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0화
180화 – 내 이름은 니오베
#1
시청자들은 엄청난 압력에 숨을 죽였다.
드래곤.
말로만 들었던 위대한 생명을 직접 눈으로 보니, 할 말을 잊었다.
화면 너머로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당장에라도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위압감.
그건 도리안과 드레젠도 똑같이 겪었다.
[재미있는 인간들이로군.]
드래곤의 말엔 힘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말하는 것을 넘어, 정신적 타격까지 주는 언어의 힘.
드래곤의 단어는 공기에 내뱉는 것만으로 의지와 생명력을 가졌다.
“그대의 협력을 얻으러 왔습니다. 니오베.”
[호, 내 이름을 알고 있나?]
“파베론 산맥의 수호룡은 예부터 전해져 내려왔죠.”
드래곤, 니오베의 눈동자가 드레젠에게 똑바로 향했다.
그는 드레젠의 기운을 음미했다.
강인한 전사의 기운.
그리고 뒤틀린 영혼의 기운.
[불쌍한 영혼이로구나. 아이야.]
“별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서.”
[그래서, 나의 협력을 얻겠다, 이런 건가?]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니오베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깨웠을지.
다른 종족과 이야기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배울 것이 있다고 했으니까.
“현자라고 불렸던 드래곤의 지혜를 들어보고 싶군요.”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었지. 까마득하구나.]
드래곤의 수명은 약 1만 년.
그들은 이따금 다양한 종족의 모습으로 변해, 유희를 즐기곤 했다.
드래곤이 개입한 종족은 대부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드래곤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종족의 발전에 개입했던 드래곤.
그들이 유일하게 개입하지 않았던 곳이 인간 사회였다.
‘인간이라. 그분이 생각나는군.’
인간을 부흥케 했다는 성좌들의 왕.
모든 세계를 관장하는 진정한 신이 자신들을 이 땅에 강림시켰다.
드래곤들의 수장, 레드릭은 절대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지만, 예외를 두었다.
-직접 찾아오는 인간은 두어라.
-인간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면, 그때는 우리가 조력자로 나설 것이다.
니오베는 직감적으로 이 두 상황이 모두 도래했음을 알았다.
드래곤만의 선견지명 같은 건 아니었고, 특유의 직감이었다.
찾아온 시기, 표정, 그들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 등등.
드래곤에겐 모든 것이 정보였다.
[기다리거라.]
환한 빛이 일었다.
어둠을 물리치고 천지가 개벽할 때의 빛이 이러했을까.
드레젠조차도 손을 들어 앞을 가려야 할 정도로 환한 빛이었다.
도리안은 아예 뒤로 돌아서 있었다.
천천히 사그라든 빛 너머로, 얕은 발소리가 들렸다.
돌바닥을 타박타박 밟는 소리.
“인간의 몸은 제법 불편하구나.”
인자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드레젠과 도리안이 다시 앞을 바라봤을 땐, 거대한 드래곤 대신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확실히 달랐다.
동공은 드래곤의 것이었고, 머리엔 두 개의 뿔이 산양의 그것처럼 삐죽 솟아 있었다.
“이 모습이 이야기하기도 편하겠지. 이리 오거라, 아이들아.”
아름다운 암녹색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은 니오베의 캐릭터를 확 살렸다.
시청자의 환호가 이어졌다.
-와 누나!
-누나아아아아아아!
-ㅋㅋㅋㅋㅋ와 ㄹㅇ 엘프보다 이쁘네;;
-드래곤 넘사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보통 여성 캐릭터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니오베는 그 틀을 완전히 부숴 버렸다.
여성들의 이상향이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 여성 유저들의 마음도 단번에 사로잡았다.
-언니ㅜㅜㅜ
-평생 왕언니 해요 ㅜㅜ
-와 진짜 걸크 쩐닼ㅋㅋㅋㅋㅋ
후원들이 빵빵 터졌고, 니오베를 무조건 회유해야 한다는 내용이 줄을 이었다.
니오베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응접실로 안내하지.”
어떠한 영창도, 마나의 움직임도 없었다.
마법의 종주.
초대 마탑주인 아르간달을 제외하면, 가장 마법을 잘 다루는 생명체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자연에 있는 마나가 아닌, 드래곤 본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세 사람을 감쌌다.
그리고 황궁 못지않은 응접실로 이동했다.
“편하게 앉아라. 조금 옛날 방식이지만, 나름대로 에쁘게 꾸몄지.”
“어, 엄청 감각이 좋은 것 같습니다.”
“고맙구나. 인간의 기준은 잘 모르거든. 오라버니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리에 앉자, 다과가 생겨났다.
이번에도 마나의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니오베는 깍지를 끼고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아가야, 어떤 일로 이 늙은 용을 찾아온 거니?”
“외계에서 다른 종족이 브락시아를 노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다양한 종족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외계에서? 그래, 이질적인 기운의 흔적이 여기저기 있구나. 침입자는 안 될 말이지.”
니오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브락시아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취약한 곳이었다.
레드릭이 그러길, 이곳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체가 사는 곳이라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고 했다.
이 세계 곳곳에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좋아. 이 세계를 지키는 일이라면 날 깨우는 것이 맞았어. 용케도 찾아왔구나.”
“전령이 되실 생각입니까?”
“그래. 각지를 떠돌면서 잠들어 있던 동족을 깨워야지. 레드릭은 죽었으니 그의 아들이 레드 드래곤을 이끌겠구나. 일단 그부터 만나 봐야겠지.”
정확히 말하면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곁으로 돌아간 거지만.
드레젠은 작게 웃었다.
드래곤과의 협력이 잘 이뤄지면, 당분간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니오베가 선한 웃음을 지었다.
[나, 니오베 엔드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그것은 자신을 찾아온 인간에 대한 찬사였으며, 용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드래곤의 이름은 그 어떤 종족보다 무거웠다.
그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한다는 사실은 맹세의 대상을 현격히 높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조용히 드레젠의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대를 도와, 세계를 지킬 것이다. 내 영혼이 다할 때까지 협력하도록 하겠다.]
“……너무 후한 처사 아닙니까?”
“후한 처사라니. 내 레어를 찾아오고 수호자를 꺾은 것에 대한 보상이다.”
드래곤은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게다가 인자한 그린 드래곤이라면, 보상이 후한 것은 덤.
도리안은 병풍이 되어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니오베와 드레젠은 꽤 친근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도리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보겠어.’
드래곤, 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받은 사람 앞에서는 평범한 마법사일 뿐.
대륙 최고니, 인간 최고니 하는 칭호는 부질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자괴감이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푸욱, 한숨을 쉬고 있자니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았다.
“아, 아니…… 두 사람은 계속 얘기하세요. 저는 구경을 좀…… 하고, 싶은데.”
“아가, 네 마나는 순수하고 어리석구나. 하지만 곧 재능이 만개할 거란다.”
“……그, 그런가요?”
니오베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도리안의 실력을 알아봤다.
그녀의 영혼이 드레젠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인간 기준으로 따지자면 꽤 실력 있는 여인일 텐데,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범했는지 궁금해졌다.
“영혼이 드레젠에게 속해 있구나. 왜 그런 거니?”
“풉.”
“우, 웃지 마세요. 그게-.”
도리안은 니오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니오베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훌륭한 수준까지 올라온 마법사.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을 섞은 것이 감점 요인이었다.
“마법사는 감정이 섞이는 순간 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지. 그건 드래곤도 마찬가지란다.”
“명심하겠습니다.”
“드레젠이라고 했나? 이 여인, 잘 통제할 수 있느냐?”
“네 뭐.”
니오베는 인자한 모습으로 도리안을 쳐다봤다.
이제 도리안은 드레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히든카드로 써먹을 수 있는, 조커로 변했다.
계약의 힘이란 정말 대단했다.
“흐응, 그러면 내가 직접 가르쳐 보고 싶은데. 이 정도까지 올라온 인간은 처음 보거든.”
“저, 정말입니까?”
“아가, 아가라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란다.”
드레젠은 생각을 해 보았다.
황제, 그리고 영웅.
어차피 혼자 힘으로 마족을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막아도 브락시아는 폐허가 되어 있겠지.
‘영웅들을 내 수족으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긴 해.’
노선을 바꾸는 것도 고려할 사안이었다.
복수심에 불탔던 옛날은 지났다.
멍청한 모습을 보니, 투쟁심보단 허무함이 몰려왔다.
드레젠은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니? 네 선택이 필요해.”
“저, 전 무조건 배울 겁니다. 케이드 백작님. 이렇게 부탁할게요. 전 더 올라가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제 뒤통수를 치지 말라는 법도 없잖습니까?”
“다시, 다시 계약할게요.”
도리안은 반쯤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정말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광기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의 제자로 들어간다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
아니 모든 인간을 통틀어서 누구도 거머쥘 수 없는 기회였다.
“제발, 배우게 해 주세요.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
도리안의 머리는 온통 새로운 경지로의 열망만으로 가득 찼다.
무릎?
시녀에게 고개를 처박으라고 해도 그럴 기세였다.
드레젠은 생각을 마쳤다.
이용해 달라는데, 끝까지 이용해 줄 수밖에.
“그럼 황제가 아닌 나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해도?”
“…….”
도리안은 일순 말문이 턱 막혔다.
황제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영원토록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는가.
남녀 사이를 떠나 황제는 좋은 군주였고, 그녀는 훌륭한 가신이었다.
“황제가 언제까지고 날 가만 두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혹시 모르지요. 그이는 그렇게 속 좁은 남자가 아닙니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드레젠은 황제의 면모를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브레이시스 제국을 위해서라면 마족과도 손을 잡을 인간이었다.
다행히 마족은 그의 이상과 부합하지 않았다.
용사 프로젝트 역시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겉으로는 잘 대해 줬지만, 악랄한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영웅들과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지.’
사지로 내몰리는 입장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다.
-이거 그건가?
-다 빼앗아
버려!
-진짴ㅋㅋㅋㅋ 너무 웃기넼ㅋㅋㅋㅋ
-이게 그 N…… 뭐시기죠?
-그 강을 건너지 마시오 ㅜㅜ
드레젠은 도리안에게 다시 물었다.
“계약 조건은 단 하나,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
도리안은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녀의 결정으로 인해 대륙의 정세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