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2화
222화 – 거인들의 해방
#1
생물들은 모두 말라 비틀어진 어느 산.
로키는 높게 자란 산을 거닐며,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그가 기억하고 있는 산세는 아니었다.
생명력이 넘치던 곳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세월이 무심하기도 하지.’
성좌는 기본적으로 영겁의 세월을 살아간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들과 달리, 성좌의 하루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모든 성좌들이 게으름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방패 덕후인 ‘스티븐’만 봐도 하루하루 열심히 훈련하며 살아가니까.
[으어어어어-!]
이따금 거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한히 흘러가는 세월 속에, 굶주린 이들.
한때 넘쳐났던 생명력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오히려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
자신의 먼 후손이기도 한 녀석들이었다.
“누님은 이런 녀석들을 안 챙겨주고……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로키는 피식 웃으며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산은 정말 높았다.
하지만 이 정도 높이는 성좌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걸어가며 마스터가 눈여겨보고 있는 아이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확실히 뛰어났지. 생각도 유연한 것 같았고.’
마스터는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로키는 달랐다.
오히려 그가 마스터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성좌 중에 기구한 삶을 살지 않은 자는 없었다.
일반 사람 중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상념을 털어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로군.”
창을 지키고 있는 곳은 강력한 존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그것도 옛말인 모양.
주변은 휑했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가지라기보단, 아무렇게나 꺾어놓은 줄기에 가까웠지만.
로키가 손을 뻗자, 가지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너도 참 고생이다.”
로키는 잠깐 생각했다.
미스틸테인은 저주받은 창이었다.
성좌를 죽일 수 있는 무기이기도 했고.
어지간한 성좌들은 이 창으로 골로 보낼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옛날얘기지.’
성좌 역시 변화한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스틸테인을 맞아 죽을 성좌들은 약한 놈들밖에 없었다.
그는 미스틸테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잠시 고민했다.
로키 역시, 미스틸테인에 힘을 불어넣는 것이 완벽한 해결책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잠깐 데려와야겠는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작은 입자들이 모여, 그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로키가 눈을 뜬 곳은 그의 집, 거대한 공간이었다.
“칼루스는 어디 있지?”
“지금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왜, 잠깐 갔다 오려고?”
“그래야겠어. 브락시아에 줄 것이 있거든.”
로키는 히죽 웃으며 다시 길을 떠났다.
그의 여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나절, 그보다 더 조금 걸려 다시 브락시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스틸테인은 죽음의 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발두르. 그대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하지.’
로키는 칼루스의 힘, 생명력이 듬뿍 담긴 미스틸테인을 바라봤다.
이 창 하나 때문에 라그나로크가 발생했었지.
로키는 잠시 과거를 회상한 후에 미스틸테인을 박아 넣었다.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미스틸테인에 있던 거대한 에너지가, 지맥을 타고 흘렀다.
“이제 이 땅은, 다시 생명으로 가득 차리라.”
환한 빛이 동굴을 비췄다.
미스틸테인은 다시 아무런 힘도 없는 나뭇가지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이제 이 땅은 굶주림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거인족은 물론, 산 전체가 변화하고 있었다.
“약속은 지켰다. 꼬맹아.”
로키는 다시 사라졌다.
이곳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변했다.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산 전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2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여전하네.”
드레젠은 황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쿠우쿠 역시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거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먹이를 구하러 내려왔다.
서리족 전사 둘이 중상을 입었고, 한 명이 죽었다.
“성좌가 미스틸테인을 고치러 갔습니다. 이제 곧 괜찮아 질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황자는 어쩐지,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본래 사람이란, 갑작스러운 변화는 기대하기 힘든 법이었으니까.
드레젠은 성벽 위에서 거인족이 머물고 있는 산을 바라봤다.
‘왔군.’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로키.
그리고 미스틸테인이었다.
한데 느껴지는 기운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콰아아아아-!
황금빛이 산 중턱에서 터져 나왔다.
“저건-!”
“예. 드디어 시작됐군요.”
그간 아르게논 대륙에서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
황금색의 거대한 에너지가 산 전체를 타고 흘렀다.
시간을 몇 배속으로 돌려놓은 듯, 꺼져갔던 생명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황자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허…… 이럴 수가.”
성좌의 힘.
사실 전설로만 내려온 이야기들이었다.
민둥민둥했던 산이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대지에서 따스한 기운이 올라와, 전체적인 기온을 낮췄다.
“이 지역은 이제 따스해질 겁니다. 주변엔 먹을 것과 자원이 넘쳐나겠죠. 거인족도…… 잘 해결됐을 거고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 이건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군.”
황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지난날이 생각났겠지.
드레젠도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싸움이었겠지.
“이제 황자님도 중앙으로 복귀하실 겁니까?”
“아니, 내 힘이 필요한 곳으로 떠날 걸세.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은?”
“이곳은 다른 이들이 책임지겠지. 더 이상 전쟁은 없을 테니.”
다시 자신의 힘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오겠지.
쿠웅-.
저 멀리서 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황자가 흠칫 놀라 전투태세를 갖추려 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드레젠은 그를 말리며 아래로 훌쩍 뛰어갔다.
황자가 말릴 틈도 없었다.
“못 말릴 사람이로군.”
그의 뇌까림이 스쳐 지나갔다.
시청자들 역시, 산이 변화하는 광경을 보고 퍽 놀라워했다.
지금까지 신기한 장면을 많이 봤던 시청자들이었다.
놀라운 정도는 달랐지만, 아름다운 광경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거인족을 만나러 가 봅시다. 얼마나 변했는지.”
-만약 안 변했으면?
-그럼 성좌 때려도 무죄지
-ㅋㅋㅋㅋ
-ㄹㅇ ㅋㅋ
시청자들은 거인족이 원래대로 변했느냐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무려 성좌의 힘이었다.
그들의 힘이 개입해서 안 되는 것이 더 이상했다.
쿠웅-.
땅이 울리고, 거대한 인영이 드레젠에게 다가왔다.
“반갑소. 인간. 그대가…… 우리를 구원해준 자인가?”
왕왕 울리는 목소리였다.
본래 거인어가 따로 있었으나 게임이기 때문일까,
거인의 말은 한국어로 잘 들렸다.
“구해주긴 성좌가 구해줬지. 나는 그에게 부탁만 했고.”
“고맙소. 끊임없는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우릴 구원해 줘서.”
“동족들은 어떻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소. 그들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거인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광포한 상태에서도 기억은 있었다.
마치 제어하지 못하는 캐릭터 안에 갇힌 느낌이겠지.
드레젠은 그에게 물었다.
“장로에게 안내해 줄 수 있나?”
“물론. 아마 그대를 보고 기뻐할 것이오.”
거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라타라는 뜻이었다.
드레젠은 그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를 가볍게 들어, 어깨로 가져간 거인이 움직였다.
그가 황자에게 마나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거인족은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거인족의 수장을 보고 오겠습니다.]
황자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저쪽은 알아서 정리하겠지.
제국을 위협하는 문제 하나가 다시 사라졌다.
‘이제 탑을 정복해야겠군.’
벌써 탑에 도전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공방도 활발하게 돌아갔고, 거기서 파밍한 아이템들을 경매장에 올리기도 했다.
강한 장비가 있을수록, 탑의 공략 확률은 높아졌으니까.
‘일단 급한 곳은 드워프니까.’
드워프 역시 서리족과 비슷한 운명이었다.
게다가 탑까지 출현했으니, 종족의 운명은 더욱 좋지 않아졌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소. 이 앞에 장로님이 기다리고 있소이다.”
“고마워. 다들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맞소. 다들 장로님을 뵈러 오고 있소이다.”
쿠웅-.
거인들이 한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굶주림에 몸부림치지 않았다.
온화하고 깊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는 거인족들이 모였다.
“은인이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만.”
쿠웅-.
여태까지 소리보다 훨씬 거대한 발 울림.
보통 거인보다 두 배 정도 큰 거인이었다.
드레젠은 거인을 올려다봤다.
덥수룩한 수염이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 동족의 저주를 끊어 주어서 감사하오. 은인.”
“인간이 살자고 한 건데. 도와줄 거지?”
“물론. 뭐든 말만 하게. 우리 거인족은, 그대의 영원한 친우가 될 것이네.”
드레젠은 씩 웃었다.
거인족도 구원했다.
이들 역시 귀중한 전력이 될 것이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전투를 예고했다.
“마족이 올 거다. 거인족은 인간들을 도와야 해.”
“마족이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소?”
“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요새를 만들어야지. 거인족의 전투력은 뛰어나지만, 방어력은 부족하니까.”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위협이 다가왔을 때, 거인족은 피신할 만한 곳이 없었다.
절대적인 안전함이 없는 이상, 변화가 필요했다.
장로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는 인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네. 그러니 이제 보답해야겠지.”
“맞습니다.”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거인들은 은원을 잊지 않습니다!”
거인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드레젠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마족에게, 무의 추종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늘었다.
남은 곳은 단 둘.
거인족은 엄청난 노동력과 함께 든든한 탱커가 되어줄 것이다.
“인간들에게 부탁해서 무장을 갖춰. 체계적인 훈련을 하고 전력을 재정비해.”
“그리하도록 하겠소.”
“이제 이 땅에 더 이상 저주는 없을 거야.”
드레젠은 확신했다.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로키는 엄청난 생명 에너지를 가지고 왔다.
아마 만 년 이상 이 땅을 유지하고도 남을 양이겠지.
드레젠은 거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밑으로 내려가서 친구들과 인사 좀 하지?”
드레젠은 거인들을 이끌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