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3화
163화 - 이사 준비
#1
유저들이 하나둘씩 돌아갔다.
일이 있거나, 다른 약속이 있거나, 혹은 주변에 관심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여, 보상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기뻐하면서도 내색하지 못한 채 한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아버지였지?”
“맞아. 어떡하나.”
“불쌍하네.”
하이디엔의 무릎 위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엘프 로드.
그의 심장은 이미 멈춰 버린 지 오래였다.
끝까지 멜리젠을 막아섰던 정령왕.
천지 분간을 하지 않고 날뛰었으면 일대가 모조리 지워졌을 것이다.
“정령왕을 컨트롤하느라 힘을 소진했군.”
“맞아요. 아버지는, 숭고한 희생을 하신 겁니다.”
“너 말투가-.”
하이디엔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엘프는 소수인 만큼 끈끈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
동료만 죽어도 에일라처럼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물며 로드이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
‘많이 강해졌군.’
현실과 가상 현실의 갭이 조금씩 없어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전장에 섰을 때, 어렴풋이 보았던 눈빛이랑 비슷해지고 있었다.
하이디엔은 죽어 버린 아버지의 머리를 땅에 잘 누인 후, 가볍게 일어섰다.
“드레젠. 당신은 이제 엘프의 귀인이자 은인입니다. 함부로 대할 순 없지요.”
“난 그 전이 더 좋은데.”
-ㅋㅋㅋ사심
-갑자기 거리감 무엇;;
-아니 너무 선 긋는데?
-ㅋㅋㅋㅋㅋㅋ진짜 나 같았으면 멘탈 와르르멘션ㅜ
하이디엔이 묘하게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큰일을 함께 처리해 줬으니, 더 친근하게 접근할 줄 알았던 시청자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거리를 두다니!
그들이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허사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둘이 있을 때만. 이제…… 저도 더 위로 올라가야 하니까요.”
“그래.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것이 좋겠지.”
드레젠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인간이 하는 악수의 의미.
하이디엔은 인간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악수를 자연스럽게 받았다.
드레젠이 그녀의 고운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 숲으로 이전할 거야?”
“네……. 여기서는 더 이상 엘프들이 살아갈 수 없어요.”
멜리젠이 죽으며 남긴 상처는 엄청났다.
괜히 성좌들이 낳은 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숲이 죽음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싱케루스는 이제 도시의 구실을 못할 것이다.
자연의 정기를 이용해 힘을 유지하고 있었던 엘프 도시였으니.
“먼 길이 되겠군.”
“안전하게 모셔 줄 거라 믿습니다. 오늘은, 일단 다 같이 쉬어야겠어요.”
하이디엔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뒷수습을 할 차례였다.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 전장.
승리한 다음엔 언제나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2
그날 저녁.
드레젠은 숙소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살아남은 엘프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꽤 많은 숫자의 엘프가 움직이니, 수습은 빨랐다.
“엘프들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집니다. 외부인은 보지 않는 것이 관례니, 괜히 위로하겠답시고 쫓아가지 마세요.”
-낄끼빠빠 해라 이거지
-근데 되게 뒤처리 깔끔하게 하네요
-대우도 확실하게 해 주고, 아주 맴에 듬
-ㅋㅋㅋㅋ 나라를 구한 거나 다름없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맞는 말이었다.
멜리젠은 엘프라는 종족 전체를 없앨 수 있는 몬스터였다.
빚을 톡톡히 지워 놨으니, 엘프들은 자신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겠지.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오늘 멜리젠을 잡은 퍼포먼스로 확실히 증명은 되었겠죠. 저는 다시 편안하게 제 캡슐로 해야겠네요.”
-아ㅋㅋㅋㅋ그거 맞지
-드선생님 아니면 못하죠 암요
-ㅋㅋㅋ진짜 이건 고소미 먹어도 할 말 없다~ 이 마리야
악플러들은 순간의 기분에 취해 댓글을 달았겠지.
그 한순간을 해명하기 위해 드레젠은 팀 단위로 움직여야 했다.
음모와 의심, 그리고 분란이 쉽게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지르긴 쉽지만 치우는 데는 공을 들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제 유언비어는 모조리 팀에서 강경 대응 할 겁니다. 없어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무분별하게 퍼지지도 않겠죠.”
-그거 맞음
-봐주면 안 됨 그런 애들은;;
-진짜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지 인생한테 악플 좀 달려 봐야 정신 차리짘ㅋㅋ
엘프들의 사건도 끝을 맺었다.
마족들 역시 자신의 패 중 하나를 잃었다.
든든한 원군이 있었고, 이제 드레젠은 승리를 확신했다.
“생각보다 재능 있는 자들이 넘쳐요. 너무 흐뭇합니다.”
-그저 빛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허허 진짜 빛선생님ㅋㅋㅋㅋ
-질투 하나 없으시닼ㅋㅋ
자신 대신 궂은일들을 해 줄 사람들이었다.
더 쓸 만하게 키워 자신 대신 부려 먹을 생각만 가득했다.
사악한 생각은 꼭꼭 감춰 두는 것이 미덕이었다.
“한 건 끝냈군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번에도 그렇고, 대세 성주님은 그런 조력자들을 어디서 아신 겁니까?”
에드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건 엄청난 능력이었다.
이계의 군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능력이었다.
능력의 효용성뿐 아니라, 그걸 노리는 자들도 심심찮게 있을 거다.
“이 세계는 비밀이 많은 법이지. 난 그 비밀을 아는 사람 중 하나고.”
“…….”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때가 되면 모두 알게 될 테니까.”
에드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안다고 해서 바뀔 것도 없었고, 바꿀 힘도 없었다.
세계가 움직이는 이치인데, 일개 개인이 그걸 바꿀 수 있을 리가.
“그걸 알고 있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니야. 더 생각할 게 많아지고, 복잡하게 꼬아서 판단해야 하니까.”
“그도 그렇겠군요.”
“그러니 그냥 눈앞에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결하도록.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에드윈은 더는 같은 주제로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그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막힌 부분이 뚫렸는지,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일종의 깨달음.
“좋은 말씀이군요. 저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옆에서 샤페론이 허허 웃었다.
샤페론과 에드윈은 같이 어울려 수련도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아직 크리스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은 것 같지만.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키워야겠어.”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차피 엘프들의 정착도 도와줘야 하니까. 저들은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잡음이 많을 거다.”
“……하긴, 엘프 종족이 왔는데 귀족이든 뭐든 가만히 있는 것이 정상은 아니겠지요.”
가장 염려하던 부분이었다.
엘프의 미모는 인간과 급이 달랐다.
인간 중에서도 절세미인은 엘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건 10억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확률이었다.
반면 엘프는 지나가는 자들 모두가 절세미인, 혹은 절세미남이었다.
“노예상인들이 기승을 부리겠다마는, 가만둬선 안 되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용병들과 사냥꾼은 교활합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고 말 겁니다.”
“그렇게 하도록 두면 그게 성주인가? 내 이름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게 해 줘야지.”
드레젠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엘프들은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질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저 멀리, 장례를 치르기 위해 불이 밝혀진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앞으로 시끄러워지겠군.’
드레젠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의 길을 방해하는 자는 모조리 없애 버릴 것이다.
드레젠 본인이 겪은 평화의 길 중,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3
다음 날.
엘프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밤 새롭게 로드가 된 하이디엔이 선포한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터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인간들이 바로 옆에 있는 땅이지만, 은인이자 귀인인 드레젠이 사는 곳 옆이기도 하다.]
인간과 함께 산다니.
딱히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인간들이 과연 그들을 가만히 놔둘까?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어마어마한 잡음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하이디엔은 이사를 강행했다.
[엘프들은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다. 인간의 위협? 이곳에 서식하는 루푸스보다 훨씬 덜하다. 그곳이, 우리의 새로운 고향이다.]
루푸스는 웬만한 기사, 그리고 마법사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일단 나타났다 하면 성벽이 부서지는 건 일쑤였으니.
“얼른 짐 싸! 꽤 먼 거리가 될 거다! 그러니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간다!”
에일라가 시민들을 독려했다.
싱케루스에 사는 엘프는 백만이 넘어가는 숫자.
그들이 모두 한 달여를 이동해야 할 행군이었다.
“한 달이라니. 너무 긴데?”
“중간중간 드레젠이 인원을 수송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노약자들이고 다음에는 체력이 달리는 순으로.”
무식하게 한 달 내내 행군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융통성이라는 것을 아는 종족이었다.
드레젠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와이렉스라고 한들, 수백 번을 왔다 갔다 할 수 없었다.
“흠, 엘프들은 와이번이랑 이상하게 친했지.”
드레젠이 이사 준비를 하는 엘프들을 보며 뇌까렸다.
와이번.
그리고 엘프.
이 둘은 마족과의 전쟁 때도 혁혁한 공을 세운 콤비였다.
마침 서식지가 겹치고, 엘프와 와이번 모두 그의 밑에 있었다.
“와이번 기사단, 한번 만들어 봐야겠네요.”
-?!
-엘프로?
-진짜?
-와이번이라니!
그 누구도 드레젠에게 뭐라 할 자격은 없었다.
하시스 성 외부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서로 견제하고 있는 인간들과 손을 잡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시스 성은 철저하게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 주축은 바로 이종족들이었고.
“그럼 슬슬 와이렉스를 만나러 가 볼까요?”
새로운 동료도 맞이해야 하니까.
드레젠은 하이디엔을 만나러 걸음을 옮겼다.
출발하면 바로 지원을 와야 하니까.
“먼저 출발해서 준비하고 있겠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무리는 무슨.”
드레젠은 어깨를 으쓱한 후, 싱케루스를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하이디엔과 에일라는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엘프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뭘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서 볼 수 있겠는걸.’
하이디엔은 드레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러했으니까.
‘와이렉스, 들리나?’
[그래, 지금 막 친우를 깨운 참이다.]
드레이크, 와이번.
드래곤을 제외하면 하늘과 땅의 제왕인 몬스터.
와이렉스가 깨운 동료는 바다의 왕이라고 불리는 해룡, 씨-서펜트였다.
그것도 단순한 씨-서펜트가 아닌, 그들의 왕이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