다는 뜻이겠지?”
맞았다.
외국 시청자, 중계 스트리머까지 합하면 약 3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방송을 보고 있었으니까.
매니저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지만,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해당 회사가 근무 시간을 30분 정도 늦췄던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충실하네.”
드레젠에서 강일로 돌아온 그가 풀썩, 침대에 누웠다.
꿈만 같았다.
모든 것들이, 전부 환상인 것 같았다.
성좌들이 부탁한 일을 끝냈을 때, 용사였던 시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탈출에 실패해서 혼수상태에 빠져있진 않을까?
‘뭐, 그러면 그때 가서 박살 내면 되지.’
고민은 접어두기로 했다.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이곳은 분명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성좌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아들-! 자니?”
“아니? 엄마야말로, 이 시간에 왜 안 자고 있어?”
“엄마는 방금 일어났지. 조깅 좀 하고 오는 길이야.”
임수아 여사는 정말 부지런했다.
야심한 시각인 새벽 4시에 기상해, 무려 한 시간을 운동하고 오는 길이었으니까.
50이 넘어가는 나이임에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아-.”
“아는, 아침 먹을래? 오다가 뭐 좀 사 왔는데.”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잘 됐다.”
“먹고 바로 자면 붓는다-.”
강일은 피식 웃었다.
초인이나 다름없는 그의 육체는, 이미 대사로 움직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
현대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체질이었다.
식탁에 앉은 강일은 휴대전화를 들어, 인터넷 기사를 살펴봤다.
“하이디엔이 잘 하고 있나 보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푸흡-!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머, 너희 요즘 그렇고 그런 거 아니었어?”
역시 학생들을 많이 봐 온 경험 때문일까, 임수아 여사는 눈치가 엄청나게 빨랐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다 눈에 보인단다.
강일 역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이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얼른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엄마도 친구 같은 며느리 생기고 좋은데?”
“……걔가 엄마보다 나이 많다니까.”
“호호, 그럼 언니라고 불러야 하나?”
넉살 좋게 웃는 어머니 때문에, 강일은 피식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마침 강일의 전화가 울렸다.
그에게 전화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임수아 여사가 액정을 보고 슬쩍 미소 지었다.
굉장히 능글맞은 미소였다.
“뭐해? 여자친구 전화 받아야지.”
“알겠다고.”
강일이 전화를 받았다.
하이디엔의 고운 목소리가 울렸다.
“강일 씨, 안 주무셨네요?”
“알아서 전화 한 거 아니야? 무슨 일인데?”
“일단은 안부 전화죠. 그리고 꽤 흥미로운 소식을 들고 왔어요.”
“흥미로운 일?”
하이디엔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그녀는 대기업의 회장이었다.
지금 대한민국 실세 중 한 명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강일도 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네. 일본 정부에서 슬슬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처리할까 하다가 의견을 물어보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연락 드렸어요.”
“일본이? 올스타전에서 승부를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나 보지?”
“네. 그들은 이미 프로리그 출범이 확정된 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일인가 봅니다. 타깃이 한국이 된 거고요.”
정확히 말하면 한국 내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인 드레젠을 겨냥한 거겠지.
상황이 또 한 번 반전 되었다.
하이디엔은 정확한 설명을 이어갔다.
일본 정부는 현재 젊은 이들이 내각에 들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중에 사나다 가문 사람이 있더군요. 정계, 그것도 중앙 내각에 완벽하게 진출하기 위해서 세이브 더 브락시아를 이용하려는 것 같아요.”
“카드로는 사나다 마에를 쓰겠군. 희생양은 우리고?”
“정확해요.”
강일이 피식 웃었다.
뭐, 거기까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해진 대로 게임 하고, 정해진 대로 움직이면 그뿐인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일본이었다.
“문제는, 그쪽에서 또 ‘룰’을 바꾸려 한다는 거죠.”
“룰?”
“맞아요. 요즘 일본은 참…… 억지를 잘 부리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판을 짜는 거죠.”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일본 특유의 승부를 거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실 불리한 조건을 유리하게 바꾸는 건, 탁월한 정치적 능력이기도 했다.
한국이 그렇게 행했다면, 아마 자국민 중에는 능력 있다며 고개를 끄덕일 이들도 분명 존재하겠지.
일본이 작업을 들어갔다면, 그 판에 맞춰 놀아줄 필요가 있었다.
“내버려 둬. 발악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러죠. 그렇게 말 하실 줄 알았어요.”
“언제 와?”
“왜요, 보고 싶어요?”
강일이 피식 웃었다.
보이진 않지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옆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 얼른 와. 밥 먹자.”
“……아, 알았어요. 내일 모래 한국에 도착해요. 오늘 회의하고, 기사 나갈 겁니다.”
“그래, 몸조심해.”
“조금만 기다려요.”
통화가 끝나고, 강일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브락시아에서도, 돌아와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
그가 정말 순수한 시절에 느꼈던 기분이었다.
임수아 여사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2
저녁쯤, 포털 사이트엔 한 가지 기사가 나돌았다.
일본이 대회의 룰을 새롭게 제안한 것.
일본은 지원금을 조금 받는 대신, 대회의 전권을 획득했다.
기본적인 가이드라인만 지킨다면, 대회의 방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일본, 대회 일정을 앞당기고, 세계인의 축제를 빨리 개최할 것.>
<최초 올스타전, 대장전 도입!>
<새롭게 추가된 모드 : 대장전은?>
대장전.
게임 좀 해봤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룰이었다.
차례대로 나가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팀이 승리를 가져가게 되는 경기 방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이 만들어낸 추가적인 룰이었다.
<대장전에 나간 팀원은 팀전에 나올 수 없다는 룰, 한국 선수들에게 미칠 영향은?>
<시드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 타국 메이저 선수를 모두 대장전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장전은 경기가 한 번뿐이지만, 팀전은 네 번이나 있었다.
당연히 종합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팀전을 많이 이기는 것이었다.
대장전 한 번, 팀전 네 번으로 이뤄진 결투 방식.
다섯 판을 겨뤄, 세 판을 먼저 가져가는 팀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아니 장난하낰ㅋㅋㅋ
-일본 애들은 선수 풀이 큰 편임;; 이러면 다른 나라가 불리하지.
-연습할 시간도 없네; 다음 주 개최라는데?
-도랏;;
-제정신인갘ㅋㅋㅋㅋ
당연히 한국 여론은 안 좋게 흘러갔다.
사실상, 이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본래 브락시아에서도 허락할 수 없는 대회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 이유.
그건 강일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잘 됐군. 훈련 강도를 높일 필요가 있겠어.’
아예, 당분간 게임을 접고 훈련에만 매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고작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올스타전.
선수들 역시 패닉에 빠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반면, 일본은 거의 축제 분위기겠지.
터무니없는 방법이 먹일 것이라는 걸, 그들도 예상치 못했을 테니까.
‘희망은 계속 잡고 있는 편이 좋으니까.’
희망이란, 방향이 잘못되면 더없이 끔찍한 결말로 나타난다.
강일은 자꾸만 헛된 짓을 하는 일본에게, 조금 더 희망차 보이는 미래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강일은 피식 웃으며 방송 준비를 서둘렀다.
#3
같은 시각, 일본.
사나다 마에는 VPN을 통해, 드레젠이 방송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막 대회 룰과 일정이 확정됐다.
고작 일주일.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었다.
‘드레젠이 반발한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번 올스타전은 국가 운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대목이었다.
세이브 더 브락시아.
그리고 동기화를 통한 캡슐 과학.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어른들에게 아직 상상 속 기술이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않는 중이었다.
‘가상현실! 이게 바로 일본을 부흥시킬 열쇠다!’
그녀의 아버지는 항상 그걸 강조했다.
게임 역시 사나다 마에의 아버지가 새롭게 밀고 있는 분야였다.
요즘 중국이 게임 산업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챙겼던가.
옆 나라인 한국은 무려 거대 기업으로 발돋움 하고 있는 브락시아가 있었다.
‘우리는 계속 준비했어. 내가 팀전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과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 게이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일조할 수 있겠지.
아버지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난, 반드시 해내야 해.”
한쪽에는 방송을 틀어놓고, 다른 한쪽에는 마나 컨트롤을 연습하는 사나다 마에.
그녀는 대회에서 쓸 비장의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똑같은 스킬을 쓰더라도 방법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것.
드레젠이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 선수들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각오하라고.’
모든 판은 짜였다.
이제 일주일만 기다리면, 그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정말 금방이었다.
드레젠은 그녀의 예상대로 일주일간 훈련 방송만 했을 뿐, 별다른 진행을 하지 않았다.
“적들의 전력은 이미 전부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까 준비한 대로만 해라. 알겠지?”
“알겠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