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2화
172화 - 이젠 게임에서도 선생을 하란다
#1
[할레단 후작가에서 간곡히 요청함]
할레단 후작가.
드레젠과는 악연으로 엮여 있는 사이였다.
지금에서야 든든한 후원자 비슷한 위치로 바뀌었지만, 속은 바뀌지 않았겠지.
그들이 ‘간곡’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요청한 내용.
그건 바로 자신에게도 이시스의 눈물을 팔아 달라는 것과 사병 육성을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병이라……. 기사가 될 재목을 육성해 달라고 하는 것 같네요.”
-거기가?
-반대! 반대!
-아닠ㅋㅋㅋㅋ 염치가 없는 건가?
-나는 이 교육 반댈세!
시청자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연한 일이었다.
할레단 후작가와의 인연은 악연밖에 없었으니까.
장남인 모나르도 그랬지만 할레단 후작 본인도 드레젠을 무시했다.
“아무래도 마법사 가문이다 보니 기사 전력이 부족하긴 하죠. 흠…… 할레단 후작가와 일을 잘 풀어내면 새로운 전력을 빼 올 수 있겠군요.”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시스 성은 기사 위주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레인저라는 특수 병과가 있었지만, 마법사에 비하면 화력이 낮은 것이 사실이었다.
“레인저는 사실 저격, 척후에 특화되어 있는 병과입니다. 암살자의 하위 호환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투 마법사를 육성할 수 있다면, 꽤 남는 장사예요.”
-그런가?
-ㅠㅠ 그래도 싫다
-감정이냐 국익이냐!
-근데 아직도 4번이나 남지 않았음?
부탁 사용권도 네 번이나 남은 상황이었다.
사실 저쪽에서 뭘 원하든 이쪽에서 남는 장사를 할 수 있었다.
드레젠은 할레단 후작가와 협상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시기가 딱 맞물리기도 했다.
지금 하시스 성은 군사력을 증강할 차례였으니까.
“쿨레드. 할레단 후작가에 연락해서 협상을 진행하자고 해.”
“알겠습니다.”
쿨레드는 군말 없이 명령을 이행했다.
드레젠은 자동 진행을 통해 서류를 빨리 처리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벌써 해가 지는 중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일할 수 있다니, 신기한 날이네요.”
“그러냐. 가문 사람들은, 잘 지내고?”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드레젠은 쿨레드의 어깨를 두들겼다.
두 사람은 함께 걸어서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그사이에 수많은 이들과 마주쳤다.
모두가 극진하게 인사를 건넸고, 드레젠은 자연스럽게 받아 주었다.
“영주님, 진짜 엘프들과 동맹을 맺으실 겁니까?”
“엘프만 동맹을 맺는 게 아니야.”
“그럼?”
드레젠이 생각해 보았다.
과연 몇 개의 이종족과 동맹을 맺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수의 마족의 하수인들을 죽이게 될까?
가만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엘프, 수인, 드워프, 서리, 드래곤. 내가 생각한 동맹의 이름이야.”
“……진심이십니까?”
“그래. 그래야 마족들에게 대항할 수 있거든.”
“그럼…… 영지를 늘릴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가 넓어지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간다.
손이 많이 가면 인력이 늘어나야 하고, 인력이 늘어나면 관리가 힘들었다.
그건 평화를 찾은 다음에 해도 상관없었다.
“딱히 영지를 늘리지 않아도 돈은 많이 들어오니까.”
“그런 그렇습니다.”
쿨레드 역시 무리하게 영지를 늘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었다.
사람이 많이 늘어나면 천천히 늘려야 하겠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두 사람은 독대하며 식사를 했다.
게임 속 캐릭터 역시 제때 식사를 해 줘야 했다.
안 그러면 아사해서 죽으니까.
“영주님.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음? 뭔데?”
드레젠이 한참 코스 요리를 먹고 있을 때, 시종장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개의치 않으며 용건을 물었다.
“엘프의 로드가 찾아왔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응? 그래? 들어오라고 해. 이제 애피타이저니까.”
“알겠습니다.”
전채 요리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하이디엔이 찾아올 줄 몰랐던 드레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프 로드라니,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같이 밥 먹다 보면 알겠지.”
“하이디엔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드레젠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하이디엔이 들어오자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엘프들은 뭘 먹지?
그렇게 생각한 주방장의 멘탈이 가루가 되기 직전, 하이디엔이 입을 열었다.
“이분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것을 주셔도 됩니다. 엘프들도 딱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니.”
“아, 알겠습니다.”
항상 전투복만 입고 있었던 그녀가 하늘하늘한 옷을 입었다.
현대에서 정장을 입은 하이디엔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다른 분위기에 드레젠도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부랴부랴 요리가 나오고 하이디엔도 식사를 함께했다.
“음, 맛있네요. 제가 먹어 본 인간의 요리 중에는 최고-.”
“여기서는 말 편하게 해도 돼.”
“-알겠어. 그렇게 하지.”
바로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에 쿨레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프 로드를 도와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친할 줄이야.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생각보다 관계가 좋아 보이는군. 이러면 사실상 같은 영토나 다름없지.’
벌써 엘프들이 정령 마법을 이용해 땅을 개간하고 있었다.
인간의 건축 방식과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엘프.
하이디엔의 입에서 진행 상황이 술술 흘러나왔다.
“터는 다 다져 놨고, 이제 나무를 이용해서 집만 지으면 돼.”
“일주일이면 얼추 되겠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은 커다란 기틀을 잡고, 지낼 수 있는 곳을 최소한으로 만들었다.
그 후에 조금씩 입맛에 맞게 풍경과 환경을 바꿔 주는 것이 엘프의 방식이었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 일종의 정보 교환?”
“내가 오전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던 것 같은데.”
쿨레드가 작게 답했다.
‘예-.’라고 울리는 그의 대답에 하이디엔이 궁금증을 띄웠다.
드레젠은 간단하게 오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하이디엔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말했다.
“그곳에 베리드의 첩자가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 않나?”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나한테 배운 걸 가져가 봤자야.”
“왜지?”
“사실 난 잘 가르치는 방법은 모르거든.”
그가 했던 방법은 인공적이거나 무식한 방법뿐이었다.
엄청난 시간을 때려 박아서 반복 숙달하거나, 대련으로 죽기 직전까지 경험을 주입하는 것밖에 한 것이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몬스터 굴에 처박아서 다 죽일 때까지 못 나오게 한다든가.
“내가 했던 방식은 워낙 무식해서, 똑같이 하면 살아남을 놈이 없거든.”
“-대체 어떤 식으로 했길래.”
“음, 오우거 1,000마리 잡기?”
-뭐여 그건ㅋㅋㅋㅋㅋ
-베타 테스트 때 뭔 짓거릴 하고 다닌 거얔ㅋㅋㅋㅋ
-이런 퍼포먼스가 가능한 이유 = 굴러서.
-ㅋㅋㅋㅋ오우거 1,000마리 실화냐고 앜ㅋㅋㅋ
하이디엔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수련을 했다고?
아니, 그 전에 오우거를 1,000마리나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튼, 하이디엔이 요구하는 것은 젊은 엘프의 육성이었다.
“대신 자격 있는 자들을 엘프의 영지로 데려가서 정령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
“정말?”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나?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격이 있는 자가 나타났을 때만 가능한 일이야. 정령들은 까다롭거든.”
드레젠도 그걸 알고 있었다.
용사로 키워진 드레젠도 정령과는 교감할 수도 없었다.
정령은 정말 재능의 영역이었으니까.
수많은 대륙 사람 중에 정령사로 이름을 날린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정령사 한 명 있으면 괜찮지.”
“오면서 봤는데 가능성 있는 자가 한 명은 있더군.”
“오, 정말? 진짜 있다고?”
아쉽게도 정령을 보는 눈은 드레젠에겐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분야이기도 했다.
현대에도 오롯이 천재성 하나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듯, 브락시아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정령술이 바로 그런 학문이었고.
“훈련장에서 기초 훈련을 하고 있더군. 작은 꼬마 아가씨였어.”
“한번 봐야겠어.”
정령사의 재목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다.
정령사!
이는 드레젠이 아는 미래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직업군이었다.
아마 당대에 재능 있는 한 명이 베스티안 백작령에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곳은 마족들에게 쑥대밭이 되었으니.
“하이디엔, 오랜만에 한판 어때.”
“좋다. 식후 운동으로 딱이군.”
“룰은 같은 창술로 하자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솔직히 인정하고 있었다.
드레젠은 엘프의 창술을 그녀보다 훨씬 더 능숙하고 유연하게 구사하는 자였다.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배울 것이 많다는 건 사실이었다.
“영주님. 할레단 후작가에서 내일 방문한다고 하네요. 그쪽에서도 빠른 뭔가가 있나 봅니다.”
“그래. 서신이 꽤 빠르게 왔다?”
“영주님이 안 계실 때 마탑에서 지원을 좀 받았거든요.”
현대의 전화처럼 소통할 수 있는 기구가 있었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도 통신은 원활했다.
본래 하시스 성에는 마법 물품을 비치하지 않았지만, 드레젠이 영주가 되며 바뀐 것.
그렇게 하이디엔과 가볍게 친목을 다지며 하루를 보냈다.
#2
다음 날.
할레단 후작이 직접 수행원을 이끌고 하시스 성을 찾아왔다.
후작이 머무는 저택,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영지에 비하면 초라할 지경의 성이었다.
이런 곳에서 엄청난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들어가시지요.”
“그래.”
드레젠.
웬만하면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후작가에 치명적인 불명예를 안긴 것도 모자라, 엄청난 양의 자금까지 빼앗아 갔으니까.
후작이 운영하고 있는 광산들이 아니었다면 진즉 파산했을 지경이었다.
‘찔러나 보자는 심정이었는데, 그걸 덥석 물어 버리는군.’
정치에는 애송이였던가?
무슨 꿍꿍이를 감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요즘엔 장남인 모나르 역시 정신을 차렸는지, 수련에 열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우라고 하던가?
그와도 제법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어서 오세요.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성의 정문에서 정복 차림의 드레젠이 나와 그를 반겨 주었다.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래간만이군. 소식은 들었네. 백작 위를 얻었다면서.”
“운이 좋아 그렇게 됐군요.”
“……이런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레단 후작은 조용히 주변을 훑으며 그를 따라갔다.
천혜의 요새라고 하기엔 지리적 요건이 다소 떨어졌다.
하지만 그걸 충분히 메울 만한 장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시스 성이라……. 제법 괜찮군.’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의 머릿속에 청신호가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