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7화
157화 - 분열
#1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왔다.
베리드에게서 받은 감지기는 정말 완벽했다.
이 감지기를 설치한 이후부터는 그 누구도 허락 없이 성소에 들어오지 못했다.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감지기를 꺼야 하는데-. 그 이방인 놈들이 눈에 걸린단 말이지.’
아직까지 이상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성소 밑에 있는 것들을 모르고 있다는 것.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방인을 천천히 말려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가만. 이걸 이용한다면, 꽤 볼만해지겠군.”
성소 지하는 자신밖에 모르는 공간이었다.
준비가 될 동안, 이곳을 철저히 감추기만 한다면?
역으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이 죄악을 뒤집어씌울 수 있을 것이다.
“흐흐, 그렇게 해야겠군.”
그는 바쁘게 어디론가 향했다.
계획을 세웠으니 바람잡이가 필요했다.
교묘하게 소문을 퍼뜨릴 엘프들은 많고 많았다.
아직 드레젠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곧 알게 되겠지.
그가 무시무시한 인간이자, 재앙을 몰고 온다는 것을.
“넌 여기 온 것이 실수였다.”
엘루도의 입가가 비틀렸다.
선한 얼굴로 엘프들에게 안식을 주는 제사장이라기엔, 너무나 사악해 보였다.
#2
에일라는 드레젠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함께 이야기를 해 보니 꽤 순수한 면이 있었다.
특히 함께 외적을 방어한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말이 정말 잘 통했다.
전투를 하는 사람들끼리 이것저것 말을 주고받으니, 금방 말을 놓게 되었다.
“제사장이라, 그분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 그래도 불편한 자리에 계속 있을 순 없지 않겠어?”
에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장의 입김은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그가 불편해한다면, 드레젠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없을 터.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벌떡 일어섰다.
“좋아, 내가 힘 좀 써 보지.”
“으응?”
“그대는 자랑스러운 전사다.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 주기도 했지. 오늘은 루푸스의 수가 꽤 많은 날이었거든.”
엘프들은 오랜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에 배움 역시 느긋한 편이었다.
보통 50년 이상부터 무기술을 배우며, 100년이 되는 해에 전사로서 활동한다.
엘프 하나의 죽음은 100년이라는 시간이 날아가는 것과 동일했다.
에일라가 드레젠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대의 업적을 공표하지. 그렇다면 고깝게 보던 엘프들도 널 인정할 거다.”
“부담될 텐데.”
-입에 침은 바르셨어요?
-ㅋㅋㅋㅋㅋ연기가 아주ㅋㅋㅋㅋ
-진짜 알고 보니까 더 재밌자너
-이야 이렇게 사악할 수가;;
사탄도 형님으로 모실 정도였다.
에일라라는 강력한 우군이 생겼다.
엘프 장군!
부대를 통솔하는 위명은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제사장도 골치가 아프겠죠.”
거기다 장군을 따르는 엘프 병사들까지 그를 두둔하겠지.
병사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이 저런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곧이어 질문이 쇄도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강해진 겁니까?”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150세? 200세?”
“얘는, 인간들은 그렇게 많이 살지 않아.”
“에? 진짜-?!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고?!”
엘프들 역시 인간 못지않은 수다쟁이였다.
드레젠은 질문에 간간이 답해 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재잘재잘 떠드는 사이,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갔다.
“손질이 끝났으면 옮기자.”
“좋아! 오늘 저녁은 배 터지게 먹겠네!”
엘프들은 오전, 오후에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고 저녁에 고기를 섭취했다.
특히 루푸스를 잡은 날에는 다 같이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며 하루를 무사히 보낸다.
종족 전체의 결속을 단단히 다져 주는 의식이기도 했다.
웃고 떠들며 하루를 보낸 뒤에는 또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그럼 밑밥은 제대로 깔아 놨군요.”
드레젠은 병사들과 함께 도시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먼저 도착한 에일라가 루푸스의 가죽을 벗겨 경매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이건 자랑스러운 전사, 드레젠이 손수 잡은 가죽이다. 일격에 처리했기에 아주 깨끗하지!”
“오오-!”
“인간이 그렇게 했다고?!”
“어디 한번 보겠소.”
루푸스는 최고의 갑옷 재료였다.
거대한 늑대를 잡은 이에게 갑옷을 선물하는 것.
엘프 장인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장인들이 가죽을 감정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오오-, 근래에 보기 드문 최상품이군!”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 게야, 가죽에 아직도 생기가 돌지 않은가.”
“허허, 이 정도라면 명품이 나오겠군.”
좋은 갑옷은 좋은 재료에서 나온다.
거기에 장인의 손길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완벽한 갑옷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장인들이 탐낼 정도의 가죽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전사가 누구라고?”
“나도 한번 보고 싶소, 장군.”
에일라는 환하게 웃으며 저 멀리서 걸어오는 드레젠을 가리켰다.
“저기, 저 인간이 잡은 겁니다. 저와 호각을 다투거나 더 강한 인간입니다.”
“오오-! 인간이 어찌!”
“인간이라고?”
반응은 둘로 갈렸다.
엘프가 하지 못한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한 불신.
인간이 전사로서 가치를 증명했다는 것에 대한 찬사.
대부분의 장인은 드레젠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난 됐소. 인간에게 갑옷을 만들라니, 장인의 수치지.”
“쯧쯧, 저렇게 고여서 어떻게 제자를 키우려고.”
“놔두게. 그만의 고집이 있는 것이니까.”
장인들은 서로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문제는 이제 누가 드레젠에게 갑옷을 선물해 주느냐였다.
엘프들과 함께 다가온 드레젠이 입을 열었다.
“다들 반갑습니다.”
“전사여, 반갑네. 갑작스럽겠지만, 자네는 선택을 해야만 하네.”
드레젠 역시 알고 있었다.
엘프의 문화에 대해서는 꽤 빠삭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다 남으신 겁니까?”
“호-, 엘프의 문화에 대해서 알고 있구먼. 그래, 누가 자네의 갑옷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는가?”
“흠-.”
사실 드레젠은 갑옷이 더 필요 없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부탁하기 위해 가지고 다녔던 것을 꺼냈다.
그가 항상 검과 함께 매달고 다녔던 보자기를 풀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보여 주었다.
“혹시 이걸로 무기 하나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이건?”
“외계의 금속입니다만.”
그것은 눈티아를 잡고 나온 거대한 금속 덩어리였다.
베리드가 마왕 후보에게만 부여한다는 전설의 금속이기도 했다.
엘프 장인들이 눈을 빛냈다.
드워프도 뛰어난 장인이었지만, 엘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장인이 많았다.
‘나중엔 모두 죽게 되지만, 지금은 쟁쟁한 장인들이 많지.’
드레젠의 예상대로, 지금은 장인들도 많이 살아 있었다.
게다가 그들 중 몇몇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등을 돌렸다.
드레젠이 인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족에게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오오-, 이거 재밌는 금속이로군. 다루기도 꽤 힘들어 보이는데.”
“오랜만에 재밌는 물건을 봤군. 허허.”
“대검 하나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드레젠이 말했다.
장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달리, 엘프들은 좋은 재료를 대가로 지불할 수 있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돈에 연연하지 않았으니까.
“좋은 경험이 되겠군!”
“하지만 며칠 걸릴 것이네. 우리도 조금 연구를 해 봐야 하거든.”
“괜찮겠나?”
드레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림자 기사단이 있는 하시스 성은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철저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테니, 누가 침범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장인들이 반색하며 냉큼 재료를 가져갔다.
“그럼 잘됐군!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주지.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힘을 좀 합쳐야겠어.”
“허허! 좋군! 젊을 때 생각나는데?”
장인들은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홀연히 사라졌다.
다른 병사들이 손질한 고기를 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외쳤다.
“오늘, 새로이 전사가 된 드레젠이 잡은 고기입니다! 홀로 한 무리를 격퇴한 드레젠은 자신이 전사임을 당당히 증명했습니다!”
“이거 너무 띄워 주시는 거 아니야?”
“무얼. 이 정도는 기본이지. 자네는 마땅히 존경받을 업적을 세웠다.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도록.”
에일라가 밝게 웃으며 드레젠의 어깨를 두들겼다.
마을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그중에서 몇몇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어떤 자들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다.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한 번의 사냥으로 전사로 인정하다니요!”
“그렇습니다! 장군! 이건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에일라의 표정이 구겨졌다.
목소리를 크게 낸 자들 중, 몇몇을 알고 있었다.
제사장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드레젠의 말대로인가.’
이미 그녀는 드레젠의 말을 먼저 들었다.
제사장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과 그를 따르는 자들 역시 비슷하다는 내용.
먼저 들은 말이 있기에 곱게 보이지 않았다.
엘프들의 사회는 폐쇄적이다.
그렇다고 외부인을 배척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일용할 식량을 구해 준 은인이다. 그대들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한다면, 엘프의 법을 어기는 것과 같다. 안 그런가?”
“인간에게 엘프의 법을 적용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인간이 잡아 온 고기를 먹을 자격도 없겠군.”
에일라는 딱 잘라 말했다.
병사들 역시 동조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충분히 감명을 받았다.
드레젠을 모욕하는 것은 곧 자신들이 여태까지 해 왔던 일들을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그대들을 지켜 준 것이 누구인지 생각하라. 동포여.”
“그만-.”
떵-!
커다란 지팡이를 가진 엘프가 등장했다.
제사장 엘루도.
그가 노한 얼굴로 광장으로 걸어왔다.
“장군. 엘프들을 핍박하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 드레젠을 전사로 인정받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사장님.”
엘루도가 사정을 들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먼저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볼 수 있었다.
한 발자국 뒤에서 묘한 웃음을 띠고 있는 드레젠을.
‘빌어먹을 자식이-!’
당장 역정을 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드레젠은 영악했다.
머리를 굴릴 줄 알았고, 그걸 실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루푸스를 잡아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겠군. 하지만, 그 이상은 나서지 말아 줬으면 하네.”
“저도 깊게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드레젠은 선선히 웃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에일라와 병사들이 그를 감싸듯 섰다.
장군 에일라 역시 충분히 강한 세력이었다.
엘루도는 하는 수 없이 드레젠에게 축복을 내렸다.
‘어차피 시간이 걸리는 건 너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는 자신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분열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