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8화
208화 – 오거 랙스
#1
오우거.
혹은 오거라고 불리는 종족은,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들이었다.
오크처럼 뛰어난 전투본능에, 거인족만큼 강인한 체격.
적당한 항마력과 질긴 피부는 검사, 마법사 할 것 없이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거는 보통 단독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곳, 아르게논에 서식하는 녀석들은 달랐다.
“오거 렉스는 옛날, 거인족이었습니다. 헬라의 저주를 받아 오거로 변한 녀석이죠.”
거인족은 브락시아 대륙에만 서식한 것이 아니었다.
와이번, 오크가 그렇듯, 거인족도 아르게논 대륙에 서식했다.
드래곤으로 인해 멸종한 거인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자 변절자.
그것이 바로 오거 렉스였다.
생전의 본능이 남은 오거 렉스는 주변에 있는 오거들을 규합, 커다란 부족을 만들었다.
“오거 렉스는 5서클 이하의 마법은 다 씹어먹으니, 마법사는 조용히 전사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ㅜㅠㅠ
-이 중에 마법사 있냐?
-ㅋㅋㅋㅋㅋ 마법사 하다가 리겜함
-ㅋㅋㅋㅋ 나돜ㅋㅋㅋ
-333
대한민국에서 수학과 수식으로 먹고사는 이가 얼마나 되겠나.
마법사보단 궁수, 도적, 전사계열 직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저 멀리, 오거 렉스의 신형이 보였다.
사룡을 처치한 후 오거 렉스를 차분히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일이 편하게 되었다.
“문제는 저 녀석을 홀로 잡아야 한다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주변을 싹 정리해야 했다.
다행히 잔뼈가 굵은 자들만 모여 있는지, 용병들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오거에게 달라붙어 동선을 차단하고, 철저한 각개격파로 한 마리씩 사냥 중이었다.
은자디아, 아더, 스테판이 달라붙은 오거 렉스는 팽팽한 접전을 유지했다.
‘빠르게 처리해야겠군.’
투웅-!
그의 신형이 주욱 늘어나며 순식간에 이동했다.
오거 렉스는 마스터 둘 정도가 붙어야 이길 수 있는 전투력을 가졌다.
최대한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 단숨에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한 건가, 성좌들은.’
성좌들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자들이라고 믿었다.
정말 그들의 설계가 있었다면, 지금 자신이 걸어가는 길도 다 예상한 것이겠지.
진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면, 정말 성좌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가 있다면, 이번에는 세상을 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서 이런 검법을 알려준 걸지도 모르고.’
브락시아에서, 천마검법은 빛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검술을 배우고 얼마 있지 않아 탈출에 성공했으니까.
현실에서는 그 검술이 잡아먹는 어마어마한 마나량 때문에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나가 빵빵한 지금, 드디어 천마의 후계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마쳤다.
“이번 토벌은 새로운 검술로 해야겠군요.”
-와!
-ㅋㅋㅋㅋㅋ 이거지
-보여주는 맛
-이제 공략은 없는 거임?
-ㅋㅋㅋㅋ 공략은 2부에서 눈높이로 함ㅋㅋㅋ
-ㅇㅈ 이거 따라 하다가 가랑이 찢어져유
드레젠의 눈높이 교육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요즘은 공략 영상의 평균 조회수가 더 높게 나오기도 했다.
콰아아앙-!
전투는 치열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드레젠의 눈앞에는 커다란 오거의 손바닥이 있었다.
“잠깐 딴생각을 좀 했군요.”
날아오는 손바닥에 발을 대, 오히려 추진력을 얻은 드레젠이 반대 방향으로 쏘아졌다.
파직-!
그의 특기는 서로 다른 성질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것.
추진력을 얻기 위해 하체에는 신성력을 둘렀고, 검에는 파괴력이 강한 마력을 둘렀다.
“오거 같은 큰놈을 잡을 땐 안티 자이언트가 최곱니다.”
콰르르르르-!
마력의 기둥이 뻗어 나갔다.
성좌가 준 검으로부터 뻗어 나온 검붉은 마력검.
오러 블레이드보다 훨씬 더 거칠고, 불길한 기운이었다.
[크어어어어-!]
“야! 고개 숙여!”
“저건 또 뭐야아아-!”
오거를 상대하고 있던 용병들이 화들짝 놀랐다.
가로로 모든 것을 가르고 있는 검붉은 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오거가 그대로 잘려버렸다.
쿠우웅-!
아름드리나무, 그리고 숲에 삐죽 솟아있는 모든 것, 오거까지 반으로 갈라졌다.
레이저 절단기처럼 날아온 드레젠이 한 일이었다.
“반 정도 처리했나?”
“다, 당신!”
“왜.”
“……동료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용병들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피식 웃은 드레젠이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이상한 말을 지껄인 용병의 신체를 가른 오러.
하지만 오러는 용병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무슨?”
“난 이런 것도 가능한 사람이야. 목숨을 구해줬으면 감사 인사부터 해야지.”
“…….”
-ㅋㅋㅋㅋㅋ참교육ㅋㅋㅋ
-와 근데 저런 건 또 어떻게 하는 거얔ㅋㅋㅋ
-진짜 컨트롤 미쳤다;;
-이거 프로들도 할 수 있는 거임?
할 수 있을 리가.
드레젠도 익힌 지 얼마 안 되는 기술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기예’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용병들은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오러를 이 정도로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체 정체가 뭐야?’
쿠웅-!
오거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용병들에게 눈길을 준 드레젠이 다시 발을 굴렀다.
“저거 진짜 뭐야? 어떻게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지?”
“……그러니까 저런 나이에 백작위를 얻을 수 있다는 건가?”
“진짜 혼자 다 해 먹네.”
크어어어어-!
오거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 마리씩 죽어 나갔다.
홀로 종횡무진 날뛰는 모습은, 용병들에게 깊게 각인되었다.
용병들에게 인정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전에서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아직도 저런 체력이 남았다니.”
“대단하군. 대단해.”
[으어어어어어-!]
은자디아는 오거 렉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아더가 나서려 할 때, 드레젠이 도착했다.
“오거 렉스는 제가 맡겠습니다. 나머지를 정리해 주세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상대는 오거 렉스입니다.”
드레젠은 검을 빙글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거 렉스.
분명 버거운 상대였다.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이기도 했다.
지금 그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방해만 없도록 해 주십쇼.”
“……믿겠습니다.”
은자디아가 검의 방향을 돌렸다.
드레젠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싸워댔는데도 아직 힘이 남아 있는 듯, 팔팔하게 움직였다.
솔직히 아더와 자신은 오거 렉스를 정면에서 막아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믿을게요. 스승님!”
“얼른 가.”
아더의 격려를 뒤로하고, 오거 렉스와 마주 섰다.
커다란 건물과 싸우는 기분.
그러나 드레젠은 건물을 가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덤벼라.”
그는 마나를 거두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파직-!
검붉은 뇌전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잠들어있던 마나가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래, 이걸 분명 대주천이라고 했지.
“여러분들도 천마에게 인정받으면 배울 수 있습니다.”
초대 스카이워커 가주의 진정한 이름.
천마의 이름이 세상에 진정으로 공개되었다.
그가 성좌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힘.
그 원천이 지금 이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오거 렉스는 본래 파티용입니다. 성좌들이 좀 이상한 거니까, 시청자분들이 이해 좀 해 주세요.”
-ㅋㅋㅋㅋㅋㅋ
-아니 성좌들 무냐고!
-드레젠 = 4인 파티
-천마검법이라닠ㅋㅋ 안 어울리긴 한닼ㅋㅋ
-왜 옛날 클리셰 그대로 썼구만ㅋㅋㅋㅋ
옛날 판타지 소설에는 필수로 등장한 요소이기도 했다.
무림에 살던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로 가는 것.
무공을 바탕으로 강력해지는 것은 큰 흥행을 끈 요소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국 판타지의 정수.
그 모습이 게임으로 정확하게 구현되었다.
“퓨전 판타지의 정수를 맛보십쇼.”
드레젠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직선적인 움직임이 아닌, 부드러운 움직임.
곡선의 미를 보여주는 천마 검법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오오오오오오-!]
오거 렉스는 엄청난 힘으로 드레젠을 휩쓸었다.
오러 블레이드로도 막기 힘든 공격.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마스터의 몸으로도 버거운 파괴력을 보였다.
하지만 드레젠은 오거 렉스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렸다.
‘무림에서는 이런 거력을 인간들이 쓴다고 했지.’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 무림이었다.
브락시아와 비교하자면, 평균적인 전투력은 무림이 훨씬 높은 편.
그곳은 남녀노소 누구나 무공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기술들도 많았고, 마법과 비교할 수 있는 사술도 있었다.
“흐읍-!”
오거 렉스의 힘을 흘린 드레젠이 그대로 출수했다.
엄청난 힘을 받아, 그대로 찔렀다.
무협에 나오는 기예들은 기술적인 면이 많았다.
단순히 마나를 다루는 브락시아와는 조금 다른 개념.
“무림은 ‘힘’을 다루는 방법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단순 내공이 아닌, 사람이 다루는 힘 그 자체를 다루죠.”
격산타우, 능유제강같은 이름이 나온 이유 역시, ‘힘’이라는 본질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란 우주를 품고 있다는 사상에서 출발한 무공은, 그 한계를 돌파케 했다.
드레젠의 부드러움은 오거 렉스가 뚫을 수 없는 종류의 강함이었다.
[우오오오오-!]
퍼석-!
자신이 발산한 힘을 그대로 돌려받은 오거 렉스가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외피가 짓이겨지며, 핏물이 솟구쳤다.
분노에 찬 오거 렉스가 다시 돌진했다.
“힘만 무식하게 센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좋죠.”
물론 그 이치를 모두 알아야 이용할 수 있는 기예였다.
어쭙잖게 흉내 냈다간 바로 피떡이 되어버리겠지.
드레젠은 검을 들고, 천마검법의 초식을 펼쳐냈다.
천마검법 · 1장 · 천마출해
(天魔劍法) · (一章) · (天魔出海)
콰아아아아-!
검붉은 뇌전이 해일이 되었다.
압도적으로 쏟아지는 뇌전의 파도가 오거 렉스를 덮쳤다.
천마검법의 진정한 힘은, 상대방의 힘이 강할수록 나타났다.
상대방의 힘을 그대로 휩쓸어 되돌려주는 절기.
그 엄청난 기술의 결정체가 생생히 드러났다.
[크오오오오-!]
퍼서석-!
역발산기개세가 오거 렉스의 몸을 갈가리 찢어놨다.
마스터급 실력자들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하는 최고급 기술.
대미지 뿐만 아니라 엄청난 이팩트까지.
그야말로 보는 이들이 즐거워지는 전투였다.
-와! 무공!
-와! 천마!
-ㅋㅋㅋㅋㅋ 이게 진짜다
-성좌판이라 엄청 쎄넼ㅋㅋ
-이게 무슨 검술이야! 그냥 검으로 마법 부리는 거지!
사실 그것도 맞았다.
시청자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게다가 후원 역시 쏟아졌다.
실제 프로리그에서 이 검술을 쓸 수 있다면!
[우오오어어어어-!]
처절한 외침.
살고 싶다는 열망이 느껴졌다.
하지만 드레젠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두 번째 검이 오거 렉스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