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7화
237화 – 고통의 정신(2)
#1
하이브, 중간 보고책인 그들은 적절한 전략을 상부에 보고하는 시스템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의 보고는 뚜렷한 한계를 지녔다.
바로 ‘적절한’ 수준의 대응밖에 제안하지 못한다는 점.
이 맹점은, 베리드에게 커다란 약점이 되곤 했다.
“이제 길이 열렸을 겁니다.”
“이제 괴물의 본거지로 들어갈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고통의 정신은 꽤 강력합니다. 헤츨링보다는 강력하겠군요.”
“호오-.”
니오베의 눈이 빛났다.
헤츨링이라니.
감히 드래곤과 비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니, 꽤 흥미로웠다.
두 사람이 하이브 열다섯 기를 격추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8분.
어지간한 마스터도 하지 못할 업적이었다.
“적당히 상대했는데도 8분 정도라…….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드래곤에게 못할 것은 없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니오베도 그건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백색의 방을 나섰다.
어둠과 빛이 합쳐지는 공간, 그곳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안쪽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드레젠도 알지 못했다.
그는 저번에도 하이브를 때려잡는 역할을 수행했으니까.
“이제 드워프의 구원까지 한 관문만 남았군요.”
“이 주변에는 잠들어있는 드래곤이 있습니까?”
“흠…… 이 주변이라면 골드 드래곤의 영역이로군.”
골드 드래곤.
땅과 번영, 재물과 탐욕을 상징하는 종족.
전투력은 중상위권이지만, 지략이 뛰어나고 교활한 성격이 대부분인 일족이었다.
그들은 영역 의식이 엄청나서, 다른 일족이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았다.
드레젠은 니오베에게 물었다.
“이 부근의 골드 드래곤들을 자극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방법이구나. 더미는 뭘로 던질 거지?”
“고통의 정신을 잡고, 그걸 미끼로 협상하죠.”
니오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하이디엔이 손을 흔들었다.
니오베가 드레젠의 등을 살포시 밀었다.
드레젠의 걸음이 빨라지며, 하이디엔에게 다가갔다.
“어서 가자. 고생했어.”
“생각보다 빨리 해결하셔서, 그다지 힘들진 않았습니다.”
“예상보다 조금 시시했다.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샤크스가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하이디엔이 어색하게 웃으며, 진실을 말해 주었다.
“방어 마법을 칠 새도 없었어요. 혼자 전부 상대하셨거든요.”
“아직 진부한 녀석들뿐이로군. 고통의 정신이라는 녀석에게 기대하는 중이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군요. 홀로 싸워도 되겠는데요.”
그것도 나쁘지 않다며, 샤크스가 웃음을 지었다.
스펙만 된다면, 다른 공략도 필요 없이 찍어 누르는 것이 가능했다.
이것 역시 세이브 더 브락시아만의 매력이랄까.
샤크스는 그런 존재였다.
홀로 모든 것을 씹어먹을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
“이젠 질렸다. 애들 장난에 어울리는 것도 여기까지 해 두지. 나머지는 전부 힘으로 해결하겠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럼, 마지막 전투는 두 분께 맡겨도 될까요?”
“좋아. 우리의 힘을 보여줄, 아주 좋은 무대지.”
드래곤은 과시하는 것 역시 좋아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은근히 과시하고,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인간이 가진 감정보다 훨씬 정도가 심했다.
나이가 어린 드래곤일수록 욕구는 강했고, 샤크스는 이제 허례허식을 벗어 던지기로 했다.
“이 전투는 니오베 님과 내가 집도한다.”
“그러도록 하시죠.”
“우리 일족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기꺼이 협조하도록 하지.”
니오베가 푸근하게 웃었다.
그렇게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버스를 탈 준비가 되었다.
-고급 우등 특등석 버스넼ㅋㅋㅋㅋ
-아, 이건 못참짘ㅋㅋㅋ
-가끔은 버스 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오랜만에 구경하겠네!
누군가의 등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드레젠은 언제나 제일 앞에서 적과 마주한 채 전장을 누볐었으니.
자신을 위하든, 그렇지 않든 등을 내보이며 앞으로 나서 주는 동료가 생겼다.
제법 기분이 좋았다.
“간단하게 설명만 드리겠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드레젠은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려 했다.
샤크스와 니오베가 빙긋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나의 반려, 드레젠이여. 가끔은 전능한 드래곤을 믿어 보거라. 그대는 마음 놓고 우리의 활약을 기대하면 된단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뒤에서 하이디엔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드레젠은 그녀의 옆으로 가, 하이디엔의 얼굴을 바라봤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
“왜요?”
“아니야. 들어가자. 드래곤들의 활약을 지켜보자고.”
끝도 없이 펼쳐진 흑백의 길이 하나로 합쳐졌다.
고통의 정신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 길의 끝에는 어지럽게 널려있는 실험실이 있었다.
온갖 크기의 수조와 이리저리 움직이는 실험체들.
드래곤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곳이었군. 이건 미치광이 드래곤도 하지 않는 짓이거늘.”
“이곳을 부숴야 하는 이유가 늘었군요. 니오베 님.”
“동감이야. 마음 같아서는 통째로 날리고 싶지만-.”
그러면 골드 드래곤이 깨어날지도 모른다.
그들을 깨우는 건, 이 일을 처리한 후였다.
팔자 좋게 늘어져 있던 드래곤을 깨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으니, 신중히 움직이기로 했다.
“아이코라가 좋아하겠군. 화풀이 대상이 잔뜩 있으니.”
“그렇겠군요.”
샤크스와 니오베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시 접어 두고, 지금은 해야 할 일을 우선 하기로 했다.
분노를 쏟아낼 대상은 바로 앞에 있었으니.
[그대들은 영원히 잠들리라.]
길의 끝에서, 니오베가 실험실을 보고 선언했다.
그녀의 언령이 새로운 법칙이 되어, 고통받고 있는 실험체들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던 나날들이었겠지.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이곳에선 통하지 않았다.
여긴 개똥밭이 아니라, 지옥 밑바닥이었으니까.
“가지.”
그녀의 눈동자가 일순간 번들거렸다.
드래곤이 감정에 움직이는 생명체는 아니었지만, 이번엔 진정 선을 넘었다.
‘피어’라고 불리는 무형의 기운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 주었다.
하이디엔이, 그리고 드레젠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기운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마스터도 힘들었을걸?
“문을 열겠-”
“비키거라.”
콰아아아아아아-!
니오베는 샤크스의 앞으로 나서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마나가 그대로 문을 쓸어가 버렸다.
마법도, 검법도 아니었다.
그저 마나를 흘려내는 것 만으로 이 정도 결과를 만들었다.
“마나가 1천만은 넘겠네요.”
-;;
-예?
-아닠ㅋㅋㅋ 천도 아니고 천만이요?
-엌ㅋㅋㅋ 진짜 넘사네;;
뒤에서 나직하게 말한 드레젠의 단어들이,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점점 등장인물들의 파워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걸 파워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생명체들이었으니까.
[너희들이 나의 실험을 방해한 존재들이로군.]
고통의 정신은 지네가 몸을 똑바로 세운 것처럼 생겼다.
수많은 촉수들이 꿈틀거렸고, 단단한 외피가 방어력을 증명했다.
본신으로 변신한 드래곤보다도 커다란 몸집.
벽면에는 잠들어있는 하이브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장난은 치지 않겠다.”
니오베가 그러겠노라 선언했다.
샤크스와 니오베에게 있어, 이 전투는 유희가 아니었다.
드래곤의 명예와 이름을 걸고 행하는 신성한 전투였다.
그렇기에, 두 초월자의 기세는 남달랐다.
‘피부가 저릿저릿 한데.’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네요.”
하이디엔 역시 드레젠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드래곤.
그와 그녀가 성장했지만, 아직도 머나먼 존재였다.
드레젠, 최강일이라는 용사가 레드릭의 아들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정말 운이 좋아서였다.
엘프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일곱 영웅이 전부 달려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유인책까지 썼지.’
드래곤이란 존재 하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수천 명이 죽었다.
거기엔 마족도 섞여 있었다.
온갖 더러운 수를 써서 잡았던 존재였다.
드래곤이란 생명체는,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였으니까.
[침입자를 섬멸하라.]
고통의 정신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본인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내려찍는 물리 공격, 그리고 빔.
거기에 공간 전체를 날려버릴 전멸기까지.
레이드에 필요한 요소는 모두 갖춘 몬스터였다.
“같잖은 병정놀이인가.”
“그럼 우리도 같은 것을 해 주죠.”
샤크스가 빙긋 웃었다.
니오베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눈에서 녹빛과 적빛이 흘러나왔다.
캐스팅?
그런 건 드래곤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일어나라. 고통받았던 자들이여.]
으어어어어어-!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미한 진동이, 이 던전 전체를 울렸다.
합창하듯 읊조린 언령에, 지난날 고통받았던 모든 생명들이 호응했다.
드레젠과 하이디엔이 뒤를 돌아보곤 기겁했다.
“이런 방법을 쓸 줄은-.”
“드래곤은 흑마법도 쓰긴 하죠.”
-엌ㅋㅋㅋㅋㅋ
-설마;;
-와 진짴ㅋㅋ 드래곤 클라스 봐
-몇 마리얔ㅋㅋㅋㅋ
고통 속에 숨 쉬며 땅에 몸을 뉘었던 자들이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기나긴 고통을 맛보게 해 준 대가를 치르게 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두두두두두-!
각종 실험체들의 발소리가 동공을 가득 메웠다.
“네놈이 저지른 짓의 대가를 치르거라. 쇳덩이.”
샤크스가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꺼냈다.
그가 유희를 나가기 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애병기였다.
헤츨링 때의 이빨을 가지고 만든 그 검은, 수천 년 동안 샤크스의 마나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 결과, 성좌들이 쓰는 검 못지않은 내구도를 자랑했다.
“이 땅을 얼마나 업신여겼으면 이따위 행태를 했는가. 브락시아의 수호자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음이니라.”
모든 시체들에게 빛이 쏟아졌다.
니오베의 특기 중 하나인 광역 버프가 걸렸다.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에게 전부.
[우어어어어어어-!]
가장 앞에 있던 오거가 소리를 질렀다.
니오베가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고, 샤크스의 검에서 새하얀 백염이 일었다.
기계와 생명체.
곧 있을 전쟁의 축소판처럼, 거대한 두 세력이 격돌했다.
[그대들은, 재생하리라!]
[그대들은-! 강해지리라!]
니오베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다시금 법칙을 만들었다.
고통받았던 실험체들, 몬스터와 이종족들이 전성기때의 모습을 되찾았다.
전장의 여신처럼 소리치는 니오베의 두 손에서, 강렬한 빛의 세례가 쏟아졌다.
[그대들은-!]
그녀의 마지막 외침은, 꺼져가던 영혼들에게 마지막 활력을 불어넣었다.
[죽지 않으리라-!]
복수를 완료할 때까지, 그들은 절대 죽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