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5화
175화 - 내 새끼를 건들면 안 되지
#1
새롭게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이 된 드레젠.
그에게 아그네스가 찾아왔다.
스카이워커 가문의 마지막 후계를 쫓고 있는 이들을 밝혀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어디였는지 알아?”
“예. 신성 왕국에서 사주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자세한 내막은 아직 조사 중이에요.”
“흠…… 오랜만에 위도우를 만나야 하겠는걸.”
아그네스가 빙긋 웃었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기사단은 저마다 조그마한 정보망을 운영 중에 있었다.
다크몬드처럼 거대 조직을 운영하진 않았지만, 저마다 특색 있는 장점을 보유했다.
“위도우보단 요정족 쪽에 접촉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요정족이라……. 오베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도움이 아니라 명령이죠. 어쨌든, 조사를 해 보니 이 꼬마의 가문은 제국의 두 공작 가문과 신성 왕국 간의 거래로 인해 몰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에게 대충 듣긴 했었다.
자신도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고, 그저 추측이라고만 했을 뿐이었지만.
결국 전쟁이 우선이라 그 문제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참에 제대로 짚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좋은 생각이에요. 아 참-.”
아그네스가 또 다른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건 드레젠에게도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황궁에서 아크메이지가 파견 온다고 하던데, 대체 어떻게 꼬신 건가요?”
“뭐?!”
-아니 그 양반이 여길 왜 왘ㅋㅋㅋㅋㅋ
-진심 혼돈이닼ㅋㅋㅋ
-여긴 대체;;
-하시스 성으로 모여!
미드 모여도 아니고, 왜 죄다 이쪽으로 모이는 건지.
드레젠이 한숨을 쉬었다.
아크메이지, 도리안 구스타프는 까다로운 여인이었다.
맹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들쑤실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었다.
“아니,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겠군.”
“어째, 이용할 방법이 떠올랐는지요.”
눈을 끔뻑이는 크리스를 한번 바라본 드레젠이 씨익 웃었다.
어쩌면 크리스의 안목을 크게 넓히는 데 한몫할지도 몰랐다.
부려 먹기 위해서는 엘프들의 마법도 좀 견식시켜 주고, 붙들어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녀의 잠재력은 한계에 달했다.
끝이 어땠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나름대로. 어쩌면 크리스와 엘프들에게 도움이 되겠어.”
“저희에게 내릴 또 다른 명령 없습니까?”
“계속 동향을 살피고, 무의 추종자 놈들도 살펴 줘.”
아그네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모습을 보며, 크리스가 물었다.
“제 가문이…… 진짜 그들에 의해 멸망했을까요?”
“어쩌면.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드레젠이 물었다.
크리스는 가문을 부흥시키는 것이 꿈이었다.
과거, 성인이 된 크리스는 오직 그 일념으로 검을 잡고 휘둘렀다.
그 결과 정말 참하고 실력 좋은 여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
“저는-.”
아직 마음이 여린 꼬마는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고민하는 크리스.
드레젠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훌쩍 자라 버린 꼬마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아직은 깊게 고민하지 말고, 그 자식들을 어떻게 때려눕힐까만 걱정해.”
“…….”
“이길 수 있어야 하니까. 일단은 그게 먼저 아니야?”
“-맞습니다. 제겐 너무 이른 고민이었네요.”
역시 말귀를 잘 알아듣는 아이는 이래서 편했다.
복수에 눈이 멀어 미친놈처럼 허우적거리는 자들을 많이 봤다.
주변에서 만류하거나 걱정했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관계의 틀어짐과 불화뿐이었다.
전쟁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울 애긔 착한 거 보소
-ㅋㅋㅋㅋ말 잘 듣는다
-진짜 성숙하네;
-캐릭터 잘 뽑은 듯 ㄹㅇ
크리스의 캐릭터는 확실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매력을 어필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드라마처럼 화제가 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직접 교감할 수 있는 상대라니!
세이브 더 브락시아의 출시로 영화, 드라마의 산업이 주춤한 것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대부분의 문제는 내가 처리해 둘게. 너는 강해지는 것만 신경 써라. 가장 중요할 때 활약할 수 있도록.”
“예!”
씩씩하게 답하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며, 드레젠은 시청자들과 가벼운 잡담을 떨었다.
“역시 크리스는 천재가 맞네요. 저 정도 성장이라니,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크으
-역시 크리스
-크리스를 보면 흉근이 웅장해진다!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동료로 꼬시고 싶은데ㅜㅜ
-전 천천히 영업 중임ㅋㅋㅋ 같이 여행하는 거 꿀잼
사람들은 저마다 크리스에 대한 칭찬, 경험담을 늘어놨다.
개중엔 크리스의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내는가에 대한 질문도 많았다.
드레젠은 가볍게 답했다.
“크리스의 잠재력은 알아서 터지거나, 여러분들이 이끌어 줘야 합니다.”
-??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
-이분 천재 가르치시더니 시청자 수준 벌써 까먹으셨넼ㅋㅋㅋ
-아ㅋㅋ 우린 천재 아니라고요!
드레젠은 작게 실소를 지으며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다소 뼈를 때리는 충고였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사실인데.
“여러분이 크리스에게 자극이 될 만큼 성장하셔야 한다~ 이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그렇다고 뼈를 때리넼ㅋㅋㅋ
-구급차 불러!
-으엌ㅋㅋㅋㅋ 아파요 선생님ㅜㅜ
-진짜 뼈를 망치로 때리신다ㅠㅠ
“여러분이 알 수 있게 친절한 설명 드렸습니다. 열심히 하세요.”
이젠 게임 잘하는 것도 경쟁력이 되는 시대였다.
드레젠의 말처럼, 뭐든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당분간은 이런 방송을 이어 갈 겁니다. 애들 수련시키고, 주변 정리 좀 하고.”
-그것 또한 드레젠이다.
-다 배울 게 있다~ 이 말입니다.
-오랜만에 진짜 소소한 방송이군요.
시청자들은 이제 그가 뭘 하든 그저 즐기고 있었다.
단단한 콘크리트 층이 완성되었다는 증거였다.
고정 팬층을 형성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드레젠은 가만히 생각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도리안을 부려 먹을 수 있을까?’
도리안도 천재였다.
알면서도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 이곳, 파베론 산맥에 잠들어 있었다.
#2
“흐음-.”
화창한 날씨.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날씨였다.
하시스 성이 보이는 도시, 에렌틸에 도착한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변방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엘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드레젠의 근황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재미있겠는걸.”
그녀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이 없었다면, 황제의 명령에도 불복종했을 것이다.
아크메이지라는 이름은 그럴 수 있는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쨍쨍한 날씨보단-.’
콩.
그녀의 지팡이가 땅에 닿았다.
쿠르릉-.
얼마 있지 않아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녀는 하늘을 보며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낙후된 곳이지만, 공기는 좋네.”
그녀는 마차를 타고 가며 감상을 뇌까렸다.
파베론 산맥은 오랜 기간 연구 중에 있는 장소였다.
학자들은 전설의 생물인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고 주장했으니까.
아주 먼 옛날, 진짜 드래곤이 살긴 살았던 모양인지 마나가 이질적인 산맥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옛날 일이야.’
지금에서야 드래곤이 깨어난들, 대륙의 지배자라 주장할 수 있을까?
도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책임을 지지 않는 이들은 주인이라 말할 자격이 없다.
브레이시스 제국, 그리고 브락시아 대륙은 큰 혼란 속에 있었다.
‘혼란이 오기 전에 잘했어야지.’
푸르른 산맥 너머,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드래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걸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은 힘없는 자들이었다.
도리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들을 늘어놓으며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3
자동 진행으로 다음 날 아침까지 돌려놓은 드레젠은 하늘을 바라봤다.
분명 몇 분 전까지는 화창한 날씨였는데, 지금은 우중충하게 변해 버렸다.
그가 입가를 씰룩였다.
“마음에 안 드는 여자가 오겠군요.”
항상 주변의 날씨를 건드는 것이 도리안의 습관이었다.
드레젠 본인이 이따금 핀잔을 주었었다.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줄 때나 사기를 떨어뜨리는 때에는 반드시 한마디를 했었지.
항상 제멋대로 생각하는 모습은 많은 불화를 일으켰다.
“하이디엔을 만나러 가야겠군요.”
그녀가 갈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도리안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지금 그녀의 신경은 엘프에게 쏠려 있을 테지.
드레젠은 저 멀리서 훅훅 달리고 있는 크리스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오늘 훈련은 견학이다.”
“견학요?”
드레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잠재력을 본다면,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크리스라면 분명 마법에 대한 재능도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동료들에겐…….”
“말해 두고 와.”
“알겠습니다.”
크리스와 엘프.
어떤 선택을 할까?
두 사람은 천천히 성을 나서, 엘프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이제 숲에 사는 오크들은 거의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엘프들이 따로 가도를 만들진 않았군요.”
“그들은 나무 위로 다니거나 산세를 그대로 타는 걸 좋아하거든.”
군대를 다녀와 본 이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나왔다.
특수한 환경이 아닌 이상, 보통 사람들이 가도가 정비되지 않은 산을 다닐 일은 거의 없었으니.
정비되지 않은 산길은 무척 험하고 가팔랐다.
발목이 꺾이는 건 예삿일이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게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한다.
“신기하네요.”
“그냥 특성이라고 생각해 둬.”
“알겠습니다.”
크리스에게 가르칠 것은 너무나 많았다.
앞으로 다양한 종족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고, 그들의 생활습관을 모두 알아야 하니까.
드레젠은 자신이 없는 시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부딪쳐 봐. 그래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네. 반드시 그렇게 할 겁니다.”
대답은 역시 씩씩했다.
그들이 막 산으로 진입하려는 때, 낯선 마차가 가도를 따라 산길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특이한 마차였다.
보통 마차라면 마차 앞뒤로 호위 병력이 붙는다.
마차는 돈은 많으나 몬스터를 테이밍하지 않는 이들이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었으니.
“마차?”
“손님이 벌써 오셨군요.”
드레젠은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차의 창문에서 불쑥, 긴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드레젠에겐 무척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케이드 백작.”
“반갑습니다. 구스타프 백작님.”
일곱 영웅 중 한 명이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