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5화
225화 – 탑
#1
거대한 탑은 주변으로 죽음의 기운을 뿜어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종족들의 사념을 끌어모아 만들어낸 존재들이 있었다.
드레젠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말로 떠드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면서 공략하는 것이 낫겠죠. 탑은 그때그때 다르거든요.”
“저번에도 고생 좀 하셨나요?”
하이디엔이 탑 앞에서 물었다.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가 떨리 정도의 경험을 많이 했었지.
탑 안쪽은 해당 종족의 흑역사, 그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죽어간 사념들이 뭉쳐 만들어진 탑이었으니까.
“가까이서 보니까 엄청 크군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만한 건축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장 높다고 하는 롯데 타워도 조금 못 미칠 정도.
중국 상해에 있는 건물들과 비슷한 크기였다.
드레젠은 기억을 뒤적거렸다.
“드워프 땅에 있는 탑은 ‘광기’의 탑입니다. 종족이 원하는 염원이 이뤄진 탑이죠.”
광기.
다양하게 해석되는 단어였다.
한 사람이 미친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집단의 힘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단어였다.
광기의 탑은 드워프의 집단적인 이상향이 과도하게 나타났다.
각 탑은 이름의 걸맞은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광기의 탑은, 그중에 가장 쉬운 곳이기도 했다.
“광기의 탑은 엄청난 피지컬을 가진 드워프들이 나옵니다. 그의 염원이 그들을 이상하게 바꿔 놓았죠.”
그그그그그-.
거대한 문 앞에 서자, 탑이 진동했다.
탑에 들어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안쪽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끝.
다만, 문을 열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마나를 바쳐야 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은 탑 클리어 할 때까지 쭉 달려 봅시다.”
“시간, 얼마나 남으셨어요?”
드레젠이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현실 시간으로는 약 3시간가량이 남아있는 상황.
다섯 배로 계산하면 약 열다섯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열다섯 시간이라…… 모자라긴 하군요.”
“이만한 탑을 클리어하기엔 모자란 시간이죠.”
“내일까지 쭉 달려야겠네요.”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지킬 건 지켜야 했다.
이미 늦어버린 시각이라, 노방종으로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시청자도 클리어할 때까지 잘 지켜봐야 할 것 아닌가.
“출발합니다.”
문이 열렸다.
마치 지옥문이 열리듯, 요란하고 기괴한 소리였다.
안쪽은 무저갱처럼 칠흑 같은 어둠만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이디엔이 손을 들어, 가볍게 영창했다.
[라이트]
환한 빛이 주변을 비췄다.
그곳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온통 해골로 만들어진 벽.
“이 탑은…….”
“네. 이 탑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죽었던, 드워프들의 시체들도 만들어진 겁니다.”
소름이 돋는 이야기였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드워프의 역사.
무수히 많은 시체가 쌓여, 하나의 염원이 되었다.
드워프가 가장 원하는 것.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
“그 모든 집합체가 여기, 광기의 탑에 있습니다.”
-으;;
-소름 겁나 돋네
-이거 꿈에 나온다ㅜㅜㅜ
-너무한 거 아니냐고!
탑의 정체를 알게 된 시청자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광경이었으니까.
하이디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피는 황금색으로 처리해뒀지만, 이런 곳은 건들지 않았으니까.
‘패치를 해야겠는걸.’
그래도 해골로 만들어졌다는 것만 빼면, 별 것 없었다.
말 그대로 탑일 뿐이었으니까.
외벽은 시작일 뿐, 안에서 전투를 시작하면 해골 벽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네모난 공간이 나왔다.
“전투는 여기서 치러집니다. 1층부터 빡세니, 조심하세요.”
[넌, 인간이로구나.]
[드워프를 비웃으러 왔겠지?]
[엘프! 가증스러운 엘프!]
[점잔 떨지 마라! 허세로운 엘프!]
원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거야말로 광기에 찬 목소리였다.
드워프들은 외모에 심각한 콤플렉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독히 깊은 열등감이 집단적인 광기를 만들어냈다.
[왜! 우리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우리는 완벽하다! 완벽한 종족이 될 것이다!]
[으어어어어어-!]
벽에 붙어있는 해골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서로 엉겨 붙어, 어떤 형상을 만들어냈다.
완벽한 밸런스를 갖추고 있는, 그런 몸의 괴인이었다.
하이디엔과 드레젠이 마나를 피워냈다.
두 사람의 몸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첫 번째 상대로군요.”
“드레젠 님. 이번엔 제가 실력 발휘 좀 해 볼까요?”
“그럴까요?”
드레젠은 앞에 섰다.
탱커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검을 꺼내려 할 때, 하이디엔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뒤에서 보고만 있으세요. 진짜 마법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드릴 테니까.”
-오오!
-누나아아아아아!
-걸크러슄ㅋㅋㅋㅋ
-핵멋있넼ㅋㅋㅋ
-대표님 사랑해요!
마나를 피워내는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스텔라를 닮아 있었다.
스텔라가 양손에 하얀 구체를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드워프가 가지고 싶어 하는 완벽한 육체.
그것이 하이디엔을 덮쳤다.
“꽤 빠르네요.”
마법사는 근접전에 취약하다!
그것은 정론이었다.
왜?
마법에는 준비하는 시간, 캐스팅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은 어디까지나 ‘초급’ 마법사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죽어라-!]
콰앙-!
땅거죽이 뒤집힐 정도의 파괴력이 하이디엔을 덮쳤다.
하지만 이미 하이디엔은 그 자리에 없었다.
[블링크]
“마법사도 눈이 좋고, 캐스팅이 뛰어나면 점멸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고급 기예를 선보인 하이디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구체를 괴인에게 던졌다.
콰드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맞은 부위가 그대로 갈려 나갔다.
단순히 하얀 구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6서클 마법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어아아아-!]
“이 정도로는 안 죽네요.”
하이디엔의 손에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영창도, 캐스팅도 없이 만들어낸 마법.
느껴지는 마나는 적어도 6서클 이상이었다.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드레젠보다 하이디엔이 더 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완벽해야 했다! 너희들과 달리 태어난 아픔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걸 왜 우리에게 탓하는지 모르겠네요.”
-대표님;;
-당신이 대빵이잖아요
-ㅋㅋㅋㅋㅋ 아ㅋㅋㅋㅋ 이건 또 맞짘ㅋㅋㅋ
-상황이 묘하넼ㅋㅋㅋㅋ
드레젠이 채팅창을 보고 웃었다.
하긴, 이 게임을 만든 것은 하이디엔이었으니.
그녀에게 직접 불만을 표출하는 것도 상황이 우스웠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열풍이 몰아쳤다.
[으아아아아아-!]
“할 줄 아는 건 비명밖에 없으면서 말이죠.”
넘쳐나는 하이디엔의 마나.
게임 캐릭터였지만, 실로 사기적인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역시 육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드레젠 못지않게 강한 캐릭터였다.
왜냐고?
그녀야말로, 베타테스터였으니까.
[고작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해골들이 더 떨어졌다.
보아하니, 벽에 붙어있는 해골들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전투를 지속할 모양새였다.
하이디엔은 한숨을 내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깨달았으니, 공략을 진행하겠습니다.”
“이 방에 있는 해골들을 모두 떨어뜨려야 승리하는 기믹입니다. 지구전이죠.”
적은 별로 강하지도 않았고, 한 명이었다.
하지만 슬라임처럼 끊임없이 재생하는 능력을 지녔다.
적은 광기에 찬 외침과 함께, 도전자들에게 계속 달려들었다.
이곳에서 도전자들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를 시험받게 된다.
‘이 탑의 끝엔, 참 더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거든.’
그 경험을 하고, 모든 탑을 때려 부수기로 마음먹었다.
용사들이 계속 반대를 했지만, 전쟁 중에도 기어코 탑을 부숴놨다.
이 탑은, 그야말로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으니.
그 사이, 하이디엔은 준비를 끝냈다.
[헬 플레어- 토네이도]
7서클 마법인 헬 플레어.
거기다 변형을 가해, 토네이도 형태로 만든 마법이 작렬했다.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화염 폭풍.
하이디엔의 마법은, 지금까지 그 어떤 자도 보이지 않았던 퍼포먼스였다.
[그아아아아악-!]
[뜨거워! 뜨거워! 뜨거워어어!]
[왜! 우리는 왜 행복할 수가 없는 거냐!]
드레젠은 마나를 일으켜 화염 폭풍을 방어했다.
후끈후끈한 것이, 거대한 장작에 불을 붙인 후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캠프파이어를 했던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다 태워버리면 그만입니다.”
“벽에 있는 해골들을 다 부수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건…… 너무 극단적이네요.”
[그어어어어-.]
화염 폭풍이 사그라들고, 남아있는 것은 드레젠과 하이디엔뿐이었다.
검게 그을린 공간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흐물흐물하게 녹아 없어진 해골들의 잔해가 끈적하게 질척였다.
사뿐히 내려앉은 하이디엔이 싱긋 웃었다.
“이만하면, 실력 검증은 된 거겠죠?”
“충분하죠.”
드레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해골들은 강철보다 단단한 경도를 자랑했다.
녹는점도 엄청나게 높아, 웬만한 방법으론 잘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런 해골들을 순식간에 녹여버린 하이디엔의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 얼른 올라가 볼까요?”
“그러시죠.”
-뭔가
-뭔가 이상한데?
-이건 뭐얔ㅋㅋㅋ
-공략 맞아요?
-아! 대표님이랑 드레젠 님이랑 한통속이었어!
공략이라면 공략이겠지.
하지만 허들이 너무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반 유저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내놔야 할 것 아닌가!
하이디엔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다음 층부터는 차근차근 공략해볼게요. 하하. 제가 너무 들떴나 보군요.”
“대표님이 좋은 보상 하나 해주시죠.”
“흠…… 뭐가 있을까요?”
하이디엔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보상을 해 줘야 할까?
그녀는 유저들, 플레이어들이 세이브 더 브락시아를 더욱 사랑해줬으면 했다.
자그마한 보상 정도야, 대표 차원에서 해 줄 수 있었다.
-시간!
-시간 늘려주세요!
-오늘은 달리자!
-달리게 해주세요 젭알!
그리고,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달라고 했다.
하이디엔은 잠시 고민했다.
곧이어, 환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유저분들의 부탁이라면, 제가 또 안 들어줄 수가 없군요. 좋습니다. 내일 자정까지 타임 리미트를 풀어놓겠습니다.”
그건 파격적인 행보였다.
채팅창이 터져 나갈 정도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드레젠이 탑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노방종으로 달릴 수 있겠군요.”
“그렇죠. 매니저분들, 들었죠? 지금 바로 패치 진행해 주세요.”
본의 아니게 엘프들은 야근을 하게 되었지만.
아무튼, 축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