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3화
253화 – 피의 여왕에게로.
#1
피의 여왕 사기라.
그녀는 대륙을 수인족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다.
강인한 육체와 타고난 마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복종의 언령은, 모든 수인족을 하나로 뭉치는 걸 가능케 했다.
대륙 정벌을 준비하던 그녀는,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이곳에서 나가, 내 염원을 풀겠다.]
머릿속이 웅웅 울리는 언령이 기사단과 드레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언령은, 결국 정신공격이었다.
정신력이 강하거나 마나를 다뤄, 언령을 차단할 수 있다면 효과는 미미했다.
드레젠과 기사단에게는 그저 사기라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나 분배를 잘 하도록. 이제부터 쉬는 시간은 거의 없으니까.”
탑은 총 열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무리를 처치하고 미니 보스가 기다리는 방으로 가는 방식이었다.
수인족들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방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드레젠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전투를 시작했다.
“수인족들은 피를 보면 흥분한다. 그러니 되도록 일격에 처리해.”
“팁 감사합니다.”
피잉-!
마나를 잔뜩 실은 화살이 선두에 있는 수인족의 미간을 꿰뚫었다.
황금색 가루가 살짝 흩날리며 그대로 쓰러지는 수인족.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다시 한번 화살을 메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수인족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이성을 완전히 잃은 전투 병기.
쇠도 단번에 잘라버리는 위력의 손톱이 아그네스에게 쇄도했다.
궁사에게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궁사가 아니었다.
“어리석군요.”
가볍게 움직여 손톱을 피해낸 그녀가,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수인족의 목을 꿰뚫었다.
사실 이편이 그녀에겐 훨씬 편했다.
생각보다 활을 쏘는 일엔, 마나가 많이 들었으니까.
[깨엥-!]
아그네스가 궁사라는 사실을 안 적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녀는 암궁이기 이전에 그림자 기사단이었다.
화살촉 하나로 수많은 적들을 죽인 전력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그녀 홀로 싸우는 날이 아니었다.
“뒤에서 안심하고 싸우라고. 막내.”
“호호, 고맙습니다.”
그녀가 뒤로 훌쩍 뛰어올랐다.
핑핑핑-!
순식간에 화살을 메겨 쏘는 솜씨는 과연 일품이었다.
절대 빗나가지 않는 화살.
마치 라파엘의 궁술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앞장서겠다.”
새하얀 폭발이 탑을 뒤흔들었다.
불길한 마나라도 일단 있으면 되는 드레젠의 능력.
그건, 이런 난전에서 빛을 발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도 절대 지치지 않는 힘.
인류의 희망이라고 불렸던 그 능력이 그대로 발휘됐다.
[호오, 제법이구나.]
사기라는 저 멀리 있는 옥좌에서 여유로운 목소리를 냈다.
마나로 방어하고 있음에도 제법 신경 쓰이는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수인족들과 탑에 오르는 도전자들을 잡아먹었지.
‘이번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희생은 종족을 성장시킨다지만, 앞으로 희생할 일은 많았다.
성장은 거기서 해도 늦지 않는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전력을 보존해서 전쟁에 대비해야 했다.
드레젠은 파죽지세로 탑을 밀고 들어갔다.
피의 여왕이 흥미롭게 쳐다볼 정도였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었구나.]
[우리가 싸울 필요는 없다. 나와 함께 왕이 되자꾸나.]
그녀의 유혹은 계속 되었다.
언령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니, 상당한 마나를 쏟아붓는 모양.
드레젠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 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신력입니다.”
-계속 뭔가 온다!
-아니 채팅러쉬를 하네;;
-엌ㅋㅋ 채팅러쉬 무엇ㅋㅋㅋㅋ
-ㄹㅇ이네 멀티 태스킹 유도하넼ㅋㅋㅋ
옛날 게임, 특히 별들의 전쟁에서 상대방의 손을 꼬이게 하는 방법이 몇 있었다.
채팅을 쳐서 키보드로 손을 유도한 다음, 갑작스럽게 공격을 가는 방법.
프로리그에서 금지당한, 악랄한 기술이었다.
지금 사기라가 하는 행동이 그와 비슷했다.
‘기사단들은 괜찮군.’
생각보다 훨씬 잘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무념무상으로 적들을 분쇄했다.
가는 길이 험난하겠지만, 이 정도도 잘 버틴다면 괜찮겠지.
드레젠은 속도를 저 높이기로 했다.
이곳은 마나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흡수해도 없어지지 않아, 마음껏 힘을 방출할 수 있었다.
“조무래기들이 모두 없어지면, 저 방의 문이 열릴 겁니다.”
길을 막고 있는 문.
드레젠은 정석대로 쭉쭉 나아가기로 했다.
처음에만.
#2
일차적인 전투가 순식간에 끝났다.
브락시아 최고의 단일 세력이 한 곳에 모였다.
작은 국가 하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바닥엔 황금빛 가루가 흥건했다.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생각보다 별거 없군요.”
“이 정도 전력인데, 생채기 하나라도 있으면 내보내야지.”
“하핫! 그것도 그렇군요.”
단원들은 아직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드레젠은 문을 바라보며 경계심을 키웠다.
이제부터 시작일 테지.
그가 문 앞에 섰다.
“이제부턴 긴장 좀 해야 할 거야.”
“안 그래도 그 요망한 목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꽤 거슬리네요.”
“그러니까 집중을 더 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영향력은 더 커질 거다.”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워밍업에 불과했다.
쿠구구구-.
문이 열렸다.
[침입자-! 침입자를 죽여라-!]
“오우, 여기도 꽤 많은데요?”
“내가 전위를 맞는다. 다들 보조해.”
“예-!”
드레젠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슬론보다 덩치가 배는 큰 웨어 울프가 중앙에 서 있었다.
그래서 뭐?
드레젠은 피식 웃으며 검을 들었다.
“여왕, 듣고 있나?”
[흠-, 그렇다. 도전자여. 이제 내 권속에 들어올 마음이 생겼는가?]
“그 언령,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보기엔 앞으로 두세 번이 한계 아닌가?”
대답이 없었다.
드레젠이 피식 웃었다.
언령이든, 초능력이든 능력을 사용하면 대가가 필요했다.
게임에서 자원을 소비해 무언가를 하는 행위와 똑같은 것.
그건 브락시아에 사는 만물에 적용되는 법칙이었다.
“나랑 제대로 싸우고 싶으면-.”
콰아아아아아아-!
드레젠이 본 실력을 드러냈다.
시청자들에겐 공략 방법을 대충 설명했다.
이젠 실력과 깽판을 모토로 할 때였다.
“지금부터 입 다물고 마나나 아껴 둬.”
그가 검을 앞으로 뻗었다.
안티 자이언트.
거대한 것을 모두 없애버리는 황자의 비기가 다시 튀어나왔다.
콰우우우우-!
마나를 끌어들여 커지는 백색 칼날.
드레젠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이, 이게 뭐야아아아아악-!]
그저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눈앞에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사기라, 기사단원들까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드레젠이 씩 웃었다.
“문 열지 마라, 그럴 시간도 아까우니까.”
콰아아앙-!
거대한 검날을 만들기 위해 모았던 마나들이 레이저처럼 발사되었다.
실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현장이었다.
문제는, 그런 광경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가즈아아아아!
-이거짘ㅋㅋㅋ
-혼돈! 파괴!
-다 부숴라! 부숴!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
법과 규율로 인해 사소한 것 하나하나 지키며 살아가는 사회 속 우리.
게임은, 그런 것이 없어서 좋았다.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풀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시청자들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화끈한데요?”
“허허, 할 일이 줄어들고 있군요.”
“이래야 우리 단장 답지요. 얼른 끝내고 나가시죠.”
펄럭-.
단원들이 일제히 장막을 뒤집어썼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곧, 탑에 학살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3
사기라.
피의 여왕.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대륙에 몇 없었다.
제국이라 칭하는 곳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들만이, 그녀를 막아설 수 있었다.
빈번히 부딪혀 미운 정까지 들 정도로 싸웠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땐, 시대가 많이 변해 있었다.
‘이건, 조금 재미있군.’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만한 적을 생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사기라 본인이 활동할 당시에는 드래곤도, 성좌도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피가 끓었다.
그녀는 수하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이쪽으로 오라. 도전자여.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겠다.]
마지막 전언을 전한 후, 그녀는 거대한 동공을 바라봤다.
탑의 가장 꼭대기 부분.
원 없이 전투를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아이들아, 모두 모여 우리의 염원을 이루자꾸나.”
아오오오오-!
그녀가 고개를 쳐들며 긴 하울링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탑 전체가 울었다.
탑에 있는 모든 수인족이 여왕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만약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하더라도, 각개격파를 당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저들의 수는 적다! 우리가 모두 뭉친다면, 오늘 여기서- 저들의 피를 취할 수 있으리라!”
피의 여왕은 늑대들을 선동했다.
그들은 복종의 뜻으로 고개를 높게 쳐들고 길게 울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수인족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영광스러운 죽음.
그 성스러운 단어 앞에, 수인족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다.
그래, 사기라의 시대에선 분명히 그랬다.
슬론이 통치하고 있는 지금의 수인족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군대였다.
“내가 앞장서겠다! 나를 따르고, 적들의 피를 취해라! 영광스럽게 죽고, 이 어두운 곳에서 나가는 거다-!”
“여왕님 만세-!”
그들의 사기가 최고조가 되었을 때, 드레젠을 비롯한 그림자 기사단이 입구로 들어섰다.
모든 수인들이 그들을 쳐다봤다.
드레젠은 빽빽하게 모여있는 수인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피의 여왕답군.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좋아.”
“인간? 고작 인간이었나?”
“고작이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강하다.”
쿵-!
드레젠이 커다란 늑대의 목을 던져 놓으며 말했다.
수인들은 오크와 비슷한 성정을 지녔다.
아니, 모든 종족이 해당하는 감정이겠지.
동족애.
끔찍하게 아끼는 자가 죽으면 일어나는 분노.
그것이 수인족들을 휘감았다.
[크르르-.]
모두가 한마음으로 드레젠을 노려봤다.
여왕 역시 분노를 참지 않았다.
그녀가 흉성을 터뜨리며 드레젠에게 달려들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수인들 역시, 그림자 기사단을 죽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준비됐지?”
“물론이죠.”
“그림자 기사단의 힘을 보여 주자고.”
드레젠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