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6화
156화 -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
#1
회의는 짧게 끝났다.
드레젠이 계획을 설명하는 것이 전부인 회의였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 필요가 없었다.
엘프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설마 모든 주민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사장이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엘프들 중에서도 타락한 자들이 있을 줄은-.’
실버문 단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엘프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꾸민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이디엔과 엘르엘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장, 저거 진짜요?”
“그래.”
“진짜, 싱케루스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래.”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었다.
싱케루스 외곽, 몬스터로 들끓는 곳에서 전투하며 살아가는 엘프들.
그들의 시체는 모두 자연으로 돌아간 줄만 알았다.
실상은 그게 아니라 제사장의 목적을 위해 시체를 숨긴 것이라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어찌 그런 짓을-.”
“그러니까 한 번에 확 몰아쳐야 해.”
제사장을 추종하는 세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저항도 생각해야 하니, 그들의 믿음을 한 번에 박살 낼 수 있어야 했다.
그 방법은 하이디엔이 생각해 두었다고 한다.
-기대된다
-얼른 이틀 뒤가 됐으면!
-통수의 시작이다ㅋㅋㅋ
엘프의 마을에서 벌어질 이벤트.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내용이었고, 월드 보스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멜리젠.
전 세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 월드 보스.
‘아마도 그걸 깨우기 위해 제물을 모으고 있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브락시아에서 시체를 모으는 이들은 셋 중 하나였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든지, 실험을 위해서 샘플을 수집하는 것.
마지막으로는 상위 생물을 소환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멜리젠에게 영양을 공급한 것도 제사장일 수 있겠군.”
“그게 정말이야?”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혹시 예배를 드릴 때 이상한 점은 없었나?”
엘프들이 고민해 보았다.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는 달에 한 번씩 있는 행사였다.
일종의 축제와도 같았는데, 성좌께 감사를 드리고 엘프끼리의 친목을 도모한다는 명목이었다.
예배가 끝난 후 이틀간, 엘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무적으로 휴일을 가졌다.
“이상하군.”
자연의 기운은 따로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항상 피로하지 않게 해 주었다.
수많은 엘프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피로하지 않으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더 넓은 범위까지 사냥을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나 쉬게 한다고?
“뭐가?”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면 좀 피곤해지고 그래?”
“어-, 우리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아이들이나 나이가 드신 분들은 그렇다고 하시던데?”
엘르엘라가 정답을 내놓았다.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성좌의 이름을 빌려 시답잖은 짓을 하고 있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라파엘이 신계에서 울고 있겠군. 자신의 이름을 이딴 곳에 팔아먹다니.”
“계획대로 할 거지?”
“그래. 잘 부탁한다.”
하이디엔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준비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드레젠과 샤페론, 에드윈도 각자 할 일이 있었다.
“너희들은 최대한 힘을 보충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드레젠은 방을 나섰다.
엘프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 심리전을 조금 펼쳐야 할 시간이었다.
#2
엘프들의 주식은 체소와 과일, 그리고 몬스터로 만든 고기였다.
자연에서 나는 육류를 섭취하지 않는 대신, 그들은 자신의 원수를 씹어 먹기로 결정했다.
선조들이 이어 온 그 전통을 대대손손 지켜 온 엘프들.
“어, 이방인. 안녕?”
“안녕하십니까.”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왔다.
드레젠 역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을 보더니, 엘프가 물었다.
“거긴 위험한데? 사냥터가 있는 방향이야.”
“놀고 있는 것도 찝찝해서, 손 좀 거들까 합니다.”
“오- 그래?”
엘프들에게 있어 사냥이란 식량을 얻는 신성한 작업이었다.
누구든지 사냥을 거든다면 진정한 전사로 인정받는다.
그걸 이용해서 이틀 동안 친분을 쌓을 생각이었다.
“엘프들은 사냥을 함께하는 자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일단 마을에 들어오는 데 성공하셨다면, 시도해 보세요.”
-오
-이거다
-이걸 공략으로 올려라~
-진짜 인생 꿀팁이넼ㅋㅋㅋ
이미 엘프 로망에 푹 빠져 있는 시청자들은 좋다고 난리였다.
문제는 이 몬스터들이 상당히 강력한 적이라는 것.
드레젠은 아니었지만, 엘프들과 친분을 다지겠다고 도전한 기사들이 많이 죽어 나갔던 전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먹고 사는 몬스터는 정말 강합니다. 적어도 홀로 오크 대전사 둘은 상대할 실력을 만들고 오세요.”
이 부근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을 외곽에는 거대한 성벽과 위장을 위한 결계가 쳐져 있었다.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은 특별한 기관을 가지고 있어, 결계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엘프들의 주식이기도 한 몬스터였다.
[크르르-.]
펜릴의 후손들이라고 여겨지는 거대 늑대들.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영토를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항상 싱케루스를 노리는 몬스터.
드레젠은 성벽 위로 훌쩍 올라갔다.
아파트 2층 높이 정도 될까?
“여긴 위험하다, 이방인.”
“모처럼 초대를 받았는데 놀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요.”
드레젠이 등 뒤에 매여 있는 대검을 꺼냈다.
때마침 펜리르의 자식들 : 루푸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검은 털.
전봇대만큼 거대하고 굵은 다리와 꽉 들어찬 근육들.
흉포함을 숨기지 않는 눈빛과 거대한 이빨까지.
“전투 준비!”
“질리지도 않고 오는군!”
-와 크네
-ㅋㅋㅋㅋㅋ오크 대전사 2마리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거의 성벽에 닿는데?!
-저걸 잡아야 하는 거야?
성벽과 맞먹는 높이의 거대 늑대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기세를 내뿜었다.
루푸스는 오우거도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크허어엉-!]
맨 뒤에 있는 대장이 울자, 무리들이 덮쳐 왔다.
엘프들 역시 활을 들고 맞섰다.
매일 쳐들어오는 루푸스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엘프들.
“쏴라! 맨 앞에부터 차근차근!”
성벽을 지키고 있는 엘프들 역시 녹록지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나를 잔뜩 머금은 화살이 루푸스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거대 늑대 몇 마리가 절명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수가 많은 거야?!”
“엄호 부탁합니다.”
드레젠은 검을 빙글 돌리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압도적인 마나가 주변을 장악했다.
루푸스들 역시 엘프들에서, 드레젠으로 시선을 옮겼다.
곁에 있던 엘프들도 순간적으로 연사를 멈출 정도였다.
“놀아 볼까요?”
루푸스는 멜리젠 때문에 멸종됐었다.
몇 마리만 잡아도 도시 전체가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나왔고, 단백질도 풍부하고 맛도 좋은 고기였다.
하지만 멜리젠이 한번 날뛰고 나니, 일대가 증발되면서 없어졌던 종이었다.
‘그때 엘프들이 정말 슬퍼했었는데.’
많은 엘프들이 루푸스가 멸종하자 탄식했다.
나름 애증의 관계랄까.
평소에는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막상 한쪽이 없어지니 그리워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일단 한 놈.”
지금은 싱케루스를 침공한 몬스터일 뿐.
엘프들과 이야기를 트기 위해선 한 번쯤 거들어야 했다.
드레젠의 검이 루푸스의 미간에 박혔다.
깨갱,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을 뒤집으며 절명한 루푸스.
드레젠은 오러를 발산할 것도 없이 깡충깡충 뛰어다니면서 검을 박아 넣었다.
“저런 방법을 쓴다니!”
“에, 엘프식 스텝?”
엘프들은 특유의 몸놀림을 극대화하기 위해, 특별한 스텝을 익혔다.
발끝에 마나를 집중시켜, 더 높이, 더 멀리 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엘프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의 스텝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느껴지는 기세 역시 마스터급이었기에.
“대, 대체 저런 자가 어디서 나타난 거야?”
“하이디엔 님의 친우라던데.”
“정말?”
어느새 엘프들은 활을 내리고 드레젠의 학살극을 지켜봤다.
사정거리 밖에 있으니 어차피 쏘지도 못했지만.
드레젠이 루푸스들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5분.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으로, 전투는 종료되었다.
“루푸스는 귀한 식량이자, 엘프들이 쓰는 갑옷까지 만들 수 있는 재료입니다.”
-오
-이제 이런 건 놀랍지도 않네
-ㅋㅋㅋㅋㅋ ㅇㅈ ㅇㅈ
-더한 것도 봐서 이건 뭐;;
-몸풀기도 안 되짘ㅋㅋㅋ
어느덧 시청자들의 눈이 훌쩍 높아져, 이 정도 전투는 전투로 쳐주지도 않았다.
감탄하고 있는 것은 저 뒤에 있는 엘프들뿐이었다.
드레젠은 루푸스의 꼬리를 모아 쥐고 질질 끌었다.
열 마리가 넘어가는 루푸스가 성벽 앞에 널브러졌다.
“이 정도면 한동안 식량 걱정은 없겠군요.”
“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엘프들을 도와주러 온 친구라고 생각하시면?”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엘프들은 과하게 맞이해 주었다.
루푸스들을 잡는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한 사람의 전사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한 마리도 힘들어하는 신입들과 달리, 드레젠은 한 무리를 전멸시켰다.
“왜 갑자기 도와주신 겁니까?”
“당신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인간들에게 엘프는 환상의 존재거든요.”
“솔직해서 좋네요. 제 이름은 에일라입니다. 부족하지만 장군직을 맡고 있습니다.”
“드레젠입니다. 저-기. 인간들이 사는 마을 중 한 곳의 작은 성주입니다.”
성주.
엘프들 역시 인간의 문화에 대해서 문외한은 아니었다.
한 성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드레젠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습격이 없다면, 친목이나 좀 다지고 싶군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뛰어난 전사에 대한 예우는 필수입니다. 오늘은 만찬을 먹을 수 있겠군요.”
-호감도가 이렇게 빨리 오른다고?
-이건 드레젠이니까 가능한 일인가;;
-우린 일단 저기까지 가는 게 고비임ㅋㅋㅋㅋ
-오늘 구덩이 도전했다가 아슬아슬하게 전멸함 ㅜㅜ 희망이 보인다!
시청자들의 부러움을 등에 업은 채, 드레젠은 본격적으로 친목을 트기 시작했다.
처음엔 군부의 사람들부터.
그들은 주민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는 이들이었다.
“호오, 제사장님이 그렇게 뛰어난 자였군요.”
“그렇습니다. 그가 기도하시는 날엔 농작물이 쑥쑥 자라는 기적까지 보여 주셨지요.”
“아픈 이들을 치료해 주시는 것도 그분이 제일 뛰어나답니다.”
에일라를 비롯한 병사들은 루푸스를 손질하며 연신 재잘거렸다.
대부분 엘프 마을에 대한 이야기였고, 드레젠이 궁금한 것을 물으면 성실하게 답해 주기도 했다.
생각 외로 제사장에 대한 평가는 후했다.
‘후하다 못해 거의 신도들이구만.’
이런 분위기가 결코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믿음이 강할수록 배신당했을 때의 분노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었으니.
드레젠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제사장님께선 제가 탐탁지 않으신가 봅니다.”
그의 한마디는, 아주 작은 실금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