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8화
218화 – 여덟 머리의 괴수
#1
일본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괴수는 참 많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부흥하면서, 그들의 신화는 정말 좋은 소재가 되었다.
전 세계로 수출된 일본 만화는 그들의 문화에 익숙함을 더했다.
누구나 일본 문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것.
“그래서 성좌가 재미 삼아 만들어 본 것 같다는 설정인 모양입니다.”
-재미 삼아 재앙을 뿌리냐;;
-ㄹㅇ 나빴넼ㅋㅋㅋㅋ
-여기 사는 사람들은 무슨 죄여ㅡㅡ
시청자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성좌가 낳은 죄악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멀쩡한 놈들이 없었으니까.
드레젠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성좌들이 그들을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혹여 드래곤이 폭주할 때를 대비한 강력한 억제제 역할이었지.’
드래곤들이 마음먹고 연합하여 브락시아를 지배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한 개체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도 나라 하나쯤은 우습게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 일족들이 힘을 합쳐 폭정을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라.
“드래곤을 억압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죠.”
세상의 필요악으로 뿌려둔 것이 바로 죄악들이었다.
일곱 마리의 죄악 중, 드레젠이 상대해 봤던 건 셋.
넷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시작되자 인간들에게 도움을 줬다.
‘그 넷은 건들지 않아도 되겠지.’
아니, 넷이 아니라 다섯을 살려도 나쁘지 않으리라.
뭣하면 성좌들의 왕에게 부탁해서 더 강력한 놈들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겠지.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대놓고 ‘나 여기 있소’하고 둥지를 꾸렸으니까.
“저 산만 나무가 없죠. 야마타노오로치는 태양에 반하는 생물이죠.”
그렇기에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태양이 필요한 생명체가 살 수 없었다.
태양에 관련된 마나도 쓸 수가 없었다.
자체적인 필드 장악력이랄까.
“아, 저곳에서는 신성력을 쓸 수 없답니다.”
무수히 많은 성기사들이 저곳으로 들어갔다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었다.
야마타노오로치를 토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정보 수집을 마치고서야 일곱 영웅과 자신이 투입되었다.
“전회차에선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번 세계에서는 그런 희생이 나오지 않게, 홀로 없애버리겠습니다.”
그에게는 마력이라는 힘이 있었다.
이거라면 야마타노오로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이질적인 감각이 걸렸다.
아더와 스테판은 아니었다.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벌써 눈치챘나?”
어둠 속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등장했다.
하나같이 강력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게 대놓고 살기를 뿌리고 있는데, 눈치 못 채면 죽어야지. 안 그래?”
불청객.
무의 추종자라고 생각되는 이들이 드레젠을 빙 둘러쌌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인간의 힘으로 자신을 막으려면, 적어도 왕국의 군대 정도는 끌고 와야 했다.
고작 이 정도로 자신을 막겠다니, 얕보였단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만한 인원으로 날 막으려고?”
“너의 강함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도 비장의 수라는 건 있지.”
비장의 수라…….
드레젠이 먼저 움직였다.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저녁이었다.
사방에 그림자가 즐비해 있는, 완벽하게 드레젠에게 맞춰진 전장이었다.
스륵-.
이름 모를 자 뒤에 나타난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나한테 덤비면서, 이런 것도 조사하지 않고 왔다 이거지? 건방지게-.”
서걱-!
사신이 낫을 휘둘렀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일격이 습격자의 목을 날려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을 땐, 이미 드레젠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서걱!
사신은 어리석은 자의 목숨을 계속 거둬갔다.
“드레젠! 그림자 기사단의 안위가 걱정되지도 않느냐!”
“……어.”
“뭐라고!?”
그림자 기사단의 안위라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이보다 더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던 것이 그림자 기사단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전설의 집단이었다.
“협박하려면 조금 더 그럴듯한 주제를 가지고 왔어야 했어.”
“웃기지 마라! 그림자 기사단의 동향은 우리가 모두 파악하고 있다. 그들을 죽여버리는 것은 식은 죽-!”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자의 목울대가 그대로 뚫려버렸다.
그의 헛소리를 끝까지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어디서 한 주먹도 안 되는 자들이 같잖게 협박질인가.
드레젠이 그의 정면에 나타나서 웃음을 흘렸다.
“발견하면 단 줄 아냐? 어지간히 멍청한 놈들이네.”
“크륵…….”
습격자의 눈빛은 ‘그게 무슨 뜻이냐’라는 것을 묻고 있었다.
드레젠은 그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똑똑히 알 수 있게 다시 말했다.
“마스터 두셋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괴물들을 너희가 무슨 수로 이기냐고. 본대도 안 끌고 왔으면서.”
눈을 까뒤집으며 절명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쓰러졌다.
그림자 기사단의 전력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눈티아도 그들을 이용하려 했을 뿐, 전력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들의 목표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행한 것이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전력을 얕보지 말라고.”
드레젠은 나머지 이들도 손쉽게 처리했다.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뉜 시체 더미에서, 반짝 빛나는 것이 있었다.
이게 뭘까? 하고 들어본 그는, 이들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 미쳤군요.”
-??
-무슨 일인데유?
-저게 뭔데?
-ㅁㅇㅁㅇ?
드레젠은 서서히 빛을 더해가는 조각을 바라봤다.
이거?
일종의 폭탄이었다.
보석에 마나를 담아 터뜨리는 기폭장치와도 같았다.
처음부터 이건 함정이었다.
“한 방 먹었네.”
그가 피식 웃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나에서 빛이 환하게 터지고, 산 중턱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
버섯구름이 일대를 메웠다.
‘내 동선을 꿰고 있었다면, 준비할 시간은 많았겠지.’
이곳에 오고 나서 여러 날짜가 지났다.
저만큼의 폭탄을 준비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을 터.
산 중턱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저긴, 야마타노오로치의 둥지였다.
“일 났네.”
선제공격을 취하려던 드레젠의 계획이 깡그리 날아갔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었을까?
신성 왕국에서 신탁을 받은 것은 자신뿐이었을 텐데.
아니, 그냥 가까이 있는 녀석이 저놈이라 깨웠을 수도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공기가 울리다 못해, 거대한 충격파가 휘몰아쳤다.
거대한 태풍이 한바탕 몰아친 것 같았다.
산봉우리가 하나씩 움직였다.
드레젠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게 바로 야마타노오로치의 정체입니다.”
-저걸 어떻게 이기냐
-ㅋㅋㅋㅋ 선 씨게 넘네 진짴ㅋㅋㅋㅋ
-아니 저게 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이야말로 드레젠 죽는닼ㅋㅋㅋ
정말 오늘이야말로 드레젠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제일 많이 나왔다.
그래,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얍삽하게 플레이하기로 했다.
“무의 추종자들도 반칙을 썼으니까, 저도 반칙 좀 쓰겠습니다.”
드레젠은 냅다 세이브 버튼을 눌렀다.
죽으면 다시 하면 되지.
여긴 현실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 있는 가상 세계였다.
-그래, 우린 이런 모습을 원했어!
-ㅋㅋㅋㅋ이제야 인간미가 조금 생기넼ㅋㅋ
-이래놓고 안 죽으면? 안 죽으면!?
-엌ㅋㅋㅋ 그러면 돈쭐을 내줘야지;;
-드래곤이 진 이유가 있었네;;
“야마타노오로치는 절대, 절대 밖에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무조건 내부에서 공략해야 해요.”
드래곤도 때려잡는 신체능력을 지닌 뱀이었다.
드레젠이 아무리 대단해도 정면에서 깨부수는 일은 요원했다.
전성기 때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저를 인지하지 못한 것 같으니, 천천히 가 보겠습니다.”
어떠한 악조건 쏙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경험이 있었다.
후두둑, 돌덩이가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태연하게 움직였다.
밤이라 다행이었다.
야마타노오로치가 거대한 만큼, 그림자 역시 많았으니까.
‘로키도 정말 무식하군.’
다시 생각해 보면,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퀘스트였다.
저런 놈을 혼자서 때려잡으라니.
그래도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나중에 성좌 옆에서 전투하면, 몰래 한 대 때려줄 거다.’
로키에게 작은 복수를 다짐한 드레젠이 점점 거리를 좁혔다.
그 사이, 분노한 야마타노오로치는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럴 때 니오베라도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드레젠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2
알마리스.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용병들 사이로, 힘없이 걸어 들어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스테판과 아더였다.
그들을 발견한 은자디아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왜 이렇게 울상을 짓고 있는가.”
“그게…… 아니에요.”
아더는 우물쭈물하게 반응했고, 스테판은 아예 말이 없었다.
은자디아는 두 사람이 뿜어내고 있는 우울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더 묻진 않았다.
두 사람은 꾸벅 인사를 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무슨 일일까?
‘그러고 보니, 백작님이 보이지 않는군.’
설마 그를 쫓아갔던 걸까?
여태까지 안 돌아온 것을 보아, 필시 혼자 무언가를 해결하려 하겠지.
오래 살다가 보면, 표정이나 행동만 봐도 성향을 알 수 있게 되기 마련이었다.
드레젠은 홀로 짐을 짊어지는 스타일이었다.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게로군. 때로 그럴 때가 있지.’
은자디아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저런 경험도 해야 성장하는 법.
정작 드레젠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
은자디아는 껄껄 웃으며 바닷가로 나갔다.
그때.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방벽이 흔들릴 정도로 세찬 돌풍이 알마리스를 휩쓸었다.
쿠구구구구-!
옛날부터 존재했던 민둥산.
그것이 서서히 준동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저, 저거 봐!”
“사, 산이…….”
인간이 절대 대항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었다.
태풍, 지진, 태풍 등등.
저-기,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자연의 섭리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보통 인간의 범주에서 해결이나 예방이 가능한 일은 많았다.
“저건…….”
하지만 지금 깨어난 여덟 머리의 괴수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덟 머리가 훑는 곳이 바로, 멸망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건,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재앙이었으니까.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성좌시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저 괴물이, 누가 낳은 것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