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5화
165화 - 응징
#1
청담동.
개인실이 있는 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먹고 있는 하이디엔과 강일.
웬일로 청담동까지 와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하이디엔이 싱싱한 샐러드를 아삭- 하고 씹었다.
촉촉한 물기와 드레싱의 시고 단 맛이 어우러져 풍미를 살렸다.
“일은 잘된 거야?”
“네. 각국의 후원을 듬뿍 얻었죠. 프로 선수들도 육성 단계가 거의 끝났어요.”
“괴수를 잡는 대회도 만들 거라는 소리가 들리던데.”
“네. 아무래도 진짜 적은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하이디엔이 갔던 국가들은 그녀를 최고 귀빈으로 대했다.
후원 역시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다.
하이디엔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며 시간을 보냈다.
전채 요리가 지나가고, 알맞게 구워진 스테이크가 상에 올랐을 때,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아, 그리고 그놈들 잡았어요. 내일 경찰서로 소환될 겁니다.”
“그래? 일 처리가 엄청 빠르네.”
“그렇죠. 인터넷에도 뿌려서 공론화를 할까 생각 중입니다.”
강일은 스테이크가 정말 맛있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
그래야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한층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어쭙잖은 자비는 또 다른 가해자를 낳을 뿐.
세상엔 생각보다 상식선에 못 미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회사 내부에, 아직 마족의 추종자가 남아 있는 게 확실합니다. 이전에 그 얼굴, 기억하시나요?”
“나 총으로 쏘려고 했던 놈?”
“예. 저도 게임을 모니터링했습니다만, 어디에도 그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더군요.”
“역시.”
강일은 피식 웃었다.
결국 현실에서도 베리드의 뿌리를 뽑지 못했던 것.
마나만 조금 더 있었다면 단번에 죽여 버렸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난 어머니를 깨우기 위해 마나를 모으고 있거든. 아직 원천에 접근하는 건 시기상조겠지?”
“아직 육체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 건은 제가 처리하겠어요.”
“아 참.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는데.”
강일은 드레젠이 되어 있었다.
하이디엔은 눈을 껌뻑이며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게임 속 하이디엔은 드레젠에게 반말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현실 속 하이디엔은 어떨까?
“지금의 하이디엔은 말 편하게 할 마음은 없는 거야?”
“-아? 그, 그게요.”
귀가 발갛게 변하는 하이디엔.
억센 성격이었던 그녀는 무수히 많은 일을 거치면서 둥글둥글하게 변했다.
특히 용사였던 강일에겐 은은하게 깔린 두려움과 친근함, 존경과 동경 등등 무수히 많은 감정이 뒤섞인 상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존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됐어. 부담되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편한 대로 해. 편한 대로.”
“아,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저쪽에 있는 저랑 여기 있는 제가 다른 경험을 해서 그렇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거겠지?”
강일의 물음에, 하이디엔은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느새 또 몰입하고 있던 것일까?
지금 강일의 눈빛은 게이머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 옛날.
드래곤의 사체 위에서, 마족들의 시체 위에서 지었던 표정과 눈빛이었다.
무수히 많이 죽어 간 이들과 슬퍼하는 그들의 동료를 바라보며 지었던…….
“그럼요. 어차피 게임이잖아요. 가볍게 즐기세요.”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강일은 이내 장난기가 넘실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녀도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여유가 생겨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한 경험을 한 것일까.
강일은 궁금했지만, 의문을 눌러 담았다.
“저에게도 성좌가 찾아왔거든요.”
“엥? 진짜?”
“네. 어젯밤, 분명 제게 찾아와서 강일 님에 대한 얘기를 해 주고 가셨어요. 오늘 제가 찾아온 건 그 이유도 있어요.”
뜻밖의 일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다니.
하이디엔은 웃음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저희도 미련을 버리기로 했어요.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언제든지 브락시아로 넘어갈 수도 있고요.”
“그분에게 말을 들었구나.”
“네. 세션을 통째로 현실로 바꾼다니. 역시 성좌이기에 가능한 얘기겠죠.”
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부담은 크게 줄었다.
어떻게든 누군가가 마족을 몰아내고 평화를 되찾기만 하면 될 테니까.
매우 큰 확률로 자신이 그럴 테지만.
“다 끝나면?”
“……글쎄요.”
그녀는 그저 희미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식사는 맛있었지만, 어쩐지 무거운 분위기에서 끝났다.
#2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한강을 거닐었다.
하이디엔의 마법으로 인해 두 사람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일은 멍하니 한강을 쳐다보고 있었고, 하이디엔은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 중이었다.
“네. 지금 자료 보낼 겁니다.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열심히 하네.’
강일은 딱딱한 얼굴로 통화하는 하이디엔을 보며 안정감을 느꼈다.
옆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일을 똑 부러지게 처리했다.
“회사 이미지요?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기자님이 알아서 써 주시리라 믿어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하이디엔은 바로 엘리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엘리스. 나야. 그놈 위치 파악하고 나에게 보고해.”
[언제 움직이실 겁니까?]
“당장.”
그녀는 드레젠이 어르고 달래서 어른을 만들어 준 하이디엔이 아니었다.
용사 강일과 함께 무수히 많은 전장을 거친 엘프 로드였다.
그녀의 결단력과 행동력은 강일도 감탄할 정도였다.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던데-.
“-바로 움직일 거야?”
“네. 본래 지구에서는 마법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요.”
그녀는 창술뿐 아니라 마법에도 정통했다.
일족을 다스리는 자가 되고 나서 부단히 수행한 결과, 9서클에 근접한 마법 실력을 가졌다.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도시 하나를 지워 버릴 수 있다던 그 경지.
그런 하이디엔이 분노했다.
제아무리 마족이라도 그녀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함께 가시겠어요?”
“그래. 어머니를 살릴 마나를 마련해 보자고.”
하이디엔이 손을 내밀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물린 후, 하이디엔이 좌표를 계산했다.
그녀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주변 사람들은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가시죠.”
“회사로 가는 거야?”
“네. 괜찮죠?”
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꽤 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텔레포트.]
그녀의 입에서 브락시아어가 흘러나왔고, 두 사람은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주변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가롭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의 한강이었다.
#3
“헉, 헉, 젠장!”
빼어난 외모.
훌륭한 기럭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잔근육은 뭇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로 심미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모든 아름다움의 주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후웅-.
살벌한 바람 소리가 울리며 그의 몸이 훌쩍,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었다.
“제길- 엘리스!”
“꽤 늘었네? 약해 빠졌던 주제에.”
살벌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파직-.
힘을 준 바닥이 쩍 갈라졌다.
엄청난 근력으로 인해 발생한 일.
남자는 훌쩍 뛰어, 쫓아오는 엘리스와 거리를 벌렸다.
“참 이상해. 게임에서 넣지도 않은 영웅들이 나오질 않나, 몇몇 동족들은 아예 삭제되어 버렸고.”
“이익-.”
다시 한번 건물을 뛰어넘었다.
누군가 본다면 박수를 치고 입을 쩍 벌릴 광경이었지만, 남자는 공포에 질린 채 계속 다리를 놀렸다.
“싸울 용기는 어디 간 거야? 여전히 내가 무서운가? 그러게 왜-.”
“닥쳐라!”
퍼엉-!
남자의 손에서 시뻘건 화염이 작렬했다.
뒤따라오던 여성, 엘리스가 가볍게 손을 휘저어 불꽃을 날려 버렸다.
대치 상황.
남자, 엘더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쟁의 세대.
엘리스 같은 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이주 이전, 100년 동안 끔찍한 전쟁을 해 왔던 세대.
‘하지만 그건, 거짓된 구원이었다고.’
엔더슨이 뇌까리며 다시 손을 휘둘렀다.
붉은색이 아니라 시퍼런 불꽃이 아른거렸다.
그 위에, ‘그들’이 얹어 준 힘을 더했다.
검붉은 뇌전이 화염을 감쌌다.
그것을 보고, 엘리스는 더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희는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아직도 이해를 못 하다니, 그깟 전쟁 좀 치렀다고 뭐라도 되는 것 같지?”
“하-.”
엘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족, 베리드를 따르는 자들은 그만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주장했다.
엘프를, 그리고 인류를 이간질했던 구원.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저들은 엘리스가, 강일이, 하이디엔과 일곱 용사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건방진 소리는 작작 하렴. 그들이 구원이라고? 구원은 없단다. 아가야.”
엘리스가 희게 웃었다.
저 정도 불꽃은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정보부에서 일했다 한들, 전투에 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부였기 때문에 위험한 곳에 많이 파견을 갔었다.
“진정한 구원은 새로 시작하는 거다. 썩어 버린 것들아!”
화륵-!
엘더슨이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푸른 불꽃이 작렬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손은 허공만 갈라놨을 뿐이었다.
“-?”
“멍청해. 너무 멍청해.”
엘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배신자라면 조금 더 그럴듯할 줄 알았는데.
더 신중했더라면.
더 실력이 뛰어났더라면 애를 먹었을 텐데.
“상대할 맛이 전혀 안 나잖아. 멍청아.”
“무슨-?”
“여-.”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수도 없이 증오하고 음해할 기회를 엿봤던 남자의 목소리.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며 고개가 홱 돌아갔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남녀 한 쌍이 엘더슨을 깔아 보고 있었다.
“엘더슨. 설마 했는데 진짜였구나.”
한 쌍의 남녀 중 여자 쪽을 맡은 하이디엔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으득-.
주변에 퍼져 있는 마나 필드가 엘더슨의 마나를 억제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살펴봤지만 헛수고였다.
엘더슨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체념한 것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자들 중 또 누가 배신자인지 알려 줄 생각이 있나?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제가 그걸 말해 주리라 생각했습니까?”
말해도 정상적으로 살기엔 글렀다.
그럴 바엔 장렬히 산화하리라.
엘더슨은 강일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놈의 그 오만함도 조만간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오만? 난 오만한 적이 없는데.”
강일은 귓가를 후비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엘더슨에게 다가갔다.
하이디엔은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엘더슨의 몸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단단히 묶였다.
“크윽-!”
“고맙다. 안 그래도 마나가 좀 많이 필요하던 참이었거든.”
드레젠의 우악스러운 손이 엘더슨의 얼굴을 감쌌다.
곧이어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애처롭고 섬찟한 비명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