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7화
177화 – 도리안의 탐구생활
#1
도리안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어렴풋이 드레젠과 크리스가 하는 얘기도 들었다.
자신에겐 보이지 않던 마나가 그들에겐 보인다고?
그녀의 주먹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힘을 너무 많이 줘서.
“후우, 안 되겠어.”
그녀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여태까지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가졌고,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할 거다.
드래곤이라고?
그게 거짓이라는 걸 밝혀 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수식을 세우고, 마법진을…….’
그녀의 특기이자 자랑은 마법이었다.
아르간달 이래, 그녀만 한 마법사는 탄생한 적이 드물었다.
인간의 명예를 걸고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드래곤? 없다는 걸 내가 밝혀주지.”
항상 맹한 표정이었던 그녀가 가면을 벗었다.
마법을 한창 수련할 때를 제외하곤 흥미와 열의를 가질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었다.
드레젠의 제자라는 꼬마도 반드시 자신이 데려오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용병을 구해야 하나?”
그녀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홀로 움직여도 상관없었다.
무예는 어느 정도 통하는 것이 있어, 극한의 경지까지 올라선 마법사라면 접근전에서도 강력했으니까.
홀로 움직이는 것이 편하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중이떠중이를 데리고 다니면 없으니만 못했으니까.
“……일단 산맥의 중심부로 가야겠어.”
웅얼웅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비에 휩싸여 사라졌다.
한편 그 시각, 드레젠은 하이디엔과 밤거리를 거닐었다.
주제는 바로 ‘손님’에 대한 것.
하이디엔은 어딘가 토라진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그 손님이라는 사람, 정말 좋아서 데려온 거야?”
“그럴 리가.”
-ㅋㅋㅋㅋㅋㅋ대표님 질투하신다
-하악하악 귀여워!
-대표님 진짜 캐릭터 잘 만드셨넼ㅋㅋㅋㅋㅋ
-저거 드레젠 님한테만 저러는 거임 ㅜㅜ
실제 하이디엔에게 당한 경험담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보자마자 살해당했다는 얘기부터, 온갖 욕설을 얻어먹은 경험담, 고문당해서 죽은 것 등등.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드레젠은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뭘 그렇게 웃어?”
“아니, 많이 변했다 싶어서.”
“뭐, 뭐라는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그 여자나 빨리 어떻게 해 봐.”
“내가 뭘 어쩌겠어. 적당히 상대해 줘. 내가 부려먹을 거니까.”
하이디엔은 섬뜩한 웃음을 짓는 드레젠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한숨 속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둘이 걸을 때면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크흠, 그녀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그래서, 여긴 얼마큼 있다가 갈 거야?”
“계속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 이번엔 성에도 좀 있게.”
“아아, 그럼 계속 볼 수 있겠네.”
그녀가 밝은 미소를 띠었다.
드레젠은 왠지 모르게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는 그녀에게 일침을 날렸다.
“로드, 일은 똑바로 하셔야 합니다. 농땡이 피울 생각 하지 마시고.”
“무-슨 소리야? 난 항상 열심히 일해. 내가 너랑 같은 줄 알아?”
“그건 그렇지. 어쨌든, 저 여자는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그리고.”
드레젠은 산맥의 중심부를 바라봤다.
저번 세계에선 멜리젠이 깨어난 후, 레드릭의 아들이 움직였다.
이번에도 그럴까?
‘아, 생각하기도 싫네.’
그때 죽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드래곤이라는 족속들은 일단 수틀리면 브레스부터 뱉고 보는 다혈질이었다.
마법의 종족? 위대한 중간계의 수호자?
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였다.
소설과 현실은 차이가 정말 컸다.
“뭔데?”
“드래곤, 진짜 만나볼까 해서.”
어쩌면 파베론 산맥을 성지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디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래곤을 만난다고?
정말로?
큰 눈망울이 끔벅였다.
“지, 진심이야?”
“어. 슬슬 드래곤의 힘이 필요하긴 하거든.”
선수를 먼저 쳐야 할 때가 되었다.
드레젠은 산의 중심부를 바라봤다.
근처에서 도리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홀로 조사하러 떠났겠지.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그가 투덜거린 후, 하이디엔을 바라봤다.
도리안이 움직였으면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크리스, 이틀 정도만 부탁하자.”
“크리스라면……제자?”
“그래. 싹수가 보이는 애야. 홀로 수련할 공간만 마련해주면 좋을 거야. 대련도 가능하고.”
하이디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들에게 부탁하면 대련이야 실컷 해 줄 수 있겠지.
은인, 드레젠의 제자라고 소문나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그 정도야 못 할 것도 없었다.
“좋아. 꽤 실력 있어 보이던데.”
“꽤? 걔는 인간 최고의 천재야.”
“오, 꽤 기대되는데.”
하이디엔이 웃었다.
인간 최고의 천재라니, 그녀도 꼭 경험해보고 싶었다.
드레젠은 머리를 긁적였다.
성을 돌본다고 했는데, 또 외도를 하게 생겼으니…….
“부하들에겐 면목없구만.”
“자각이라도 하고 있네. 근데- 어차피 성은 그냥 집 아니야?”
-그거 맞지
-초반 목표에 아주 잘 부합한닼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선생님 뼈 맞으신 거 처음인뎈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천적이었네 알고 보니까
맞는 말이라 딱히 대꾸하진 않았다.
대신 하늘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갔다 온다.”
“그래요. 다녀오세요.”
-아아아아니 이렇게 달달한거 뭔데!
-여기가 무슨 로맨스 드라마 방이냐!?
-우우우우우우 솔로 천국! 솔로 천국!
-폭!
-동!
-커!
-플!
-지!
-옥!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드레젠은 허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런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으니까.
간단하게 짐을 챙긴 드레젠은 바로 크리스를 만났다.
“……그 여자가 그렇게 멋대로 행동해서 어쩔 수가 없네.”
“알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금방 다녀오마.”
이젠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이 아닌 어깨를 두들겼다.
한 사람의 기사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페베스 검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검술을 체험해 봐라.”
“네.”
얼마나 성장할지 퍽 기대됐다.
그는 저 멀리,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드래곤.
지상 최고의 생명체에게 향하는 일이었다.
#2
파베론 산맥의 중앙.
제일 높은 봉우리에 도리안이 나타났다.
그녀는 홀로 온 것을 무척 후회하고 있었다.
위로 올라올수록 마나의 운용이 까다로워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로브는 먼지가 덕지덕지 묻었다.
“후우, 마나가 희박한 지대가 있을 줄이야.”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몬스터는 없었다.
제국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산맥의 꼭대기.
드래곤과는 별개로, 무척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았다.
‘이런 곳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항상 마탑, 혹은 황궁에서만 살았다.
마법은 자연에 있는 마나를 끌어다 쓰는 학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종자들이 마법사였다.
숨을 고른 그녀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드래곤이 없다는 걸 꼭 밝혀주겠어.”
마나 운용이 까다로울 뿐, 아예 불가능하지 않았다.
도리안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이 정도 페널티는 충분히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쿵-!
그녀의 지팡이가 땅을 울렸다.
순식간에 마나로 만들어진 선이 땅을 가로질렀다.
‘광범위 탐색.’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마법진에서 마나의 파장이 흘러나왔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드래곤은 세상에 위협이 닥친다면 깨어나 세계를 수호한다고.
그 위협이란 무엇일까?
도리안의 생각엔 언데드였다.
‘이 정도 양이면 안 깨어나고는 못 배기지.’
불길한 기운이 산맥 전체를 훑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몬스터의 폭주까지 일으킬 수 있는 행동.
남이 보면 뜯어말리거나 힐난했을 테지만, 도리안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으니까.
[아우우우우우우-!]
저 멀리서 거대 늑대들의 하울링이 들렸다.
늑대뿐만이 아니라 곤충 형태를 띠고 있는 몬스터며, 흔히 알고 있는 코볼트, 오크, 오우거 등등이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다.
도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더 하면 산맥 전체가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검이 날아왔다.
[쉴드]
콰드득-!
기민한 반응속도를 보인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막아냈다.
다섯 겹의 쉴드 마법을 펼쳤는데, 그중 네 개를 뚫고 마지막 쉴드 마법에 박힌 검.
“누구냐-!”
“접니다. 미쳤습니까?”
기척도 죽이지 않고 다가온 자는 드레젠이였다.
설마 했지만 이렇게 무식한 수를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드레젠.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덕분에 마법진의 발동은 완전히 취소됐다.
“무슨 짓입니까?”
“당신이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여길 지옥으로 만들 생각입니까?”
드레젠은 살기마저 품었다.
어마어마한 마나가 주변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도리안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중간에 스파크가 튈 만큼 치열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미치광이 마법사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제가 하는 일은 곧 황제가 하는 일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려고 했던 일, 제국이 멸망할 뻔했던 건 알고 계십니까?”
도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다들 진짜 드래곤을 믿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드래곤은 전설에서나 나오는 존재였다.
“다들 한심하군요. 진짜 드래곤이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천재인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니. 따라오십시오.”
드레젠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도리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온 뒤로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계약하시죠.”
“……그거 진심입니까?”
“그래요. 계약, 하시죠.”
도리안은 멍청하게도 자기 무덤을 파고 있었다.
드레젠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저 여자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이렇게 쉽게 자기 무덤을 파도 되는 걸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지도.’
-당장 계약해!
-절.대.계.약.해!
-이건 놓쳐서는 안 될 찬스여!
-ㅋㅋㅋㅋㅋ아니 이걸 자기 무덤을 판다고?
-으딜 인생 1회차 주제에;;
시청자들은 당장 도리안을 노예로 만들라며 아우성이었다.
드레젠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이렇게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후회 안 하겠습니까? 진짜 드래곤이 있다니까요?”
“전 두 눈으로 본 것만 믿습니다. 증명된 것만 믿기도 하죠. 그러니까, 드래곤은 없는 겁니다.”
도리안의 태도는 완강했다.
드레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완강하게 나오는데 별수 있나.
‘이때는 아직 전쟁 전이라 그런가?’
그가 알고 있는 도리안 구스타프와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어쩌겠는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