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9화
169화 - 몬스터 웨이브
#1
게임 시간으로 며칠 후.
드레젠은 한동안 바쁘게 돌아다니며 길목을 텄다.
이동하는 시간은 자동 진행으로 돌려놔서 최대한 시간을 아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엘프들이 세즈펠 운하를 통과하는 날이었다.
“흠-.”
“저, 정말 오늘 지나가는 겁니까?”
“그렇지.”
저 멀리서부터 기운이 느껴졌다.
워낙 많이 뭉쳐 있었기에 민감한 자들이 벌써 움찔거렸다.
병사들이 모두 나와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모였다.
“저기 오는군.”
솨아아-.
바다를 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고래가 우는 것 같은 하울링이 짙게 퍼졌다.
카라탁스가 잘 도착했다고 알림을 주는 것 같았다.
크아아아아아-!
와이렉스가 화답하듯 울었다.
“으윽-.”
“무, 무슨 놈의 포효가!”
“와이번의 왕이라더니, 진짜인 모양이야.”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레젠은 기분 좋게 웃었다.
곧이어,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캬아아악-!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녹색 와이번들이 상공을 수놓았다.
“와이번!”
“와아-.”
“어? 근데 사람이 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몇몇 눈썰미 좋은 자들이 와이번 위에 누가 올라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와이번은 현란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드레젠은 그 모습을 보며 엘프식으로 경례를 해 주었다.
벌써 저만큼이나 능숙하게 다루다니, 역시 엘프와 와이번의 궁합은 꽤나 잘 맞았다.
[뿌우우우우우-!]
거대한 섬이 울었다.
아니, 바다의 공포라고 불리는 씨-서펜트,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카라탁스가 고개를 쳐들고 울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각양각색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몬스터 웨이브.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게 무슨-.”
“말했잖아. 몬스터 웨이브라니까.”
“저들이 공격하진…….”
드레젠이 카라탁스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봐라.”
“어?”
고고하게 서 있는 여인이 보였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릿결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드레젠과 눈을 마주치고 샐쭉 웃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멀리 있어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오직 드레젠만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몬스터의 등 위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왜 몬스터가 사람을 태우는지, 각자의 영역에서 생활한다고 알려진 해양 몬스터들이 대거 몰려왔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입을 쩍 벌리고 몬스터 웨이브를 쳐다보는 이들.
성서에 나오는 레비아탄의 이야기처럼, 거대한 행렬이 지나가는 데는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이런 일이……. 이건 정말 기적입니다!”
“기적은 무슨.”
“소문이 날 겁니다. 이건……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백작님.”
“상관없어.”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소문이 나면?
그러면 엘프와 전쟁이라도 벌일 것인가?
그렇다면 하시스 성과 베스티안 백작가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파급력은 크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적을 솎아 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인간 중에서도 마족에게 협력하고 있는 자들은 많았다.
그놈들을 모조리 솎아 내고 마족과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그보다…… 성좌의 힘도 끌어들여야 해.’
성좌의 실마리는 신성 왕국, 그리고 데이몬을 섬기는 아즈모단 왕국에 있었다.
루시퍼와 아스모데우스가 바로 그 두 곳에 자신을 부를 수 있는 장치를 숨겨 두었기 때문.
이는 ‘그분’의 안배로 이뤄진 처사였다.
“그럼, 우리도 가자.”
[알았다. 이렇게 보니 또 장관이긴 하군.]
펄럭-.
와이렉스의 날개가 펴졌다.
드레젠은 금덩이 하나를 영주에게 던졌다.
허둥지둥 금덩이를 받은 영주를 쳐다보지도 않고 드레젠이 고개를 돌렸다.
“출발!”
[크아아아아아아-!]
와이렉스의 포효와 함께 첫 번째 관문을 지나갔다.
엘프들의 강행군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 영해였다.
자, 그럼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베스티안 영지로 가자.”
[드디어 마지막인가?]
“맞아. 항구를 열어야지.”
오랜만에 에드윈에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줘야지.
드레젠은 바람을 만끽했다.
-진짜 가슴이 웅장해지네
-이걸 본방으로 보다니ㅜㅜ
-바로 클립! 바로 수출!
-이건 하이라이트로 바로 따야지!
시청자들의 반응은 단연 최고였다.
#2
베스티안 백작령.
오늘도 평화로운 일상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수해에서 넘어오는 몬스터가 없는지 감시하는 병사들.
북적북적하고 시끌시끌한 하루가 시작되던 때, 영주의 저택은 아침부터 꽤 부산스러워졌다.
“몬스터? 저거 와이번이야?”
“어? 와이번이라면-.”
일반적인 와이번은 이곳까지 넘어오지 않았다.
와이번은 인간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와이렉스가 말하길, 씹으면 뼈밖에 느껴지지 않아 맛대가리가 없다고.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와이번과 인간은 작정하고 마주치지 않으면 서로 볼 일이 없는 사이였다.
“백작님인가?”
“저렇게 큰 와이번이면, 그분이겠군.”
“얼른 영주님께 알리자고.”
제일 먼저 발견한 병사가 깔끔한 보고 체계를 거쳐, 영주에게 알렸다.
후웅-!
거센 바람이 널찍한 저택 뒷마당에 몰아쳤다.
영주는 전신에 오러를 두르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와이번을 바라봤다.
“언제 봐도 멋진 소환수로군.”
“드래곤을 제외하면 최고의 소환수죠.”
“백작님을 뵙습니다.”
에드윈, 샤페론이 함께 내려 예를 취했다.
드레젠 역시 가볍게 묵례로 베스티안 백작에게 인사했다.
이제 동등한 백작의 입장.
과하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어졌다.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꽤 중요한 일인가 보군.”
“그렇죠.”
“알겠네.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들아, 잘 왔다.”
에드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베스티안 백작은 작게 웃었다.
둘째 아들이 부쩍 성숙해진 것이 느껴진 덕분이었다.
하시스 성에 잔류시킨 것이 잘한 선택이라는 것도 체감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드레젠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다.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네.”
드레젠과 베스티안 백작이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물렸다.
하지만 드레젠은 누가 들어도 상관없었기에 편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래, 부탁이 뭔가.”
후릅-.
잘 우린 차를 입에 머금고 향을 맡은 베스티안 백작이 물었다.
그의 신체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마치 아들과 함께 대화하는 듯한 편안함을 보였다.
드레젠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를 꺼냈다.
“항구를 하루만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항구를?”
“예. 엘프들이 이주해 올 예정입니다.”
커흡!
백작은 차를 들이마시려다 뱉을 뻔했다.
엘프들이라고?
그가 성을 장기간 떠나 있었다는 건 소식통으로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엘프들의 영역으로 갔었나?”
“네. 그들은 파베론 산맥에서 터전을 마련할 겁니다.”
“엘프의 수는 족히 백만이 넘을 텐데.”
백만이 넘는 인구가 파베론 산맥으로 들어간다니.
이건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그가 알고 있기로 엘프의 서식지는 제국 국경 너머에 있다.
그곳에서 이곳까지 모두가 육로로 올 수는 없을 터.
항구를 빌려 달라는 드레젠의 말을 상기한 그가 다시 물었다.
“커다란 배를 구했나?”
“배는 아니고, 몬스터들이 올 겁니다.”
“뭐라?”
들어 보니 점점 이상해졌다.
몬스터?
항구에는 몬스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비가 되어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라도 기겁하겠다
-막을 수도 없겠는뎈ㅋㅋㅋ
-보면서 어떤 생각 들깤ㅋㅋㅋ
시청자들도 베스티안 백작의 심경을 이해했다.
누구라도 저런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을 턱턱 내놓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나.
드레젠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서, 새 터전으로 수해를 차지하겠다는 건가?”
“그런 셈이죠. 황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심각한 사안일세.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저는 명령을 이행하는 것뿐입니다.”
황제의 명령은 숲에 있는 몬스터를 몰아내라는 것뿐이었다.
어떤 방식을 쓰든, 그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게다가 엘프라는 든든한 동맹을 얻는다면, 황제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겠지.
황제는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본 백작은 걱정이 크군. 부디 잘 넘어가길 바라겠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다른 손님들도 많이 올 테니까.”
“……다른 손님이라면?”
드레젠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계획, 그리고 마족과 무의 추종자들의 정체를 알린다는 것은 곧 끝까지 한배를 타야 한다는 뜻이었다.
베스티안 백작령, 그리고 글라디 베스티안은 믿을 만한 자인가?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계약서가 필요하겠어.’
믿을 사람은 직접 만들면 된다.
브락시아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백작님께서는 저와 함께하실 겁니까?”
“-이미 그러기로 했네. 자넨 떠나보낸 아들 같은 존재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짧지 않은 이야기였다.
드레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인 사실들이었다.
백작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 살고 있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암약하는 무리들이 그렇게나 위험했군. 이건 인류 전체가 뭉쳐야 하는 일 같은데.”
“그렇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거짓된 것들에게 속은 인간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그렇군. 심각한 사안이니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네. 그리고, 항구는 깔끔하게 비워 두도록 하지.”
드레젠은 일어나서 꾸벅, 인사했다.
베스티안 백작은 허허 웃었다.
엘프들의 행진이라, 꼭 보고 싶은 광경이기도 했다.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나도 조건을 하나 걸겠네.”
“말씀하시지요.”
“행진의 호위를 우리 백작군이 맡게 해 주게.”
드레젠이 웃었다.
협상은 금방 끝났다.
드레젠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자, 협상도 끝났으니 호위 임무를 마저 하러 가 볼까요?”
-가즈아아아!
-진짜 웅장하게 입장하자!
-시민들 껌뻑 죽겠네ㅋㅋㅋ
드레젠은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며 샤페론과 에드윈을 불렀다.
마무리를 성대하게 짓기 위해 그들의 역할이 퍽 중요했으니.
그는 지시를 마치고 와이렉스를 타고 날아올랐다.
#3
“인간의 땅이라니, 감회가 새로워.”
“그러게. 나도 너희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거짓말인 거 굉장히 티 나는데?”
그런가?
드레젠은 조용히 웃었다.
그가 의도했기에 엘프들이 이곳에 있을 수 있었으니,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었다.
저 멀리 베스티안 백작령이 소유하고 있는 항구가 보였다.
드디어 엘프들이 새로운 터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