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3화
183화 – 너 좀 마음에 든다?
#1
거대한 오우거.
불굴의 오러를 두른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온 수문장 같았다.
선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캐릭터와 무기, 스킬뿐.
그 외의 조건들은 모두 같았다.
제한된 조건에서 얼마나 강력한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가.
섬멸전은 그걸 평가하는 무대였다.
“흠-.”
실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일반인들보다야 당연히 나았다.
하지만 실제 브락시아에 상주하고 있는 실력자보다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잠재력이 보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왜요, 별로예요?”
“급하게 만들어져서 그런지, 이쪽엔 인재가 별로 없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하이디엔도 동의하는 바였다.
앞으로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몬스터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런 취지로 넣은 거였는데, 급하게 사람을 뽑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앞으로 더 연구가 이뤄지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나오겠지.
‘그래도 마스터 이상의 그릇은 많이 보인다.’
프로라는 이름은 괜히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용사가 될 정도의 기준이 미달이라는 거지, 정말 뛰어난 실력임에는 틀림없었다.
관객들은 흥미진진한 게임에 연신 환호했다.
갑작스럽게 준비한 모드치고는 완성도가 높았다.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기량이 돋보여야 할 순간이거든요!]
무엇보다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해설과 중계였다.
말로 인해 같은 게임이라도 재미를 더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해설자의 역량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강일은 순수한 마음으로 게임을 즐기기로 했다.
“와, 실제로 저렇게 큰 괴물 앞에 있으면 무서울 거 같은데?”
“그렇죠? 그래도 저 사람들은 항상 저런 훈련을 하고 있답니다. 어머님.”
임수아 여사가 말하자, 하이디엔이 답해 주었다.
여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은 곧 익숙함을 만들어낸다.
처음 교탁 앞에 섰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무척이나 떨렸는데, 익숙해지고 나니 편하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
‘나도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그녀는 20대가 아니었다.
펄펄 날아다니는 몸뚱이는 이제 없었다.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공부하고, 그 상태에서 밤새도록 술 먹고 놀아도 멀쩡하던 때는 지나갔다.
그런데 저 게임이라면 그런 꿈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일아.”
“응?”
“엄마도 게임 해봐야겠다. 꼭.”
“재밌을 거야.”
그녀는 의지를 다잡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있을 모험이 기대되었다.
어른들도 사실 동심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꿈같은 일이기에 더욱 동경하게 된다.
세이브 더 브락시아는 동경하던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아주 재밌을 것 같네.”
그녀가 밝게 웃었다.
#2
개막식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인터넷 방송은 이미 만원이었고, 중계방까지 꽉꽉 들어찼다.
선수들도 선수들이었지만,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드레젠의 얼굴이었다.
-진짜 다 가졌네;;
-하이디엔 대표님이랑 있어도 안 꿀리는 거 무엇;;
-ㅋㅋㅋㅋㅋㅋ하루만 드레젠이 되고싶다ㅜㅜㅜ
-여기도 하루만좌 있냐!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것이 장점인 인터넷 방송.
쉬는 시간 동안 채팅창에는 온통 드레젠의 외모 얘기뿐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연예인보다 유명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벌써 광고, 협찬, 합방 등의 제의가 끊이질 않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사, 사인 좀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리 주세요.”
강일은 드레젠이라는 캐릭터를 충실히 연기하는 중이었다.
요즘은 관심을 받아도 옛날만큼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약간이지만 짐을 덜어낸 느낌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이디엔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옛날보다 훨씬 보기 좋네요.’
이따금, 그녀는 게임 속 하이디엔이 자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드레젠이 이끄는 세계.
멸망으로 치닫는 세계가 아닌, 평화를 향해 가는 세계.
하지만 오늘 강일의 모습을 보니 그런 욕망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싶네요.”
처음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순수한 이끌림을 가지게 된 것이.
그 유명하던 일곱 영웅도, 성좌도 아니었다.
고고하게 빛나는 단 한 사람.
바로 저 사람만 바라보고 싶었다.
“회장님, 눈에서 하트 나옵니다.”
“응? 아, 언제 왔어?”
엘리스가 그녀의 옆에 서며 말했다.
워낙 뛰어난 외모 덕분에 주목을 받았으나, 그들이 누군지 알고는 이내 시선이 떨어졌다.
엘리스가 하이디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러다 누가 확 채가는 거 아닙니까?”
“……설마.”
“저 정도 외모가 흔한 것은 아닙니다. 로드.”
그것도 그랬다.
자세히 보니 묘하게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엔 유명 연예인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창대를 잡고 싶어졌다.
“어서 가서 차지하시죠. 여기서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건 대표님이니까요.”
“……좋아.”
엘리스가 쿡쿡 웃었다.
하이디엔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강일과 관련된 일뿐이었으니까.
게임 내의 모습을 보면, 대표님의 심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강일 님.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아, 벌써? 그래, 가자.”
“제가 안내해 드리죠.”
대한민국에서 미모로는 수위를 다투는 아이돌 그룹도 하이디엔 앞에서는 일반인처럼 보였다.
정신없이 팬 서비스를 하다 보니, 벌써 행사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이제 오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영광의 전당이 시작할 차례였다.
“좋겠네요. 인기 많아서.”
“요즘 질투가 는 것 같다? 이것도 일이라고 일.”
“질투라뇨. 전 감상을 말한 건데.”
“어휴, 그 엘프 로드가 어쩌다 이렇게 됐니.”
강일은 피식 웃으며 하이디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팔짱을 끼는 시늉을 해 주었다.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능숙하게 팔을 둘렀다.
“이야, 이런 에스코트까지 받다니, 점점 이곳이 좋아지고 있어요.”
“우리 집 여사님이 네가 마음에 드나 봐.”
“저 같은 며느릿감도 없죠. 에헴.”
묘한 기류가 흘렀다.
농담처럼 주고받고 있었지만, 실제로 둘의 마음은 간질간질했으니까.
강일은 하이디엔에게 말했다.
“이대로 계속 지구에 있을 거라면, 계속 같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거- 되게 매력 없는 말인 거 알아요?”
“……어째 나보다 더 지구에 많이 산 것 같다 너.”
하이디엔은 지금, 강일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계속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와, 저 두 사람 그림 좀 봐.”
“대박, 우린 진짜 오징어였어.”
“그래도 팬 할 거지롱!”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엘프와 최고의 육신으로 개조 받은 용사의 조합이라니.
만약 판타지 소설 덕후가 있다면 소리를 지를만한 내용이었다.
“역시, 나보단 저 두 분이 어울리네.”
다영은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그림이라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팬이라면 꾸준히 해 줄 생각이었다.
‘내 앞길을 밝혀준 사람이니까.’
누구를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다.
풍족한 삶과 귀여운 외모.
특히 타고난 목소리는 그녀의 인생을 순탄하게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저 두 사람이 정말로 부러웠다.
“열심히 해야지.”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질투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그런 사람들 옆에서 당당히 빛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3
개막전의 하이라이트는 용성과 하이츠 정예 선수들 간의 대결이었다.
그들은 모두 드레젠을 보며 실력을 키웠고, 끊임없이 훈련했다.
현실에서처럼 힘들진 않았겠지만, 그들은 어마어마한 훈련량을 소화했다.
드레젠이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그 사람처럼.’
프로게이머, 아트.
드레젠에게 1대8로 대결해, 처참히 패배하는 수모를 겪은 걸 직접 관람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 후부터 드레젠이라는 자를 동경했다.
드레젠의 영상이란 영상은 모두 찾아서 분석하고, 마나의 움직임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홀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마나 컨트롤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으랏차! 이게 바로 마검사다!”
아트는 전설의 리그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조커’ 선수만큼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보조 마법을 함께 쓰는 마검사.
방어가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연계 플레이가 뛰어나고 마법과 검술의 유연함이 장점이었다.
“저거 막아-!”
“x, 저거 뭐야!?”
상대방에겐 들리지 않는 브리핑이 난무했다.
당연히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들도 욕설이 난무하는 현장은 듣지 못했다.
아트 선수는 그야말로 양 떼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사자와 같았다.
같은 프로선수라고 하기엔 기량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호오, 저 사람은 좀 마음에 드는데?”
“아트 선수로군요. 실력파죠. 강일 님도 한 번 봤을걸요?”
하이디엔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며 말했다.
선수들이 캡슐에 입장할 때,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긴 했었다.
그중 하나가 이렇게 잠재력이 깊었나 싶었다.
‘노력파인가.’
강일이 팔짱을 풀고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의 기준은 딱 하나였다.
크리스와 정면으로 붙어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혹은 뛰어넘을 수 있는가.
“저 정도면……합격인데.”
마나의 컨트롤이 일품이었다.
마검사.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다루는 자들을 뜻했다.
마법에도 시간을 쏟아야 하고, 검술도 소홀히 하면 안 되었기에 드래곤이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접촉해 봐야겠어.’
제대로 키운다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그리고 브락시아 내에서도 먹힐 실력이었다.
가끔 저런 자가 있긴 했다.
뒤늦게 포텐셜이 터지는 사람.
어떠한 계기로 인해 내면 자체가 변화하는 자.
“마음에 드네.”
“제대로 키워볼 생각이 있으신 것 같네요.”
“그래. 보험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결국 ‘3: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하이츠가 승리를 가져갔다.
경기 내용 자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아슬아슬할 때마다 슈퍼 플레이를 한 아트 덕분에, 장내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이야, 아트 선수! 정말 엄청난 기량입니다! 첫 경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다른 팀들도 긴장해야겠는데요?]
해설자의 말처럼, 아트는 MVP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개막전에서의 MVP라 더욱 의미가 컸다.
아트는 작은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강일은 그를 먹잇감처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