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2화
162화 - 구원
#1
멜리젠.
그 거대한 괴수를 보았을 때, 수많은 유저들은 가슴에 불을 지폈다.
거대한 몬스터를 무기로 때려잡는 것.
RPG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반대로 멜리젠의 존재를 봤을 때 공포에 사로잡힌 자들이 있었다.
“우린 이제 다 죽을 거야.”
“아아, 성좌시여.”
바로 게임 속 주민들인 엘프들.
그들은 가상 세계에 살아가는 주민들이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과 달리, 이들의 목숨은 하나.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원을 넘어오신 분들이 구해 주실 거야. 저분이 우리들을 구원해 주실 거야.”
싱케루스 중심에서도 보이는 멜리젠의 몸체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였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에 들어가 피난을 준비할 정도였다.
다급한 사람들은 싱케루스 밖으로 슬슬 이동했다.
엘프들의 사활이 걸려 있는 사건이었다.
“설마 그 엘루도 님이.”
“제길! 대체 성좌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제발, 제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
성좌를 탓하며 불안감과 초조함을 분노로 표현하는 자.
믿고 있었던 엘루도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자 등등.
꽤 많은 수의 엘프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감정을 표현했다.
“전사님. 진짜 저자가 우릴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우리가 믿을 사람은 저들뿐이라는 거죠.”
전사들이라고 해서 감정이 마모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모두 공포를 느끼고, 감당할 수 없는 적에 대해서는 좌절감을 느꼈다.
가족, 친구에 대한 애정이 있는 자들이었기에 더욱 열심히 싸웠을 뿐.
그런 그들이 지금은 하릴없이 전투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더욱 감정을 부정적으로 짓눌렀다.
“저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우리를 지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십쇼.”
“-알겠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지키는 자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남는 것이 그것이었다.
#2
[이제 한계다! 계약자여, 이제 그만 놓아라!]
쿨럭-.
어질어질한 가운데, 로드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날뛰는 멜리젠은 정령왕 때문에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랑비가 계속 내리면 옷이 흠뻑 젖는다고 했던가.
끊임없이 몰려드는 유저들의 공격에, 멜리젠도 서서히 지쳐 가는 중이었다.
“절대, 절대 포기하면 안 될 때도 있는 걸세. 나의 친우여.”
“아버지! 제발 그만두세요! 저희가 끝내겠습니다!”
하이디엔은 강제로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려 했다.
하지만 로드는 굳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죽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딸아…… 로드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니라.”
“…….”
“저 괴물, 그리고 내 업보를 오롯이 내가 짊어질 수 있게 하거라.”
그녀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누가 제 아버지를 보내고 싶어 할까.
그녀가 창대를 단단히 움켜쥐고 로드의 앞을 지켰다.
서걱-!
하이디엔은 굳건히 앞을 지키며 정령왕의 기운에 이끌린 몬스터를 처리했다.
“내 앞을 지나가려거든, 영혼을 바쳐라!”
장판파의 장비처럼, 그녀는 굳건히 서서 모든 몬스터를 상대했다.
창끝에 실린 오러가 찬란하게 빛났다.
한편, 직접 멜리젠을 상대하고 있는 드레젠은 흐뭇하게 유저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쿠웅-!
하반신이 그를 노리고 땅을 찍었다.
하지만 드레젠은 여유롭게 피하며, 유연하게 공격을 이어 갔다.
“다들 잘 싸우네요. 얼른 끝내겠습니다.”
-농락 수준;;
-이제 보지도 않고 피하시네
-저러다 엘프 로드 죽으면 어떡하무ㅜ
-멜리젠 피통 보소
멜리젠은 거대한 생명체인 만큼, 생명력이 대단했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음에도 격렬한 움직임으로 유저들을 리타이어시켰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기였다.
엘프 로드에게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문제는 아직 그런 화력을 낼 수가 없다는 건데.’
아직 드레젠은 약했다.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기만하지 말라며 화를 내겠지만, 본인 기준에선 한참 모자란 출력이었다.
적어도 일격에 산 정도는 가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런 위력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그 퍼포먼스 이후로 자신에게 까부는 자들이 대폭 줄어든 것은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일격에 벤다.’
멜리젠의 약점은 너무나 멀었다.
하지만 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한배를 탈 동지들이었다.
최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고,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려서 돌아간다.
그것이 목표였다.
“후읍-.”
발에 오러를 집중하고,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펄럭-.
장막을 둘러 어그로를 최대한 분산시켰다.
엄청난 공세를 받고 있는 멜리젠이 자신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쥐새끼가 본인의 등에 올라탔느냐!]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멜리젠은 역시 멜리젠이었다.
그림자 장막을 뒤집어쓰고 달렸음에도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각종 저주 마법이 그에게 쏟아졌다.
맞으면 최소 즉사인 마법부터, 다양한 디버프가 걸린 마법까지.
하지만 드레젠에겐 흑뢰가 존재했다.
“마법은 저에게 통하지 않죠.”
파직-.
소심하게 피어난 흑뢰였지만, 그것에 닿는 모든 마법이 무로 흩어졌다.
디스펠 마법은 술식과 마나의 배열을 해석해야 하는 까다로움이 있었는데, 드레젠은 그걸 너무 손쉽게 해 버렸다.
쉴 새 없이 발을 놀려, 날개 뼈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정령왕! 시간을 벌어라!”
삐이이이익-!
정령왕이 그의 외침에 호응했다.
새의 날개에서, 광풍이 몰아쳤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주변을 휘말리지 않게 조절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의 기회라면야.
[이 건방진 새대가리가-!]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 이제 어미의 품으로 돌아가거라.]
광풍은 멜리젠만을 노려, 그의 팔을 묶었다.
머리 위로 달려가는 드레젠을 노릴 수 없도록 한 조치였다.
그 행동과 말을 끝으로, 정령왕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이런 개 같은 자식들이-!]
멜리젠이 발악했지만, 정령왕이었다.
정령왕의 힘을 가볍게 떨칠 수는 없었다.
끝없이 회전하는 회오리는 멜리젠의 팔을 묶었다.
그사이에 드레젠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 검은,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만들었네.
-자네의 일은 유감이야. 내 황궁에 있지 못했으니, 그대를 보살펴 줄 수 없었지.
-황궁은…… 지옥과 같은 곳이지. 다른 의미에서. 그러니 작은 사과의 의미라고 해도 좋네.
고통에 몸부림치던 나날이 끝나고 전장에 섰을 때.
3황자이자 대공이 했던 말이었다.
수많은 견제가 있었지만,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 왔던 3황자.
그가 드레젠에게 직접 지도한 검술의 비기 중 하나가 세상에 나왔다.
“3황자에게 감사해야겠군요.”
새하얀 오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거대한 적들을 분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의 결정체였다.
허나 비기라면, 그곳에 묘리가 더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비기의 원리는 간단했다.
“돌아라.”
키이이이잉-!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울렸다.
오러 블레이드가 회전하며, 주변에 오러를 흩뿌렸다.
회전력은 기본적으로 파괴력을 증폭한다.
그 형태가 찌르기라면, 그 효율은 배가된다.
[건방진 것들이이이이-! 너희들은 절대, 절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건 꿈일걸?”
드레젠은 사악하게 웃으며 등 뒤에서 오러를 방출했다.
콰앙-!
충격파가 하늘 위로 쏘아지며 구름을 흩어 놓았다.
그 반동으로 드레젠은 유성이 되어 떨어졌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마법을 응용한 비기였다.
-1서클 마법밖에 접목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위력은 꽤 발군이지.
-스파이럴 애로우라고 했던가? 마법은 참 오묘한 학문이야. 허허!
대공은 확실히 천재였다.
마검사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자이기도 했다.
수도 없이 많은 하이브가 그의 검술에 터져 나갔다.
오로지 거대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비기가, 드레젠의 손끝에서 다시 펼쳐졌다.
‘끝까지 함께했으면, 지금쯤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
드레젠이 문득 생각했다.
끔찍한 과거였지만, 사람의 감정은 끔찍함을 서서히 지우기 마련이었다.
만약 끝까지 남아, 대륙을 수호했다면.
그렇다면 과연 브락시아는 멸망하지 않았을까?
“죽어라-!”
그 답은 아마 이 게임의 끝에 있을 것이다.
드레젠은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꼭 그 결말을 보고 싶어졌다.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에에에에에-!]
퍼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멜리젠이 온갖 마법을 쏘아 내고, 팔을 들어 드레젠을 막으려 했다.
흑뢰가 피어나며 마법을 모조리 막았다.
드레젠은 몸에 걸리는 압력을 이를 악물고 받아 냈다.
한 방으로 멜리젠을 죽일 수만 있다면-!
[끄아아아아아아아-!]
황금빛 분수가 하늘을 뒤덮었다.
치이이이-!
보기엔 아름다웠지만, 나뭇잎이, 땅이, 돌이, 그리고 몬스터들이 타들어 갔다.
멜리젠의 상반신이 그대로 갈려 나갔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마지막 발악처럼 독이 되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마나를 둘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최대한 방벽을 세워!”
“마나 남은 사람들 곁으로 모여요!”
땅 위에 서 있는 유저들이 엘프들을 보호했다.
본능적으로 살 방법을 찾아, 이 땅에 사는 자들을 위해 방패가 되었다.
그들은 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날뛰던 하반신도 랭커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월드 보스 : 멜리젠이 죽었습니다.]
[참여한 모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멜리젠의 비늘 X 10]
[멜리젠의 뼈 X 5]
[멜리젠의 힘줄 X 7]
[멜리젠의…….]
무수한 보상이 들어왔다.
일반적인 보상도 진귀한 값어치를 지녔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월드 보스로서의 위용이 서지 않는 법.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공헌도에 따른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1. 드레젠 : 멜리젠의 하늘 심장]
[2. 가브리엘 메샤 : 멜리젠의 역린]
[3. 에치젠 아하시 : 멜리젠의 꼬리]
…….
순차적으로 10명에게 색다른 보상을 지급했다.
유명한 헌팅 액션 게임처럼, 완제품이 아닌 재료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하늘 심장은 드래곤 하트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장기였다.
드레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재료를 얻었군요. 후-, 엘프도 이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온몸을 짓누르는 탈력감이 멘트를 치기도 힘들게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뻐하는 유저들과 안도하는 엘프, 그리고 거멓게 죽어 버린 자연 경관이 보였다.
드레젠은 축하하는 유저들 사이를 지나쳐, 로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입가에 잔뜩 피를 흘리고, 하이디엔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로드.
승리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하이디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