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한 절대자의 뉴비생활-223화 (224/279)

제 223화

223화 – 거인과 인간

#1

황자는 병사들을 추스르고 무장을 해제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전투태세를 해제한 것.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아연실색한 병사가 그에게 보고를 올렸다.

“화, 황자 저하! 산에서 거인들이 대규모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 여태까지 본 적 없는 규모입니다!”

“뭐라?”

분명 드레젠과 거인이 함께 올라갔었는데, 무슨 일일까?

황자는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그는 몇몇 기사와 함께 성벽 밖으로 나섰다.

“저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 말거라. 몸 하나는 건재할 수 있으니.”

쿠웅-.

거인들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문제는, 거대한 울타리처럼 빼곡하게 시야를 메우고 있다는 것.

여태까지 거인들의 위협에서 살아와서일까, 황자는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거인들의 앞에 있는 자를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기다리셨습니까. 저하.”

“드레젠 경.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거인들이 인간들에게 그간 폐를 끼쳤다며 사과하러 왔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들 중, 가장 강하다고 하는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황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황자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납득할 수 있었다.

“눈빛이 깊군. 반갑소. 인간 제국의 황자요.”

“반갑소. 그간 고생 많으셨구려. 거인족의 추태를 감당해 주어 감사하오.”

황자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복수한다고 설치는 것도 모양이 이상했다.

수많은 전사자가 진정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닐 테니까.

그들 역시 그러고 싶어 흉포해진 것이 아니었을 터.

사사로운 감정은 넣어두기로 했다.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구려. 그간 고생 많았소.”

“넓은 마음씨로군. 은인께서 정말 좋은 친우를 두셨구려.”

껄껄 웃는 모습이 자신의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황자는 거인들을 바라봤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고, 방향을 정해야겠지.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은 해 보았소?”

“앞으로 우리 거인족은, 당신들에게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제공해 주기로 했소.”

“많은 것?”

“그렇소. 거인들은 몸집이 크지. 힘도 강하고.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오.”

황자는 그가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확실히 거인의 노동력은 인간보다 훨씬 월등했으니.

아직 거인에 대한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는 이들도 있다는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그건 시간이 차차 해결해 주겠지.

“지금은 서로 여유가 없으니 각자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게 좋겠소. 인간들 중에 거인족에게 죽은 이들이 많으니, 그들을 잘 타이르겠소.”

“면목 없구려. 우리 거인들은 저 산에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오시구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회담 아닌 회담이 끝났다.

거인들은 돌아갔고, 드레젠과 황자는 남아서 한숨을 쉬었다.

일이 끝난 것에 대한 표시이기도 했다.

드레젠이 황자를 보며 말했다.

“민심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황자의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지. 걱정하지 마시오.”

황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드레젠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황자는 오랜 세월, 황제가 되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은 권력과 무관한 삶을 사고 싶다고 했는데도, 꾸준히 들어왔다.

‘그만큼 독보적이라는 거겠지.’

드레젠도 인정하는 바였다.

다섯 명의 황자 중에 단연코 3황자가 가장 뛰어났으니까.

전쟁 동안, 다른 네 명의 황자가 삽질을 할 동안, 3황자가 별동대를 이끌고 적잖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겐가.”

“할 일이 많아서요. 지금도 적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황자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찾아온 평화였다.

일시적이라고 하지만, 값진 평화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큰일을 해냈으면 잠시 쉬어갈 법도 하건만, 드레젠은 아직도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가지.”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드레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출발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드워프가 살고 있는 남쪽 땅은 정말 먼 거리였다.

오늘 하루, 든든히 준비해야 하겠지.

“오늘 하루는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하! 신세라니. 그런 섭섭한 말씀 하지 말게나. 오늘 하루는 즐겁게, 편안하게 지내시게.”

“그러도록 하죠.”

사실 파티에 간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반나절 정도야, 충분히 쉴 수 있었다.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쉬어갈 줄 알아야 함을 잘 알았으니까.

전쟁이 벌어진다면 지금처럼 웃고 떠들 시간도 없을 텐데.

“하하! 가지! 오늘은 정말 경사스러운 날이군! 내 폐하께도 잘 일러두겠네.”

황자는 진심으로 웃었다.

그를 수행하는 벤시 역시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드레젠.

대륙의 판도를 뒤집을 신흥 강자이자, 인류의 구원자.

그리고, 그녀가 모시는 자를 황제로 앉혀 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드레젠 경이 밀어준다면, 황자님도 적극적으로 나서실 거야.’

직감이었지만, 그녀는 묘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현 황제는 보기 드문 성군이었고, 그 성품을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것이 바로 3황자였으니까.

드레젠 역시 그걸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그녀는 묘한 눈길로 드레젠과 나란히 걸어가는 황자를 바라봤다.

#2

-진짜 제대로 노네

-ㅋㅋㅋ 부럽다 ㅜㅜ

-저런 회식이면 나도 끼고 싶다고!!

-아 ㅋㅋㅋ 저건 회식이 아니라 파뤼지!

직장인들의 원수인 회식!

상사의 비위를 맞춰주며, 온갖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

나의 쉬는 시간을 고깝게 바쳐가며 음주 가무를 해야 하는 곳!

그런 회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파티가 벌어졌다.

“병사들도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불편한 이들은 불편한 이들끼리 모여 있는 것이 맞겠지.”

“굳이 병사들을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죠.”

드레젠, 벤시, 황자, 쿠우쿠.

각 단체의 수장끼리 모여 조촐한 파티를 벌였다.

오늘만큼은 황자도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쉽게 되겠는가.

“황자님.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벤시가 물었다.

“아직 고민 중이네. 본인의 힘이 필요한 것이 어디인지 고민 중이거든.”

“그렇다면, 황궁은 어떻습니까.”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황자가 내뿜는 살벌한 기운이, 장내를 장악했다.

드레젠이 탁, 하고 잔을 내려놨다.

놀랍게도, 그 한 동작으로 긴장감이 사르르 풀렸다.

황자가 눈썹을 추켜 올렸다.

“저도 벤시 경에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드레젠 경?”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황궁에서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지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주제를 꺼냈다.

드레젠도 오랜 기간 생각해 온 것이었다.

그는 벤시와 뜻이 같았다.

‘좋은 기회다.’

그 역시 3황자가 황제의 자리를 노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전장을 떠돌다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거든.

황궁의 비호를 받는다면, 그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벤시의 낯빛이 환해졌다.

“그대도 내가, 권력에 사로잡히길 바라는가?”

“대현자를 필두로 상당히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바로 용사 프로젝트입니다.”

“용사? 전설에나 나오는, 그런 용사 말인가?”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에 나오는 용사.

그걸 인공적으로 만드는 프로젝트.

비인도적인 실험을 반복하는, 그런 프로젝트였다.

“……정말 그런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그것도 최고의 개체를 만들 때까지 쉬지 않고 반복되는 프로젝트죠.”

“어찌 그런…….”

하늘이 노할 일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누군가를 불러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실험체를 개조하고 실험한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좌가 창조를 금기시하니, 다른 생명체를 끌어 오려는 게로군. 묘한 수야.”

황자는 고심했다.

그의 형제들은 막을 생각도, 아는 것도 없어 보였다.

황궁에서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겠지.

이건 전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업보는 반드시 돌아오고 말 것이다.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황자님. 이건…… 성좌들도 저흴 저버릴 겁니다.”

“폐하께도 말씀드렸나?”

“예. 하지만 아직 고민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홀로 거부하기엔 힘드시겠죠.”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제국이라도, 잃을 것이 많은 나라였다.

모든 것을 걸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주변국의 연합은 큰 타격일 테지.

“신성 왕국은 제가 설득할 수 있습니다. 황자 저하는 황제를, 그리고 주변국을 설득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계승자가 되어야겠군.”

이건 명분이었다.

황자의 신분이 아닌,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황제의 신분으로 움직이는 것.

말장난일지도 모르지만, 둘은 엄청난 차이였다.

차기 황제가 가진 영향력은 황자라는 지위보다 훨씬 강력했으니까.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황자는 고민했다.

섣불리 답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상황을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잠시 황궁에 들러 아바마마와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그리고 결정하겠네.”

“좋은 생각입니다.”

결국, 최종 선택은 황자 본인의 몫이었다.

자신이 내키지 않는다면, 결국 열정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밤이 깊었다.

드레젠은 적당히 술을 마시고 쿠우쿠와 대면했다.

“이제 돌아가도 좋아. 서리족에겐 감사할 따름이야.”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직 저희가 받은 은혜를 다 갚지 못했습니다.”

“고마워. 이제 곧 엄청난 전쟁이 벌어질 거야. 철저하게 대비해.”

쿠우쿠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서리족은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질긴 생명력과 끈질긴 독기.

그것이 서리족의 특징이었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제가 특별히 훈련시키겠습니다.”

“그래. 만드록스라면, 옛날 위인들의 수련 방법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상의해보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쿠우쿠는 고개를 끄덕이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인간 병사들을 바라봤다.

실제로 지내보니, 인간들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함께 전장을 누비고, 생사를 함께 하니, 종족의 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인간이 드레젠이 그들을 구해준 것처럼.

“난 이만 가 볼게. 신성 왕국에 들러야 하니까.”

“다음은, 드워프를 보러 가시는 겁니까?”

“맞아. 내 대원들하고 같이 가야 해.”

쿠우쿠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드레젠에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드레젠은 그림자 안쪽으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곳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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