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4화
254화 – 붕괴되는 전설
#1
사기라는 세월이 지나갔음을 통감했다.
제아무리 공격해도 눈앞에 있는 적은 쓰러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겨우겨우 ‘막고’ 있는 거지.
콰앙-!
대충 휘두른 것 같은 대검이 그녀의 손톱과 부딪혔다.
‘제법이구나. 세월이 많이 변했어.’
그녀는 직감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자신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를 들이부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다.
어렸을 때, 아무리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그때는 성장할 수라도 있었지, 지금은 아니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나?”
피의 여왕.
그녀의 실력은 생각보다 떨어졌다.
드레젠 본인이 기억하고 있는 사기라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드레젠이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피의 여왕이 고작 이 정도라고? 실망인데.”
[크르르-]
그녀는 딱히 대답할 수 없었다.
사기라 본인은 분명 전성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뭔가.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대, 나를 알고 있나?]
“그래. 다른 시간 축에서 상대하고 왔지.”
[그랬었군. 그랬었어.]
사기라는 자세를 낮췄다.
드레젠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진짜 사기라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그야말로 피의 여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피의 여왕이라기보단, 늑대 여왕 사기라의 모습에 가까웠다.
[무의 추종자는 나에게 약속했지. 거대한 힘을 주겠노라고. 하지만 그것은 수인족의 수치다.]
콰앙-!
그녀가 혼신을 다해 발톱을 휘둘렀다.
드레젠은 희미하게 웃었다.
사건이 비틀렸다.
사기라는, 지금 무의 추종자들에게 완벽하게 잠식되지 않았다.
“아직 무의 추종자들이 준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그렇다. 수인족은 언제나 자신의 힘을 믿고 싸우지. 그게 바로 수인족이다.]
“그럼, 서열 정리를 해야겠군. 안 그래?”
사기라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녀가 작게 울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난 이 탑에서 나갈 수 없다만.]
“그건 내가 해결해 주지. 어때, 내가 이기면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싸움? 원 없이 하게 해 줄게.”
[크르륵-! 좋다! 우리 수인족은 결투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갑자기?
-ㅋㅋㅋㅋ수하를 더 만든다고?
-좋다!
-다 드루와!
설마 사기라가 여태까지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줄이야.
대현자가 이곳에 온 것과 관련이 있었을까?
어쨌든, 드레젠에겐 훨씬 좋은 일이었다.
“덤벼라. 피의 여왕.”
[좋다-! 도전자! 네 힘을 시험해 주마!]
둘은 순수한 실력으로 겨루고 있었다.
아무도 둘의 실력 행사를 방해하지 않았다.
어느새 전장은, 둘의 대결만 이뤄지고 있었다.
수인족은 여왕의 뜻을 따랐다.
“이거, 일이 재밌게 됐는데요?”
“그러게. 수인족을 이런 식으로 휘하에 두실 줄은…….”
수많은 수인이 전투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수인족은 서열을 확실히 정했다.
그들만의 문화이며,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종족의 뿌리였다.
[여왕님! 저희는 언제나 여왕님을 따를 겁니다!]
[수장이 누가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여왕님의 밑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들은 전투에 굶주렸다.
본래, 그들의 운명은 대현자가 비틀어 놓을 예정이었다.
왜 대현자가 이곳에 왔겠는가.
다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의 계획을 드레젠이 어그러뜨렸다.
그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일이 잘 풀린 격이었다.
“더 힘을 내 보라고, 네 수하들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크아아아아-!]
사기라는 미친 듯이 손톱을 휘둘렀다.
넘실거리는 붉은 오러가 모든 것을 갈라버릴 기세로 드레젠에게 쇄도했다.
손톱의 궤적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
드레젠은 그 점을 이용해서 사기라를 철저하게 농락했다.
“더 빠르게 해야지.”
[크으, 날 시험할 생각이구나, 인간-!]
“맞아.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거든. 그러기 위해선, 네 전력이 필요하다 사기라.”
패배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사기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을 호적수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동시에 강한 이끌림을 받았다.
저자라면, 못다 한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르르…… 수인족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건, 오직 피의 여왕인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닐걸? 내가 말했지만, 난 수인족과 겨뤄본 적이 있다. 그들의 습성을 파악하고 공부했지. 날 믿어도 좋아.”
[그 말을 믿게 해 봐라.]
사기라의 모습이 변했다.
털이 복슬복슬한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일반적인 인간과는 전혀 달랐다.
“후우-, 이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군.”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전사.
손과 발은 여전히 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녀의 모든 마나가 그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 형태, 드레젠은 알고 있었다.
수인족의 한계를 완벽하게 뛰어넘은 형태.
모든 공격력을 손과 발에 집중해, 전투력을 끌어 올리는 방식이었다.
“일격이다. 인간.”
“좋아, 받아 쳐주지.”
일격에 어울리는 검술이 있었다.
사라미스 검술.
여왕의 모든 것을 받아 줄 검술로는 제격이었다.
드레젠이 자세를 잡았다.
“오라고, 피의 여왕.”
“오늘, 전설이 지겠군.”
쿠우우우우-!
붉은 오러가 사기라를 중심으로 몰아쳤다.
마스터도 일격에 조각낼 수 있는 위력이었다.
드레젠도 마나를 끌어모아, 전신에 단단히 주입했다.
사라미스 검법의 정수가 그의 몸에서 뿜어질 준비를 끝냈다.
“이 일격을 받고 살아남은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내가 두 번째가 되겠군.”
피의 여왕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저 상태에서, 그녀가 지나간 길은 온통 붉게 칠해졌었지.
탑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땐, 항상 선발대를 투입했었으니까.
‘사기라는 큰 전력이지. 슬론도 좋아하겠군.’
지금, 여기서 전설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겠다.
드레젠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기라의 움직임을 읽어냈다.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걸, 모두 포착했다.
‘지금-.’
“흐아아아압-!”
공간이 흔들리고 붉은 섬광이 드레젠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1초 후, 마나의 폭풍이 주변을 마구 할퀴며 위력을 과시했다.
드레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마나에 집어 삼켜져, 갈가리 찢긴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넌 단장의 기운을 느끼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장난이지. 하하.”
그림자 기사단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어느새 전투를 멈추고, 함께 구경하고 있었던 수인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대들은 걱정도 되지 않는가?]
“걱정?”
[사기라 님은 당대 최고의 전사셨다. 저분의 손에 찢긴 인간만 만 명이 넘어가지.]
그들의 말엔 자부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기사단원들은 수인족의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만 들어선 대단했다.
사실 자신들도 정면으로 붙는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이기도 했고.
“미안한데, 우리 단장님은 브락시아 본토에 있는 생물들이랑 붙여놓으면 안 돼. 저분은 성좌들이 인정한 분이거든.”
[…….]
수인족의 귀가 쫑긋거렸다.
당황스럽다는 반응.
기사단원이 허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지? 우리도 그랬다니까. 그러니 잠자코 보고 있어.”
[크르르-.]
작게 울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수인족.
서열을 정하는 싸움에선, 절대 누군가가 끼어들면 안 된다는 율법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가 기다릴 것도 없이, 결과가 드러났다.
울컥, 황금빛 가루들을 쏟아내는 사기라.
“크윽…… 여, 역시, 강하구나.”
“내가 두 번째로군, 그렇지?”
“내가…… 졌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쓰러지는 사기라.
수인족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았던 여왕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방금 본 사람?
-ㅋㅋㅋㅋㅋㅋ있을리가;;
-진짜 여기는 전투 맛집인데 내 눈이 호구여;;
-싼 눈이라 그럼
방금 드레젠이 쓴 검술은 사라미스 검술에 있는, 유일한 반격기였다.
사실 사라미스 검술에서 기술이라고 부를 것도 없었지만, 이 기술은 달랐다.
상대방의 힘을 그대로 받아 쳐내는 기술.
은자디아가 숨을 거두기 전, 완성한 비기이기도 했다.
“내가 이겼다, 수인족.”
드레젠이 검을 둘러매고, 쓰러진 사기라를 안아 들었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해서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드레젠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수인족 앞에서 당당하게 외쳤다.
“오늘, 전설은 졌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자 앞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래, 그들의 전설은 졌다.
그리고 새로운 전설이 우뚝 섰다.
“수인족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 사기라가 원했던 것도 무엇인지 알고 있다.”
드레젠은 그들을 요긴하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그들의 의지는 대단했고, 육체는 단단했으니까.
사기라의 의지는 그대로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다를 것이다.
“너희들의 의지는 꺾지 않는다. 다만, 그 의지의 방향을 내가 정해줄 것이다.”
“역시 우리 단장님, 연설도 깔끔하게 잘 하시네.”
“괜히 성주가 된 게 아니라는 거겠지.”
전혀 아니었지만, 그림자 기사단들은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들에게서 반응이 왔다.
전설이 졌지만, 그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여왕보다 더 강한 자가 그 의지를 이끌어 준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새로운 왕께, 인사를 드립니다.]
[왕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우우우우우우-!
누군가 지른 하울링이 거대한 함성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군대를 얻었다.
대현자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냥 군대도 아니고, 한때 대륙을 누볐던 정예 중의 정예였다.
‘이제 기초 공사는 끝났다.’
오히려 너무 잘 돼서 탈이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할 일만 남았다.
이젠, 이들을 데리고 탑 밖으로 나가야 할 차례였다.
“슬론의 얼굴이 기대되는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