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4화
234화 – 복수를 위한 걸음
#1
전투가 모두 끝나고, 드레젠은 한참을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진짜 현실이었던 곳에서의 삶을 복기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경험도 많았지만, 추억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장면도 있었다.
군대처럼 치를 떨어서 그렇지, 완숙해진 경지의 그를 건들 자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자식들은 항상 그래왔지.’
현재 남아있는 아크 메이지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적이었던 셈.
그리고, 이곳에 없는 자들은 드레젠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실력은 전성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화했겠지.
-전회차의 비밀이 풀렸다;;
-와 흥미진진하네
-ㄹㅇ ㅋㅋ
-ㄹㅇ ㅋㅋ
시청자들 입장에선, 완벽한 스토리였다.
1회차에서 알지 못했던 스토리를 2회차에서 알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드레젠은 한숨을 쉬며 마음을 정리했다.
이제야 명확히 보였다.
“지금까지 잘 왔군요.”
그가 걸어온 길은 틀리지 않았다.
결국,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일곱 영웅을 쓰러뜨려야 했다.
최강일이라는 자가 그토록 원했던 과정이긴 했다.
얼마나 원했던가.
그 재수 없는 면상에 칼자국 한 번 내는 것이 소원일 때도 있었는데.
“전회차에서, 일곱 영웅은 저랑 악연이었죠. 이번에 합법적으로 다들 죽여버릴 수 있겠네요.”
-ㅋㅋㅋ 이거지!
-그런데 엄청 강하겠지?
-그럴 듯
-기대된닼ㅋㅋㅋ
최대 마나가 적어도 하이디엔 정도가 되지 않으면 곤란했다.
틈틈이 움직이면서 마나를 늘려주는 영약을 챙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성장도 기대해야겠지.
‘솔직히 크리스를 키우는 것 보다, 이미 완성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훨씬 나아.’
크리스를 키우는 이유는 그가 없을 때, 인류의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라서였다.
이 세계는 곧 성좌들이 접수하겠지.
자신이 없는 그 세계에서, 크리스의 역할은 정말 중요했다.
“전력을 더욱 보강해야겠군요.”
이제 수인족만 규합하면, 전쟁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니오베가 있으니 드래곤들의 협조도 기대할 수 있었다.
드워프의 일을 정리하고 나면, 이제 드레젠 본인이 준비할 일만 남았다.
‘성좌들에게 때를 알려야 할 때도 되었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울드랜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참상을 모두 보았지만, 그는 얌전히 드레젠의 말을 들어 잠자코 있었다.
진정이 된 듯, 꽤나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드레젠을 보고 한마디를 던졌다.
“꼭 외부조를 다 죽일 필요는 없었을 게요.”
“가슴 아픈 일이겠지. 하지만 싹은 잘라버리는 것이 좋아.”
“후우……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짜증 나는군.”
“이제 도시로 돌아갈 거다. 할 일이 더 있나?”
울드랜은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그의 형님이자 드워프의 리더에게 보고하러 갈 차례였다.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암 덩어리를 솎아낸 격이지만, 어쩐지 기분은 좋지 못했다.
“열등감 가질 필요는 없어. 엘프도, 인간도 다 똑같았으니까.”
“그, 그게 정말이오?”
“그래. 개인적으로 드워프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이라고 생각하거든.”
-드워프의 기술력은 세계 제이이이이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거 킹정한다
-골렘만 양산해도 도움 많이 될 듯
“그렇게 띄워줄 필요는 없소. 어차피 드워프는-.”
“띄워주는 것이 아니야. 진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다. 성좌가 만든 종족 중에, 쓸모없는 종족은 없으니까.”
“…….”
울드랜은 물끄러미 드레젠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드워프끼리는 자존감을 높일 수가 없었을뿐더러, 외부와의 교류도 없었으니까.
울드랜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이 자는 우리를 버리진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협력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만 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염원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한, 더 이상 칙칙한 지하에만 갇혀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이건 드레젠이 노린 변화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혁명 의지가, 곧 문화를 바꾸게 될 계기가 될 테니까.
‘드워프는 변화가 필요해. 이제 껍데기를 깨고 나올 거다.’
변화는 아주 작은 곳부터 시작된다.
드레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이후, 한참을 말없이 걸어 드워프들의 도시에 도착했다.
#2
드워프들이 사는 도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하이디엔이 도와주었다지만, 마법의 효과는 일시적이었으니까.
살아남은 이들은 아직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 동생아! 왔느냐.”
“예. 형님. 일단 일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당연했다.
동족들이 무자비하게 죽어 나갔으니, 기분이 좋다면 이상한 일이겠지.
울드랜이 말하길 주저하자, 드레젠이 앞으로 나섰다.
“외부 수색조는 모두 죽었다. 내가 그랬는데.”
“……왜지?”
자발라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제아무리 잘못이 있다 한들, 결정권자는 자신이었다.
그 많은 동포들을 죽인 것은, 분명한 월권이었다.
“그들은 선을 넘었으니까. 나에게 공격을 한 자에게 자비를 배풀어야 하나?”
“그건…… 그건 아니지만-.”
“아쉽고 안타까운 건 알겠지만, 그들은 죄인이야. 그것도 동족을 팔아먹으려 한 자들.”
“맞소. 형님. 그들은 이미 동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소.”
자발라는 더 이상 드레젠을 나무랄 수 없었다.
가장 믿고 있는 동생이 그렇게 말하는데, 나서기도 뭐했기 때문.
결국, 그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뼈아픈 일이었지만, 썩은 부분은 과감하게 도려낼 줄도 알아야 함을 인지했다.
“당신에게 진 빚은 없던 거로 하겠소.”
“마음대로 해. 하지만 또 지게 될 텐데.”
드레젠은 선선히 웃었다.
자발라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저 균열, 없애고 싶지 않나?”
“-혹시 당신이 없앨 수 있다는 거요?”
“당연하지. 그러려고 여기 왔으니까.”
저 균열 역시 진즉에 없앤 경험이 있었다.
도움을 좀 받아야 하지만, 도와줄 사람이야 차고 넘쳤으니까.
자발라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대단한 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저 균열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자신만만한지 모르겠군. 그건 자살행위요. 지금 동족들의 전력들도 지원해 줄 상황이 아니고.”
“형님. 이 몸을 보내 주쇼.”
“뭐?”
자발라는 순간, 자신의 동생이 드레젠에게 홀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그를 따르는 모양새였기 때문.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는 동생을 불러 조용한 곳에서 얘기해보기로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는 우리를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더군요.”
“으음?”
울드랜은 그와 함께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자신이 느꼈던 심정까지.
“-그렇게 됐수. 인간이지만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수.”
“그래서, 그를 따르자고?”
“그건 형님이 결정한 문제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 이거요.”
자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자, 그렇다면 저 균열은 어떻게 해결할까?
그는 믿을 수 있을까?
“전설에나 나오는 성좌 같았수. 믿어보는 것도 좋을 거요.”
“좋아. 네 말이니 한 번 믿어 보겠다.”
동생은 그를 오랜 시간 도와준 자였다.
자발라는 꽉 막힌 지도자는 아니었다.
독선적인 지도자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는 동생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을 믿어보기로 했소.”
“잘됐네. 그럼 두 발 뻗고 있으라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까.”
드레젠은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드워프들의 식사라도 대접할까 했지만, 그는 이미 몸을 돌려 사라지는 중이었다.
자발라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균열 안은, 도저히 드워프의 힘으로 억누를 수 없는 존재들이 득실거렸다.
‘우리를 수 세기 동안 괴롭히던 녀석들이다. 과연 인간 한 명이…….’
그 저주를 깨부술 수 있을까?
자발라는 그가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토록 자신 있게 나섰으니,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내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자발라는 조용히 드레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3
드레젠은 균열을 바라봤다.
서리족들이 들어갔던 균열과 비슷했다.
자, 이번에도 레이드가 기다리고 있겠지.
아이템을 얻기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슬슬 그 아이템도 완성이 됐겠는데.’
엘프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검.
그걸 팔면 얼마나 남을까?
아니면 자신이 쓸까?
얼마나 좋은 아이템이 나올까?
“이번에도 레이드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최초 클리어된 레이드는 따로 파밍을 할 수 있으니, 잘 보시기 바랍니다.”
-네 선생님!
-제목 바로 바뀌었넼ㅋㅋㅋ
-엌ㅋㅋ 역시 매니저들 일 잘한다
-그는 항상 세계 최초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드레젠이 시청자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이곳은 혼자 깰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지원군을 좀 부르겠습니다.”
“짜잔, 제가 왔습니다.”
공간이 갈라지고,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하이디엔.
전설의 마법사가 등장했다.
지원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니오베 님, 들리십니까?”
[잘 들린단다. 뭐 하고 있느냐?]
“균열을 발견해서, 마족들을 때려잡으러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한 일. 조금만 기다리거라.]
니오베는 좌표를 계산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희소식 한 가지를 더 가져왔다.
드레젠도 기뻐할 정도의 소식이었다.
니오베의 낭랑한 목소리가 반지에서 흘러나왔다.
[내 친우를 데려가겠다. 붉은 비늘의 일족이지.]
“정말입니까?”
[오랜만에 몸을 풀기에 딱 적당한 곳이라고 하더구나.]
“저야 환영이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쯤 되면 레이드다운 난도가 아니었지만, 공략은 쉽게 진행될 터.
큰소리를 뻥뻥 친 보람이 있었다.
적어도 실패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잠시 후, 환한 빛이 일었다.
그리고 나타나는 두 사람.
한 쌍의 남녀가 빛 속을 뚫고 나왔다.
“이자인가.”
“반갑습니다. 위대한 자여.”
“반갑다. 붉은 비늘의 일족인 샤크스라고 한다.”
“드레젠입니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미남자.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나타난 드래곤.
그는 한때, 전쟁 군주라고 불렸던 전적이 있는 자였다.
샤크스.
그 이름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인물을 마주할 줄이야.’
몇 세기 전, 전쟁으로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홀연히 모습을 감춰, 전설로만 남겨진 인물이기도 했다.
드레젠 역시 하도 오래된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던 사실이었는데.
전설을 마주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대가 이 균열을 해결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여흥이로군.”
그가 피식 웃었다.
그 후, 하이디엔과의 인사를 나누고 브리핑을 해 주었다.
네 명이었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조합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