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8화
248화 – 만남
#1
“로드, 저자들은 인간 아닙니까?”
“그래. 내 오랜 친구다.”
슬론은 아그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의 인연은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아그네스가 어렸을 때, 우연히 곤경에 처한 슬론을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
드레젠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 덫에 걸린 나를 구해줬었지. 그 후로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이상한 기술을 쓰며 오더군.”
“호호, 추억이 새록새록 솟는 얘기군요.”
“일이 빠르겠군.”
드레젠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슬론은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전신에서 풍기는 마나부터 달랐다.
질, 양, 모든 것이 자신보다 위였다.
인간들이 마스터라고 부르는 존재보다도 위인 슬론이였다.
‘그런데, 나조차도 끝을 알 수 없다. 게다가, 냄새도 나지 않는군.’
가장 신기한 점이었다.
인간, 아니 생명체는 전부 고유한 체취가 있었다.
수인족들이 추적과 집단생활에 능한 데는 그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자는, 그런 체취가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쪽이 대장인가 보군. 슬론이다.”
“드레젠. 이들을 이끌고 있다.”
슬론의 귀가 쫑긋거렸다.
사실 복종의 의미로 누우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것에 불과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 존재감이 더욱 커졌다.
악취가 싹 사라졌다.
거대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존재감이 컸다.
“강자를 만나서 기쁜데, 우리를 도와주러 온 건가?”
“일단은. 보아하니 벌써 흑마법사들이 움직인 것 같은데.”
“역시 흑마법사들의 짓이었나.”
저 정도 크기의 어보미네이션을 합성하기 위해선, 대규모 인원이 필요했다.
무의 추종자들이 이끌고 있는 흑마법사들이 총동원됐겠지.
쿠우웅-.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체 덩어리가 움직였다.
방향은, 정확히 수인들이 살고 있는 거대 동굴 쪽이었다.
“로드, 저거…… 은신처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만.”
“맞아. 저 방향은…… 어, 어떻게 하죠?”
“뭐가 고민이냐. 침입자는 배제한다.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슬론의 모습이 거대하게 변했다.
드레젠은 물끄러미 어보미네이션을 바라봤다.
일대에 있는 몬스터가 싸그리 증발했을 테지.
그 원흉을 찾아야 할 시간이었다.
“그림자 기사단은 여기서 수인족을 도와줘. 나는 흑마법사를 잡으러 가겠다.”
“혼자 괜찮겠어요?”
아그네스가 물었다.
괜한 물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적과 나.
과연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드레젠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마법의 잔재가 남아있으니,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아. 문제는…….”
쿠우웅-!
또다시 땅이 울렸다.
수인족의 귀가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눈앞에 있는 시체 더미가 아니라, 훨씬 먼 곳에서 들린 소리였다.
슬론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한 놈이 아니군.”
“그래. 시간이 없다.”
“바로 움직여야겠어. 전사들, 날 따라와라.”
“예!”
수인족이 아래로 내려갔다.
어보미네이션의 지능은 트롤보다도 멍청했다.
하지만 끝없이 재생하는 신체와 무식한 내구도가 자랑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무의 추종자들은 선봉대로 어보미네이션을 보내곤 했다.
무식한 크기로 인해, 골렘들을 빼낼 수 있었으니까.
“공격 기술은 별거 없지만, 무식하게 강하다. 덩치는 곧 힘이니까. 안쪽에 코어가 있으니, 그림자를 잘 활용해 봐.”
“알겠습니다.”
그림자 기사들이 흩어졌다.
드레젠은 추적을 활성화했다.
칙칙한 검은 선들이 협곡 깊은 곳으로 이어졌다.
어보미네이션 같은 거대 생명체는 마나의 잔재를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문제는, 이게 어디까지 이어져 있느냐였다.
“빨리 이동해야겠군요.”
협곡 너머, 다른 영지의 근처까지 도달할 수도 있었으니까.
드레젠이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2
그림자 기사단, 수인족, 드레젠까지.
모든 이들이 정신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흐뭇한 모습을 지었다.
“흘흘, 제아무리 신성이라 해도,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신성.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된 영웅이 나타났다.
그는 용사의 운명을 타고났으며, 자신이 만들라고 마음먹었던 꼭두각시를 집어삼켰다.
계속 지켜봤다.
“……이제 설치는 것도 못 하겠지.”
준비해 놓은 수가 많았다.
그의 몸은 하나이니, 두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산 중턱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가 생각한 대로 잘 돌아가고 있으니, 더는 볼일이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강림하면, 너희들은 모두 끝이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 있다.
머리가 똑똑해도 사기를 당한다.
치밀하게 짜여있는 시나리오는 결말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걸림돌은 있을 수 있다.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길이라도 결국 멸망이라는 길은 똑같을 거다.’
그가 조용히 웃었다.
걸음을 걸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있던 장소를 보고 있노라면,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만났던 적이 있는 기분.
그는 긴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자신의 본거지로 향했다.
“어이-.”
낯선 소리가 들린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
그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어째서.”
“어째서는 뭐가 어째서야.”
그곳엔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
등에 멘 대검이 햇살을 받아, 흉흉하게 번뜩였다.
마치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드레젠.
그가 낯선 남자 앞에 있었다.
“실물을 보는 건 오랜만이야, 대현자.”
“……너, 나를 알고 있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있어. 그게 편할 테니까.”
희게 웃는 드레젠은,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솔직히 다시 볼 줄은 몰랐다.
세계가 멸망했다고 했을 때, 그들 모두 산화한 줄 알았으니까.
“그래, 떠오르는 별이군. 그런데, 어째서 내가 대현자라는 걸 알았지?”
“만난 적이 있으니까.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드레젠이 검을 꺼냈다.
대현자가 클클 웃었다.
만난 적이 있다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내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기억하지 못 하는 일은 없다.’
그는 천재였다.
아니, 천재라기보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다.
모든 일을 기억하고, 꺼내 볼 수 있는 능력.
모든 일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능력.
대현자라고 불릴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된 것은, 아득히 먼 옛날.
“너- 언제부터 모든 일을 기억할 수 있었지?”
“그것도 내가 기억하지-.”
대현자는 멈칫했다.
그의 첫 기억은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상점가였다.
왜, 거기서부터 기억한 것일까?
심지어, 그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전의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잘 기억해 봐. 대답 여하에 따라서, 널 살려둘지 말지 결정해야 하니까.”
드레젠은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눌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목을 베고 시체도 남기지 않도록 난도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마등처럼 계속 생각나는 괴로운 기억들.
그것이, 드레젠의 자제력을 점점 갉아먹었다.
‘안 돼. 감정으로 움직여선, 결국 저놈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 거다.’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는 것이 대현자의 특기였으니까.
드레젠은 그를 압박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갔다.
흉험한 마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나는…….”
대현자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보였다.
드레젠은 검을 든 손에 힘을 줬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당장에라도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아…….”
-뭘까?
-좀 무서운데;;
-아까 그것도 그렇고;; 왜 피가 황금색이 아닌겨;;
-그러네?
대현자의 눈빛이 변했다.
흐리멍덩한 눈빛.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눈동자.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그에게는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허무하게 죽여버리기엔 아까웠다.
그 갈등이, 결국 검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 대현자는 떨리는 눈동자로 희미한 신음을 뱉었다.
“크으-흐으-이, 이 기억은…… 대체 뭐냐.”
나이가 든 자신의 모습.
함께 활동했던 일곱 명의 영웅들.
전쟁.
용사.
그리고-.
[봉인 해제]
[정보를 다운로드 합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감정 없는 목소리.
대현자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억들은,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물밀 듯 몰려들었다.
“끄으으으으아아아아아-!”
“안 되겠군요. 죽여야겠습니다”
어쨌든, 흑막은 사라지는 것이 좋다.
드레젠이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쳐내려 했다.
떠엉-!
나름대로 힘을 담아 내려쳤지만, 대현자의 목을 베는 것은 실패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그의 검을 한 손으로 막아냈으니까.
“……그래.”
“너-.”
그것은 묘한 감정이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던 숙적이, 다시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정보를 조금 더 캐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안도감.
뒤이어 몰려오는 걱정.
드레젠의 표정이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너였구나. 너였어.”
“…….”
드레젠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이번엔 마나를 잔뜩 실어 검을 내리쳤다.
대현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내가 만든 용사. 구원할 수 있었지만,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던 비겁자. 영웅들을 배신한 배신자!”
지직-.
그가 소리치자, 화면을 송출하고 있던 캠이 버벅댔다.
채팅창의 글씨가 깨져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레젠은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시청자들을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네가 떠나고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느냐! 우리는 모두 검은 쇳덩이에게 영혼을 바쳐야만 했다!”
“개소리하지 마라. 네가 베리드와 짜고 친 거, 아직도 모를 줄 알았나?”
크흐-.
대현자가 불길하게 웃었다.
그는 공중에 떠 있었다.
불길한 촉수가 그의 등을 뚫고 나왔다.
그가 드레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뭐?”
“정말 그렇게 생각하냔 말이다! 내가, 영웅들이, 그리고 수많은 종족들이! 그렇게 사라져 간 이유가 정말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배신자라고 해도 좋고, 비겁한 사람이라도 해도 좋았다.
하지만-.
“어. 그렇게 생각한다. 설사 틀려도 상관없어.”
그가 이를 드러내며 마나를 일으켰다.
쿠구구구구구-.
푸른 빛으로 물든 드레젠의 몸체가, 그의 분노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나는 너희들에게도 원한이 있거든.”
대현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드레젠의 모습은, 인세에 강림한 마왕과도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