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6화
216화 – 진짜 드래곤
#1
드레젠은 니오베의 통신을 받아들였다.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텔라가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라면, 니오베는 포근하게 만들어, 절로 따르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아이야, 그곳에서 동족의 향기가 맡아지는구나.]
“네, 블랙 드래곤의 둥지에 와 있거든요.”
[혹시 이름이, 스피라스라고 하더냐?]
“네. 정확히 아셨군요.”
드래곤끼리는 친분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연이 이어질 줄은 몰랐다.
니오베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녀의 감정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계약자끼리는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었으니까.
“이건 성좌가 내려주신 시련인데…….”
[그렇지. 그렇겠지. 어찌 내가 감당하겠느냐.]
가슴이 찡했다.
니오베는 슬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스피라스와 니오베.
어렸을 때부터 교류했던 두 드래곤은 함께 유희를 나갈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흠, 잠깐.’
드레젠은 계약에 관한 내용을 떠올렸다.
계약이 진행된 두 관계는 영혼의 일부를 공유하는 존재였다.
그걸 빌미로 로키에게 항변할 수 있을지도.
게다가-.
“니오베 님. 앞으로 가시지요. 저와 함께.”
[뭐라?]
“드래곤이잖습니까. 저랑 영혼을 공유한 사이이기도 하고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스텔라의 힘도 있고.
적어도 로키가 자신에게 적대적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명분만 있으면 되겠지 뭐.
안되면…… 스텔라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후우, 백 년이 넘도록 연락 한번 없던 친우가, 이렇게 별했을 줄이야.]
환한 빛이 일어났다.
드레젠은 니오베가 준 반지를 이용해, 그녀를 소환했다.
짙은 녹빛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녀는, 슬픈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하……. 결국 이런 일이 되었구나.”
“직접 나서실 겁니까?”
“드래곤끼리의 전투는 금기시되었다지만, 이번엔 예외겠지. 생에 미련을 못 버린 작자니까.”
드래곤은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계율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순리에 맞으면, 인정해야 한다.
가장 강대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계율이 더욱 중요했다.
니오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친우의 목숨은 내가 끊겠네.”
“생명력은 괜찮습니까?”
“드래곤을 뭐로 생각하는가. 계약자여. 1만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고작 이 정도 생명력을 빨린다고 쉽게 죽진 않네.”
-맞네
-ㅋㅋㅋㅋㅋ1만년 어치 생명력ㅋㅋㅋㅋㅋ
-엌ㅋㅋㅋㅋ
-ㄹㅇ 지린닼ㅋㅋ
-드래곤 클라스 보소
드래곤은 인간 따위와 비교될 수도 없는 생명력을 지녔다.
드레젠이 제아무리 초월자라고 해도, 드래곤의 생명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태생부터 다른, 드래곤 수저였으니까.
“가자꾸나. 내 서포트를 든든히 해 주겠다.”
“좋습니다.”
드레젠은 성좌의 힘을 풀지 않고 스피라스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웅크리고 있는 거체가 있었다.
성룡이 된 드래곤은 그 크기만 하더라도 일개 마을을 덮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길이만 50m가 넘는, 초거대 사이즈의 괴물.
사룡 스피라스가 눈을 떴다.
[죽으러…… 왔는가…… 필멸자여…….]
“이지도 날아간 것 같군.”
“그러네요. 하긴,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육체일 테니.”
“후우…….”
드래곤도 감정을 느끼는 생명체였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사고해서 그렇지, 희로애락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니오베 역시 친우의 죽음 앞에, 태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언데드까지 되었으니.
“영원한 안식을 주겠노라. 친우여.”
콰아아아-!
드래곤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압도적인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사기를 밀어냈다.
호문쿨루스가 생명력을 급격히 빨아들였다.
[호문쿨루스가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제한시간이 늘어납니다.]
“시작하자꾸나.”
“네.”
[산자는…… 죽인다…….]
쿠우우우-!
스피라스가 거대한 골격을 이끌고 돌진해왔다.
드레젠은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며, 몸을 움직였다.
니오베가 있으니 손쉽게 끝내겠지.
“친우여, 내 그대에게 안식을 내리겠노라.”
새하얀 신성력이 그녀의 손에 맺혔다.
폴리모프를 풀 가치도 없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콰아앙-!
거대한 폭발이 스피라스의 내부에서 터졌다.
[크으…….]
“흠, 제법 단단하구나.”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니오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손을 휘저었다.
찬란한 오색 빛이 드레젠의 몸을 감쌌다.
엄청난 수준의 버프였다.
순간적으로 드레젠의 신형이 사라질 정도였다.
‘굉장한데, 이 정도면…… 전성기의 아크 메이지 이상이로군.’
지금이라면 단독으로 스피라스를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니오베의 의지를 막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는 거들 뿐, 마무리는 니오베에게 맡기도록 해야지.
스피라스는 무식한 공격을 사용하는 언데드로 전락했다.
[죽인다아아아아-!]
“불쌍한 친우여, 그렇게 해서 얻을 것이 뭐가 있단 말이더냐.”
새하얀 방벽이 니오베의 앞을 든든하게 지켰다.
쿠와아아앙-!
스피라스가 거세게 휘두른 앞발이 니오베를 후려쳤다.
하지만 니오베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많이, 약해졌구나.”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펴, 빛줄기를 쏘아냈다.
7서클 마법, ‘홀리-레이’였다.
콰지지직-!
신성력을 담은 그녀의 마법에, 드래곤의 뼈가 울부짖었다.
[으어어어어-! 죽어어어어-!]
고통은 느끼는 것일까.
니오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위대한 존재로 남아야 할 드래곤이, 이렇게 타락할 줄이야.
드래곤이라고 해도 삶에 대한 미련은 있기 마련일까.
“흐읍-!”
드레젠이 날갯죽지 하나를 가르고 지나갔다.
균형을 무너뜨릴 심산이었지만, 역시 드래곤이라고나 할까.
엄청난 피지컬은, 날개 하나를 잘렸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니오베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는 거동하지 못하리라.]
[그윽!]
움찔, 권능을 담고 있는 언어에, 스피라스는 움직임을 멈췄다.
드래곤의 언어는 곧 법칙을 새로 쓰는 힘.
드래곤의 마나를 거의 잃어버린 스피라스는 절대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대의 죄가 누구인가. 친우여.”
[두 번째 죄…… 그가…….]
“그렇군. 그대의 복수는 내가 해 주겠네. 그러니…….”
리오넬이 손을 올리자, 거대한 광구가 생겨났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마법 중에서도 8서클에 위치한, 궁극의 마법이었다.
캐스팅도 하지 않고 8서클 마법을 시전하는 모습.
마법사의 꿈이나 다름없는 경지.
‘이걸로 널 잠재울 수 있다면.’
새하얀 광구에서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뿜어졌다.
광역으로 부정한 것을 멸하는 ‘홀리 웨이브.’
가장 생명력이 없는 곳에서, 찬란한 생명력 에너지가 요동쳤다.
[으어어어어어-!]
스피라스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토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기운이 신성력에게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피라스의 집념은 강력했다.
집념이 뭉쳐 사념이 되었고, 그 힘은 일시적으로 전성기의 힘을 되찾게 해주었다.
[필멸자는, 모두 죽으리라-!]
“……과연, 이대로 당해 주진 않겠다는 게로군.”
슬픔을 머금었던 니오베의 눈동자가 달라졌다.
이제 애도는 충분히 했다.
슬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대로 두면, 두 번째 죄악이 다시 깨어날지도 몰랐으니까.
“계약자여, 잠시 발을 묶어 주겠나?”
“예. 그 정도야-.”
쿠우우우우-!
스텔라의 힘이 드레젠의 검에 깃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스피라스가 위험을 감지했는지, 드레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드레젠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먹어라-!”
천마검법 · 4장 · 천마귀천
(天魔劍法) · (四章) · (天魔晷遷)
햇빛 가리고, 구름을 옮기는 천마의 네 번째 초식.
구름처럼 몰려간 성좌의 힘이, 스피라스의 발목을 무참히 썰었다.
콰드드득-!
뼈가 갈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스피라스의 균형이 무너졌다.
니오베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는, 무너지리라.]
콰드드득-!
거대한 드래곤의 신형이 무너졌다.
뼈가 조각조각 부러지며, 우뚝 솟아 있었던 몸체가 허물어졌다.
용언. 오직 드래곤만이 쓸 수 있는 절대 마법이 스피라스를 무너뜨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알고 있다. 마지막은…… 내가 하지.”
쿠구구구구-!
녹색 드래곤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스피라스는 자신의 영혼을 단순히 드래곤의 몸체에 넣은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사기가 끝없이 모여 다시 드래곤의 형상을 복구시키고 있었다.
[……이게 누군가. 내 친우여.]
막대한 타격을 입어서일까, 사기가 흩어져서일까.
스피라스는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대체 왜 그랬는가. 스피라스.”
[드래곤도 감정을 가지고 있더군. 억울하게 죽은 것이 이내 못마땅했던 모양일세.]
“그래도 이렇게 추하게 남아있는 건 아니었네. 이렇게…….”
사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
드레젠은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친우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존엄성을 포기하고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
친우의 목숨을 자신이 끊어야 한다는 감정이 뒤엉켜 드레젠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내가 미련했었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나…… 결국 사념을 버리지 못했으니. 이제 되었네. 이제…….]
“스피라스. 당신의 복수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드레젠이 한 발자국 나서며 말했다.
그를 돌아본 스피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성좌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대하겠노라. 성좌의 후계자여.]
“후계자까지야.”
[그럼, 어서 끝내주게.]
니오베는 눈을 감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그녀의 심장부에서 어마어마한 마나가 솟구쳤다.
[그대여, 영원한 안식을 취할지어다.]
[고맙네.]
스피라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레이드가 끝났다는 알림이 들렸다.
[사룡 : 스피라스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레이드 종료]
-어휴
-이제 숨 쉬어도 됩니다 여러분ㅋㅋㅋㅋ
-ㄹㅇ ㅋㅋㅋ
-와 진짜 레이드에 이런 숨겨진 스토리까지 있었다닠ㅋㅋㅋ
-쫌 감동이네 ㅜㅜ
사룡은 재가 되어 사라졌고, 그의 영혼을 담아 두었던 심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니오베는 스피라스의 심장을 들어, 드레젠에게 가져갔다.
“이게 필요한 것이지?”
“네. 그런데…… 괜찮습니까?”
“본래 순리에 어긋나던 자였다. 마땅히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아갔으니, 홀가분하구나.”
니오베가 쓴웃음을 지었다.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다소 싱거웠던 레이드가 끝났다.
동시에, 서버 전체에서 알림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브락시아입니다.]
[금일 오전 2:00부터 오전 10:00까지 대규모 패치가 있을 예정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공지란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이렇게 갑자기 패치를 한다고?
-공지도 없이?
-뭐야 갑자깈ㅋㅋㅋㅋ
시청자는 물론, 드레젠도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