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4화
204화 – 개척자
#1
항구라고 하지만, 도시는 아닌 알스미어.
시골 부둣가 정도의 불과한 이곳에도, 꽤 호화로운 곳이 존재했다.
단단한 벽돌로 지어진 저택.
항구에서 좋은 자재를 몽땅 써서 만든 것 같은 저택.
‘예전엔 저걸 무너뜨렸었지.’
애석하게도 자작의 수명은 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걸 무너뜨리고 요새를 보강하는 데 썼었다.
그때는 일곱 영웅 중 두 명이 함께였다.
기본 후작이라는 타이틀을 깔고 갔으니, 이곳에 있던 용병이 명령을 막을 순 없었다.
“이곳입니다.”
“고마워. 그럼, 일 보라고.”
드레젠은 안쪽으로 들어가, 저택의 관리자를 만났다.
개척지인데도 집사와 사용인까지 고용한 자작이었다.
다시 보는 것이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있는지 몰랐다.
꾸벅 인사를 하는 집사가 그를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케이드 백작님.”
“날 알고 있군.”
“자작님은 대륙에서 정보를 받고 있습니다. 근래 위명이 대단한 케이드 백작님의 소식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분위기가 한결 나아지기 마련이었다.
태도는 대화하는데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막아버리면 어김없이 과격해지니까.
“이쪽으로-.”
내부는 그야말로 귀족의 집이었다.
번쩍번쩍한 장식은 없었지만, 고급스러운 장식과 정갈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기억과 똑같은 곳이었다.
-와 여기서도 귀족티 내네
-욜로인가 욜로
-귀족은 어딜 가서도 귀족이네
드레젠이 귀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적어도 때와 장소는 구분해야지.
개척지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 자들에게 부끄러운 짓이었다.
당장 부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응접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네. 베르난디 자작.”
“케이드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데-.”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오기 전에 조사 정도는 했지.”
베르난디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오는 자들은 충분히 조사하고 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적어도 알스미어의 관료가 누군지는 알고 왔다.
“그렇군요. 지휘권을 원하십니까?”
“아니, 별로. 그냥 활동의 자유와 머물 곳을 줬으면 좋겠군.”
“그건 문제 될 것이 없지요, 바로 마련하겠습니다. 마침 별채를 짓고 있었거든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은 드레젠도 귀족이었다.
옛날과 비교하면 정말 나은 환경이 마련되었다.
드레젠은 나가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곧 은색 와이번이 올 거다. 별채는 그 아이를 위해서 써 주도록.”
“예?”
“관리가 제법 힘들 거야. 사냥은, 문제가 없겠지만.”
뜬금없는 말을 들은 베르난디 자작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드레젠이 훌쩍 사라졌다.
베르난디 자작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별채를 와이번이 머물 곳으로 쓰라니, 그러면 그는 어디 용병들과 함께 머물기라도 할 것인가?
그는 의외로 정답에 강한 편이었다.
#2
아더와 스테판은 홀로 여유롭게 걸어 나오는 드레젠을 발견했다.
귀족이라더니, 이 저택을 홀라당 먹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귀족, 그것도 백작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제물을 밝히는 이들이었다.
‘야, 아니잖아. 어떡할 거야?’
‘닥쳐봐 좀!’
커다란 나무에 숨어서 드레젠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남매.
드레젠이 지나가자 얼른 숨어버렸지만, 미련한 짓이었다.
두 사람 정도 되는 실력자들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어디 가서 칼 맞아도 할 말이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드레젠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이 숨은 나무를 빤히 쳐다봤다.
“……뭐하냐.”
“커흠! 그, 그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해라. 저 자작 놈 말은 듣지 않아도 될 것 같거든.”
“아, 알겠습니다.”
스테판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아더가 나섰다.
그녀는 허리에 척, 하고 손을 올리고 말했다.
“정말 백작이 맞다면, 왜 혼자 온 겁니까?”
“나만 이곳에 볼일이 있으니까. 짐이 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
“……그렇다면 한판 붙어 봐도 괜찮습니까?”
“야아!”
스테판이 사색이 되어 아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흘끔, 그를 쳐다보고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려 드레젠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아더.
드레젠은 피식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이랬었지.
용병들의 신고식은 꽤나 거친 편이었다.
“좋아. 대신 두 사람이 말하는 외조부가 오면 하도록 하지. 이곳 용병들의 대장이지?”
“그건 어떻게…….”
“대충 분위기를 본 거지.”
용병들은 그를 외조부 은자디아라고 불렀다.
저 멀리 사라미스 출신의 마스터로써, 상당한 실력자였다.
아더와 스테판은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귀족은 용병들을 저열한 전투 기계라고 여겼다.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귀족들은 용병에게 꺼림칙한 대상이었다.
“어쨌든, 난 별로 신경 쓰지 말고 즐기라고. 볼일이 있어서 온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 그럼 저희가 사는 곳이라도 둘러 보실래요?”
“나쁘지 않지. 개척자들이 사는 곳을 둘러볼까.”
아더는 철통같이 꽁꽁 싸맸던 마음의 문을 조금 열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겪었던 귀족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스테판이 신이 나서 걸음을 빨리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드레젠과 이야기를 하는 스테판을 보며, 아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은 왜 쓸데없이 넉살만 좋아서는.’
그 끔찍한 일을 당했었는데, 천성은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사람을 꺼리는 자신과 달리, 남동생인 스테판은 곧잘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이제 은자디아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
용병들도 드레젠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꽤 오랜만의 신입이었으니까.
“신고식이 기대되는데.”
그녀가 피식 웃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마나를 가지고 있는 그녀.
자신의 마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취할지 궁금했다.
다른 이들처럼 혐오스럽게 볼까?
아니면-.
“다른 건 몰라도, 검술 실력은 기대가 된다.”
아더는 사람들과 대화로 무언가를 풀어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항상 달고 다니는 말이 ‘불만 있으면 덤벼’라던가, ‘오랜만에 한판?’ 같은 소리였으니.
그녀의 대련병은 이미 용병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여자라고 얕보다가 호되게 당한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어이-! 여기 백작님 오셨어! 다들 인사해!”
자작의 저택을 나와, 용병들의 거주지로 향했다.
작은 항구라고 하지만 어지간한 요새보단 큰 규모였다.
커다란 배가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었다.
기본적으로 항구는 넓은 부지를 가져야 유리했다.
내륙에 박혀있는 어지간한 마을보단 훨씬 커다란 규모였다.
“백작님?”
“아, 아까 성벽으로 내려오셨던?”
“……백작님이 왜 이런 곳에?”
용병들은 저마다 호기심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드레젠은 익숙한 얼굴들이 꽤 보여 미소를 지었다.
브락시아 대륙에서 생활할 때, 오직 아르게논 대륙 사람들만이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었다.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억은 딱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들 반갑다. 개척자들을 보니 영광이군. 오늘부터 나도 여기서 지낼 거니까, 적당한 방 하나만 줘라.”
“예에-!?”
옆에서 놀라는 스테판.
다른 용병들 역시 표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귀족이 이런 곳에서 살아간다고?
아니, 그게 심리적으로 가능키나 한 것일까?
-ㅋㅋㅋㅋ편견에 찌든 눈빛이로다
-그간 저 자작 놈이 얼마나 개판을 쳐놨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ㅋㅋㅋㅋㅋㅇㅈ
-ㄹㅇ ㅋㅋ
자신이 겪었던 것들이 뒤집어졌을 때.
예상했던 것이 튀어나오지 않았을 때 사람은 놀라움과 황당함을 느낀다.
드레젠은 딱 그런 존재였다.
그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여기 최고 지도자가 누구지?”
“접니다. 백작.”
사람을 뒤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등장했다.
질질 끌고 오는 것은 거대한 트롤의 사체였다.
일반적인 트롤과 전혀 다른 몸집이었다.
거무튀튀한 모습은, 이질적인 마나에 오염되어 있는 모습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저를 외조부라고 부르더군요. 은자디아라고 합니다.”
“반갑소. 은자디아. 귀인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오. 드레젠 케이드 백작이라고 합니다.”
“허허! 귀인이라니, 과찬입니다.”
드레젠은 활짝 웃었다.
오랜만이었다.
자연스럽게 은자디아의 전신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검으로 눈길이 갔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에게 사라미스 검술을 전수한 스승을 만났다.
#3
용병들이 빙 둘러싼 훈련장.
지금 구경하고 있는 용병들이 대부분 한 번씩 거쳐 갔던 장소였다.
드레젠 역시 마찬가지.
그 역시 과거, 용병들의 뜨거운 신고식을 받았더랬다.
“준비는 됐지?”
“예.”
용병들은 흥미로운 눈동자로 아더와 드레젠을 쳐다봤다.
귀족이 이렇게 용병들과 어울리는 것도 신기한데, 신고식까지 받으려 할 줄이야.
오랜만에, 드레젠은 사라미스식 검술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다른 인격이었지만, 보여 주고 싶었다.
‘이 검술로 무수히 많은 사람을 구했거든요. 한번 평가해 주시죠.’
드레젠은 자신의 검이 아닌, 연습용 장검을 들었다.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고, 일격에 적을 베어 가르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 모습을 본 은자디아가 눈을 부릅떴다.
“저건-!”
“어라? 저거, 외조부와 비슷한데요?”
“비슷해? 너는 눈이 옹이구멍이냐!? 저건, 저건 그냥 나, 은자디아 본인이다!”
버럭 소리치는 은자디아.
그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드레젠에게로 쏠렸다.
검을 단단히 쥐고, 몸을 웅크린 그의 모습은 젊은 날, 은자디아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드레젠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를 읽고 더욱 경악했다.
‘완성되었다. 저건…… 완성된 사라미스야.’
말려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아더 스테판은 분명 용병들 사이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여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저 검에 잠긴 압도적인 파괴력은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까딱 잘못해서 저 귀족이 힘 조절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튀어나갈 준비를 해야겠군.’
은자디아는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 낌새를 눈치챈 드레젠이 뒤를 보며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힘 조절은 할 테니.”
“……아무리 귀족 나리라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간다. 한 수만 버티라고.”
드레젠은 아더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자리를 박찼다.
콰아-!
모레 먼지가 후욱 날리고, 연무장 한쪽 바닥이 완전히 박살 났다.
단 한 번의 발 구름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흐읍-!”
‘빨라!’
아더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참격 중에서 가장 강한, 세로 베기였다.
콰아앙-!
대련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소음과 함께 대지가 들썩였다.
그리고, 충격적인 결과가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