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0화
190화 – 커다란 것을 상대하는 법
#1
거인.
키는 약 5미터 정도.
온몸에서 뿜어내는 거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우거조차 완력으로 이겨낼 힘을 지녔다.
힘이 강하면 속도가 느리다는 건, 이상한 논리였다.
체중이 많이 나가면 속도가 느릴 순 있다.
하지만 거인은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체급이 큰 거였다.
“거인의 속도는 굉장히 빠르네. 오러를 두른 기사 못지않으니, 주의하는 것이 좋을 걸세.”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제자는, 괜찮겠는가?”
드레젠은 크리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크리스는 항상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언제든지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샤페론과 아이젠하트가 교육한 결과였다.
드레젠도 그의 태도는 항상 훌륭하다 말했다.
“이젠 이 녀석도 실전을 치러야겠죠.”
“주, 죽지 않겠습니다.”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내심 크리스도 긴장하고 있는 모양.
당연한 일이었다.
첫 실전이 거인이라니.
오히려 시청자들이 더 난리였다.
-꼭 지켜줘야 합니다!
-크리스 죽으면 리겜ㄱ
-ㅋㅋㅋㅋ 난리네 난리얔ㅋㅋㅋ
-여기 크리스네 방송 아닌데요!
크리스가 죽으면 다시 게임을 하라느니, 안 살리면 방송을 안 보겠다느니 하는 채팅이 쏟아졌다.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죽게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크리스는 그의 목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키워내야 할 대상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누구도 죽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드레젠은 여태까지 모아왔던 포인트를 모두 마나에 투자했다.
쿠우우우-!
다시 한번 급증한 마나.
이제 그의 마나는 3,500을 넘어섰다.
“크리스, 잘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거인을 잡는 방법은 다양했다.
실력이 되는 자들은 홀로 사냥하기도 했지만, 보통 다수의 인원이 둘러싸 공격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오늘 드레젠은 크리스와 합을 맞춰 거인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쿠웅-!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니, 거인 무리가 산을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내가 이래서 여길 못 떠난다니까!”
“죽지나 마라.”
“누가 할 소릴. 네놈이나 뒈지지 말라고.”
기사단원들이 저마다 검을 뽑아 들고 오러를 피워냈다.
개개인의 무력만 놓고 보자면 대륙 최고 수준의 기사단이었다.
거인의 수는 총 열.
드레젠은 크리스를 데리고 제일 약해 보이는 녀석에게 접근했다.
“거인은 빠르지만, 빈틈이 많다. 덩치가 크기 때문에 파고들 구석이 많은 편이야.”
“넵!”
[우어어어어-!]
이미 이지를 상실한 거인.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삐쩍 마른 모습을 보여줬다.
걸레처럼 얽히고설킨 수염엔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자른 몽둥이를 들고 인간을 먹기 위해 달려왔다.
“파고들어라!”
“넵!”
크리스는 드레젠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마치 몸집만 작게 만들어 놓은 드레젠을 보는 것 같았다.
후웅-!
공기를 가르다 못해, 주변의 땅을 드러낼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몽둥이를 피했다.
크리스는 안쪽으로 들어가며 페베스 검술을 펼쳤다.
[쿠어어억-!]
거인은 크다.
급소라고 할 수 있는 상체는 대부분 사정거리 밖에 있었다.
그렇다면 다리를 집중적으로 노려, 기동성을 빼앗는 수밖에.
크리스의 판단은 적절했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거인의 발목에서 피 분수가 쏟아졌다.
황금색 폴리곤 덩어리가 상처의 심각성을 알려 주었다.
“잘했다.”
일격이었지만, 충분했다.
거인은 울부짖으며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크리스는 눈을 들어 경로를 보았다.
어디로 떨어질지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마무리는 내가 하지.”
아직 크리스에겐 그의 마나를 감당할 수 있는 무구가 없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그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아무거나 집어도 평균 이상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지, 그들이 초탈했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장인들이 더 좋은 물건, 더 좋은 도구를 찾기 마련.
아직 크리스를 감당할 도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흡-.”
드레젠이 가볍게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이전, 발바로사가 보여줬던 기교를 그대로 꺼냈다.
채찍처럼 쭉 늘어난 오러가 거인의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푸확!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황금빛 폴리곤이 눈을 어지럽혔다.
[어어-.]
거인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순식간에 쓰러진 거인.
그 모습을 본 다른 거인이 광분하며 달려들었다.
콰아앙-!
찬란한 빛이 솟아오르며,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이 있었다.
“조심하게. 거인족은 동료가 죽으면 죽을수록 강해지니.”
“감사합니다. 저하.”
“못 보던 사이에 더 성장했군.”
황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드레젠이야 그 명성을 대륙 전역에 떨치고 있었다.
고수는 원래 성장이 더딘 법.
하지만 드레젠은 아직도 치고 올라가는 것 같았다.
‘벽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전에 보았을 때보다 월등히 많은 마나를 품은 것이 느껴졌다.
영약이라도 먹은 것일까?
그 비결이 내심 궁금했다.
콰드드득-!
날카로운 오러가 거인을 수직으로 토막 냈다.
황자의 검술, ‘안티 자이언트’의 위력이었다.
“저하! 이곳은 끝났습니다!”
“자리를 지키고 주변을 경계하라!”
“예!”
힘차게 대답하고 멀리서 경계하는 기사단원.
아직 거인 두 마리가 더 남았다.
드레젠은 크리스와 한 마리를 더 사냥했고, 황자는 일격에 거인 하나를 토막 냈다.
“후우……오늘도 끝났군.”
“습격은 이 정도입니까?”
“때에 따라 다르네. 슬슬 겨울이 찾아오고 있으니 더 잦아지고, 많이 내려오겠지.”
황자는 슬슬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걸 보고 걱정했다.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뒤에서 생활하고 있는 병사들.
그리고 자신을 따라 최전방에서 활약하고 있는 기사단에 대한 걱정이었다.
제아무리 기사단이라고 해도 완전무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잠시 어디를 좀 다녀오겠습니다.”
“지원군이라고 끌고 올 생각인가?”
“예. 보시면 꽤 놀랄지도 모릅니다.”
드레젠이 쿡쿡 웃었다.
황자의 얼굴이 어떻게 될지 기대됐다.
거인의 사체는 꽤 좋은 자재였다.
그들의 힘줄은 강인했고, 피부는 질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일세. 혐오스럽나?”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취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저하.”
“하하핫! 그대의 말이 맞네. 백작. 추하더라도, 북방의 경계선은 절대 무너져선 안 되는 자리이지.”
황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마음에 든다.
보면 볼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단순한 신하가 아닌, 친우로서 지내고 싶을 정도였다.
“날이 밝기 전까진 돌아오겠습니다.”
“조심하게. 이 근방엔 서리족도 있으니.”
“서리족이 절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황자에게는 의문투성이인 말들이었다.
드레젠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와이렉스를 호출했다.
와이렉스는 오랜만에 친우를 만난다며 좋아했다.
“가자.”
크리스는 두고 왔다.
당분간 이쪽에서 생활해야 하는 만큼,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돌아와야 하니, 서둘렀다.
와이렉스의 날개가 바람을 갈랐다.
#2
드레젠이 떠나간 후, 크리스는 오늘 있었던 전투를 복기했다.
홀로 검을 들고 훈련장에서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천재는 천재.
스쳐 지나갔던 검들이 그의 손에서 올올이 풀려나왔다.
“역시 천재는 다르군.”
“아, 안녕하십니까.”
“복기인가? 수련을 잘 받았구나.”
다소 굵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직 투구를 벗지 않아, 얼굴은 확인되지 않았다.
크리스는 멋쩍게 웃었다.
“아직 부족하니까,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분의 제자라 그런가. 높은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투구를 벗자, 청발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블루블랙의 머리칼.
그녀가 시원스레 웃으며 소개했다.
“이번에 신임 기사단장을 맡은 벤시라고 한다.”
“크리스 스카이워커입니다.”
“스카이워커라…….”
동경했던 곳이었다.
벤시는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크리스를 쳐다봤다.
문득, 그녀가 제안했다.
“가볍게 대련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스카이워커의 검을 견식 하고 싶군.”
“네. 좋습니다.”
크리스는 강자와의 대결이 주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드레젠뿐만 아니라 대륙에 거주하는 강자는 크리스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겠지.
두 사람은 대련용 검을 들고 마주 섰다.
“어? 단장님?”
“오, 꼬맹이랑 한판 하려는 모양인데?”
“구경해도 됩니까?”
“꼬맹아! 예쁘다고 봐주지 마라!”
거친 곳에서 자란 기사라 그런지, 기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언행들.
그런 언사 자체도 매력으로 다가왔다.
단장, 벤시는 크리스에게 눈짓했다.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었다.
“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크으,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녀석이네.”
“좋아! 이 형님들이 한 수 가르쳐 주마!”
그렇게 시작한 대련.
팽팽한 긴장감이 훈련장을 감쌌다.
벤시가 웃으며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도록 하겠네.”
“그럼 가겠습니다.”
매서운 공격이 들어왔다.
벤시는 눈을 뜨며 공격을 받아냈다.
콰득-!
날이 없는 검이었기에 둔탁한 소리가 났다.
“대단하군.”
솔직히 질투가 날 정도였다.
엄청난 재능이 보였다.
기사단장 정도 되면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기가 아닐까 하는 재능.
“오오, 밀린다!”
“단장! 제대로 해야겠는걸요?”
전성기가 아닌데도 이 정도 힘과 속도라니.
벤시는 적잖이 놀랐다.
노련한 기사, 그 이상의 실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크리스를 상대했다.
“제법이군. 하지만-.”
현란한 기술이 몰아쳤다.
여자의 몸은 선천적으로 근력이 약했다.
하지만 검을 쓸 수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여자의 몸은 근력 대신 유연성이 있었고, 벤시는 특이하게도 마나가 많았다.
마나는 곧 힘.
그녀의 전신에서 거력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과 대련할 땐 여자라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벤시의 움직임은 현란했다.
크리스는 현란한 움직임에 일순간 당황했다.
벤시는 검으로 베려 하는 것뿐만 아니라 검을 빼앗거나 몸을 밀치는 등의 수법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검으로만 상대를 제압하는 하시스 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실전에선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거든. 검으로만 상대를 상대한다는 발상은 버려야 해.”
“크윽-.”
하마터면 검을 빼앗길 뻔한 크리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달려들었다.
벤시는 자신의 주특기인 체술을 다시 한번 선보였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