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9화
239화 – 파괴의 여신
#1
광기의 화신.
그는 힘으로 누구에게 져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존재였으니까.
압도적인 피지컬로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광기의 화신이었다.
“압도적인 피지컬은, 결국 잡아먹히면 끝이란다.”
톱날 검이 맹렬하게 회전했지만 거대한 날을 썰기엔 출력이 부족했다.
설마 드래곤 중에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쓰는 자가 있었을 줄이야!
생각보다 창조주는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각자 성격을 부여하고, 대응할 수 있게 씨앗을 심어뒀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여기서 맞춰진 것이다.
“이런, 건방진 도마뱀 새끼들이-!”
드래곤에게 있어, 최악의 모욕 중 하나인 도마뱀.
하지만 그것도 격이 맞는 상대가 도발해야 화가 나는 법.
짓밟아 죽일 수 있는 자가 아무리 노발대발한다고 해서 화가 나진 않았다.
니오베는 고룡이었다.
그것도 한 일족의 수장을 맡고 있는 최강자 중 한 명.
“계속해서 받아 보아라. 그 잘난 몸뚱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니.”
“이까짓 거-!”
니오베는 그 거대한 병기를, 마스터급 검사가 휘두르는 속도로 휘둘렀다.
콰앙-!
콰아앙-!
그녀가 무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폭풍이 일었다.
왜 저 여인이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드레젠은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니오베가 본격적으로 싸우기도 전에 배신자로 낙인찍혔었지.’
드래곤끼리의 분열.
그리고 내전.
그녀는 거대한 사건의 희생자였다.
미쳐 날뛰는 레드릭의 아들, 에리아나가 그녀를 희생자로 내세웠었다.
드레젠은 거기까지 기억하고,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
에리아나.
현 드래곤 로드, 훗날 자신의 손에 죽게 되는 브락시아의 수호자.
‘그자가 니오베를 죽이게 둘 수는 없다.’
이미 맹약까지 마친 상대였다.
좋으나 싫으나, 이번 게임에서는 영원한 동반자가 된 샘.
드레젠은 이 인연을 결코 그냥 버릴 수 없었다.
세이브 로드 신공을 발휘해서라도 그녀를 지키고자 했다.
“그허억-!”
결국, 꼴사납게 날아간 광기의 정신.
쿠웅-.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니오베가 안월도를 내려놓으며, 개운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여태까지 지은 표정 중에 가장 상쾌해 보였다.
“으아아아아아-!”
콰앙-!
잔해에 파묻혀있던 광기의 정신이 괴성을 질렀다.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그의 진정한 광기가 던전 전체에 몰아쳤다.
드레젠이 입을 열었다.
“저렇게 멍청해 보여도, 비장의 수가 있는 놈입니다. 주변에 있는 마나들을 모두 흡수할 겁니다.”
“그건 좀 성가시겠는데.”
“하지만, 그건 제가 막을 수 있습니다.”
드레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엔 모든 것이 보였다.
떠다니는 입자.
원한이 서린 마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
“이 마나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이 마나는 이제 제겁니다.
-고유 기술인가베
-나중에 비법 좀 알려 줘유
-ㅋㅋㅋㅋ 개웃기네
드레젠이 손을 뻗었다.
그가 여태까지 마나 흡수를 보여주지 않았던 건, 인식 때문이었다.
이 방법은, 그에게 무한한 마나를 제공해 주었지만 반대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으니까.
마나는 브락시아 전역에 깔려 있었고, 마나가 없으면 물질들이 기괴하게 변했다.
‘나중엔 제발 마나를 가져가서 싸워달라고 했었지.’
이런 인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게 되지만, 지금은 그랬다.
위기가 오지 않았으니까.
인위적으로 상대방의 마나를 흡수한다는 건, 비인도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재미있는 수를 쓰는구나.”
“이 정도는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파지직-!
광기의 화신이 흡수하려는 마나를 빼앗아왔다.
충만한 느낌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이 균열 안에 있는 마나는 정말 많았다.
대충 정화해서 쓴다고 해도 10만은 거뜬히 넘길 것 같았다.
‘드디어, 저 기술을 보는구나.’
하이디엔은 내심 감탄하는 중이었다.
과거, 그를 무패의 용사로 만들어 준 기술이었으니까.
상대방이 강한 마나를 내뿜으면 내뿜을수록, 드레젠도 강해졌다.
그래서 에리아나를 상대할 수 있었고, 엘프들을 구할 수 있었다.
‘부디, 이번에는 그 재능을 마음껏 뽐내시길.’
그래서, 이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어 주길 바랐다.
드레젠의 저 기술은, 끝없는 전쟁에서 희망을 주는 힘이었다.
니오베와 샤크스 역시 주변에 있는 마나가 흡수되는 것을 보고 이채를 띄었다.
“인간이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인정한 자 아니더냐. 저 정도는 해야겠지.”
두 드래곤은 오히려 드레젠을 칭찬했다.
자연 상태의 마나도 아니고, 본래 주인이 있던 마나를 흡수하는 건, 드래곤도 쉽게 하지 못 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뺏어 쓸 만큼 마나가 적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드래곤도 쉽게 쓰지 못하는 기예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우리는 익힐 필요도, 익혀서도 안 되는 기예다. 우린 한계를 부술 수 없으니까.”
니오베가 말했다.
샤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드레젠을 보며, 두 드래곤은 부러운 듯 바라봤다.
그들은 하나의 세계였지만,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기대가 됩니다.”
“진짜 그가 말한 대로라면, 구원해 줄 열쇠가 될 것이다.”
쿠르르르-.
주변이 떨렸다.
균열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마나.
마나가 빨려 들어가면 그 구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위험해.’
드레젠은 타깃을 바꿨다.
공간에 있는 마나를 흡수했다간, 다 같이 매몰될 가능성이 있었다.
흡수할 마나는 아직 많았다.
바로, 광기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톱날 검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이이이이-!”
톱날 검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마나.
저건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켜주지만, 양날의 검이었다.
톱날 검의 연료가 없었으니까.
회광반조라고 하듯, 자신의 남은 마나를 모조리 태워 가공할 힘을 얻는 방식이었다.
“모조리 죽여주마!”
“이건 우리도 제대로 싸워야겠군요.”
“좋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오히려 좋네요.”
간부급 화신이 나왔기 때문에, 더는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공략이고 뭐고, 쭉쭉 달려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 싸움을 위해서.
“가능하겠는가? 상대는…… 웜급 드래곤 정도는 된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던, 마나를 이용하는 상대라면 상관없습니다. 근력만 받쳐준다면.”
혼자라면 근력 차 때문에 압살당했겠지.
드레젠이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건, 엄청난 차이의 근력을 대등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드래곤들이 있는데 뭐가 무서우랴.
그가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네놈 상대는 나다. 다시 지옥으로 보내주마.”
“하! 이번엔 인간 나부랭이가-.”
콰아아아아-!
광기의 화신은 드레젠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빛 섬광에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샤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이상향.
모든 것들의 어머니인 스텔라의 힘이었으니까.
[성좌의 축복]
새하얀 빛이 드레젠을 향해 쏟아졌다.
파지직-.
새하얀 전격이 그의 근육을 자극했다.
숨겨져 있던 힘이 그대로 드러났다.
버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히트라이저]
[스트랭스]
[헤이스트]
[마나 증폭]
[소울 스텝]
…….
십 수 개가 넘는 버프가 드레젠에게 모두 걸렸다.
꾸욱-.
드레젠이 주먹을 쥐어 보았다.
이건, 전성기의 힘과 비슷한 경지까지 다다랐다.
그만큼 드래곤의 버프는 어마어마했다.
마나는 터무니없이 부족했지만, 근력만큼은 예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후우- 날뛸 수 있겠군요.”
-가즈아!
-참교육 가자!
-아 나도 저런 버프 받고싶엌ㅋㅋㅋ
-가즈아아아아!
-형아 나 죽어어어ㅓㅓ!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 정도 버프가 겹치자, 광기의 화신이 맛있는 식사로 보였다.
그가 전신에 마나를 둘렀다.
“간다.”
투콰아아앙-!
가볍게 발을 박찬 것 같았는데 섬광이 되었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잔해가 그 파괴력을 증명했다.
광기의 화신은 톱날 검을 휘둘렀다.
드래곤에겐 졌지만, 인간에게까지 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위대한 베리드를 이끄는 자들 중 하나가 아닌가!
“죽어어어어어어어-!”
“하압-!”
콰드드드드드-!
마나와 마나가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광기의 화신은 자신 있었다.
인간의 마나는 보잘것없었으니까.
“어?”
“그 기술, 너만 쓸 줄 아는 건 아니야.”
톱날 검에서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마나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다름 아닌, 자신과 부딪히고 있는 인간이었다.
경악할 틈도 없었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기술을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으니까.
“뭐, 뭐야! 뭐냐 넌!”
“집중해. 떠들 시간이 어딨어.”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튀었다.
뜨끈한 느낌도 그대로였다.
후욱 피어오르는 비릿한 혈향에, 드레젠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그래, 이 냄새였다.
이 느낌이었고.
“이런 건방진 새끼가으가!”
“닥치고 집중하라고!”
드레젠의 무릎이 안면에 박혔다.
흑뢰가 피어났고, 천마검법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나를 흡수한 만큼, 드레젠은 실시간으로 강해졌다.
가장 강인한 생명체인 드래곤들이 긴장할 정도로.
‘무서운 성장력이다.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이로구나.’
니오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별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처음 에리아나가 분노했을 때, 그리고 성좌를 실제로 봤을 때.
수천 년을 살면서 이 감정을 느껴본 적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게 바로 두려움이로구나.’
이제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반려 드레젠은, 이 세상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세상을 부술 수 있다.
“대모시여. 그대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여기,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을 부수려는 자가 나타났다.
드레젠은 끊임없이 강해졌다.
거대한 마나를 다루는 법에 누구보다 익숙한 드레젠이었다.
그 마나를 손실 없이, 그리고 정교하게 다뤘다.
“왜, 왜 마나가 이쪽으로 안 오는 것이냐아아-!”
“네 컨트롤이, 나보다 딸리니까.”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퍼석-!
그의 기계로 된 육체가 박살 나기 시작했다.
베드모아젤이 전수해 준 흑뢰가 광기의 화신을 난자했다.
니오베는 그 광경을 뿌듯한 미소와 함께 구경했다.
“저런 자가 내 반려라, 정말 자랑스럽구나.”
“부럽군요. 저도 좋은 짝이나 찾아야겠습니다.”
“네 활약을 뺏어가서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나중에 니오베 님의 반려와 붙으면 될 테니까.”
드레젠이 모르는 곳에서 그를 두고 밀약이 이뤄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