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화
153화 - 비리 천국
#1
엘프들은 수뇌부를 제외하고 수평적인 구조를 띠고 있는 사회다.
로드 일가와 제사장을 제외하면 태생부터 좋은 직책을 타고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대부분 가업을 잇는다.
인간보다 유전자의 구분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드의 핏줄은 더욱 신성하게 여겼다.
“이곳에서 머물면 된다.”
“오- 제법 좋은데?”
“숲에서 사는 종족이라 허름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군요.”
벽돌과 나무로 꾸민 건물 내부는 모던함과 엘프들의 전통이 동시에 묻어났다.
엘프들은 나뭇가지에 앉아 죽은 나무로 조각하는 것을 즐겨 했는데, 그곳에 마법 처리를 하여 영구 보관할 수 있었다.
그런 장식들까지 여기저기 놓여 있자, 고급 주택을 보는 것 같았다.
-와, 이런 집도 괜찮은 듯
-난 되게 검소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넼ㅋㅋㅋ
-얘네들도 다 똑같구낰ㅋㅋ
엘프나 인간이나 사고방식이 비슷하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드레젠은 두 사람에게 여독을 풀게 한 다음, 밖을 바라봤다.
“저기가 성소입니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 사이로 삐죽 나와 있는 건물이 보였다.
마탑에 비견될, 아니 어쩌면 더 큰 구조물이었다.
그곳에 사는 생명체들은 하나같이 크기가 컸다.
저곳이 이곳, 수해의 중심부이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은 저곳을 지키기 위해 터를 잡았죠.”
싱케루스는 숲의 기운이 한데로 뭉쳐 뻗어 나가는 곳이었다.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고 자란 엘프들은 정령들과의 교감도 뛰어난 편이었다.
몇몇이 자신이 있는 건물을 흘끔흘끔 보는 것이 느껴졌다.
-저기에 그 딸내미가 있는 건가요?
-ㅋㅋㅋㅋ딸내미 뭐얔ㅋㅋㅋㅋ
-저기 안에 있을 듯ㅋㅋㅋ
“네. 맞습니다. 엘프들은 슬슬 농사가 안 되기 시작할 겁니다.”
멜리젠이 성장하기 위해 숲의 기운을 빨아먹기 시작한 것이 이즈음.
엘프들은 난데없는 가뭄에 시달리게 되었다.
주변을 탐색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녀석은 돌덩이의 형태로 잠이 들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있는 제사장이 은근히 은폐하는 것도 있었고.
현 로드이자 하이디엔의 아버지는 성군이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너무 믿는 성격이었다.
제사장.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
“제사장부터 한번 보러 가야겠군요.”
드레젠은 갑옷을 입은 채로 슬쩍 밖으로 나갔다.
슬슬 저녁이 되고 있었다.
마정석을 가공하여 만든 등이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단풍잎 이야기의 어떤 도시를 보는 기분이었다.
“엘프들의 밤은 빨리 찾아옵니다. 숲속에 살고 있으므로 낮은 아주 짧은 시간이죠.”
그래서 엘프들은 무척 부지런했다.
해가 지기 전에 자급자족할 물자들을 확보하고, 농사를 짓고, 사냥해서 마을로 돌아왔다.
제사장은 무얼 하느냐?
바로 숲의 기운을 통제하고, 성좌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성좌들과 소통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
제사장이라는 말은 이제 허울 좋은 감투일 뿐이었다.
처음 엘프들이 번성할 시기엔 라파엘을 비롯한 신족과 활발한 교류를 했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점점 자신만의 문화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성좌의 말을 등한시했다.
“성좌시여-.”
제사장은 마을 중앙에 있는 제단에서 기도를 올리곤 했다.
밤에 마을 외곽으로 나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기에, 마을 안에 제단을 만든 것.
여덟 쌍의 날개를 당당하게 펼치고 있는 라파엘의 신상 앞에서, 제사장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음? 자네는-.”
“하이디엔의 손님입니다. 마을이 궁금해서 돌아다니던 참이었습니다만.”
“그렇구려. 하지만 싱케루스는 이방인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다네.”
제사장은 딱 봐도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중이었다.
드레젠은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곤 걸음을 옮겼다.
“제 생각이 맞았군요. 엘프 중에서도 마족에게 협력하는 자들이 꽤 많은가 봅니다.”
마족과 무의 추종자.
그들은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어쩌면 브락시아뿐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도 위세를 떨치겠지.
드레젠의 주 무대는 브락시아였지만, 다른 곳도 가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허허;;
-그럼 눈티아가 죽었을 때 알았겠네요.
-ㅇㅇ 마족들이 정보 줬을 듯
-으아 빡세겠닼ㅋㅋ
쉽게 넘어가는 법은 절대 없었다.
제사장은 로드의 권한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성좌와 소통할 수 있는, 단 한 명이 바로 제사장이었으니 위세가 대단한 것도 당연했다.
“저자인가. 먹이가 제 발로 굴러들어 왔군.”
제사장 : 엘루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눈티아는 무식한 방법을 사용했다.
저런 자는 서서히 말려 죽여야 하는 법.
자신이 섬기고 있는 자들도 그런 방법을 추천했다.
‘마스터 이상의 무력이라…….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서 기발한 계획이 떠올랐다.
사람을 좋아하는 로드를 조금만 이용한다면, 아주 좋은 판이 만들어지리라.
“하이디엔, 그년도 없애 버릴 수 있겠군.”
스산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엘프 한 명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허허, 좋은 밤입니다. 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제사장님.”
그는 세상 누구보다 선한 얼굴을 하며 엘프를 배웅해 주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모든 엘프들이 그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싱케루스를 지키고 있는 것은 성좌의 축복이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엘루도는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물을 준비해야겠군.’
그가 기도하며 생각하는 것은, 엘프들의 안녕이 아니었다.
#2
드레젠은 싱케루스의 밤거리를 계속 거닐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성소 쪽이었다.
“일단 외곽부터 돌아봐야겠군요.”
-흥미진진ㅋㅋㅋ
-그림자 장막이 있으니 문제는 없지!
-사기 스킬ㅋㅋㅋㅋ
그림자 장막이 있으니 어딜 가든 들킬 염려는 없었다.
보통 집단생활에서 장악력을 얻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신뢰부터 얻는다.
다양한 방법이 있었지만, 모든 이가 자신을 우러러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말.
말에는 기묘한 힘이 있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외부의 적을 일부러 만들어서 조작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꽤 자주 쓰이는 방법이거든요.”
임진왜란이 적절한 예시였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난 후 일본.
들끓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전력을 모두 조선으로 돌렸다.
왜놈들은 그 혈기를 한마음, 한뜻으로 조선으로 집중했다.
-그거 자주 나오는 거임
-실제 서양에서도 많이 나왔지
-ㅋㅋㅋㅋ오래는 못 가던데
-그럼 제사장이 뭔가 주작하고 있다는 건가요?
드레젠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정황상 그렇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죠.”
조사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엘프뿐만이 아니었다.
드워프, 요정, 수인, 서리족까지.
각 종족에 심어져 있는 스파이들을 색출하는 것.
“스파이가 많을수록 허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파이들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얻어 내는 것.
그것이 지금 드레젠이 해야 할 일이었다.
평화로운 삶을 지향했지만, 마족들과 무의 추종자들이 날뛰고 있는 이상 영원한 평화는 없을 테니까.
-허점?
-뭔데요?
-아아, 이 스트리머는 전략 전술도 가르칩니다.
-ㅋㅋㅋㅋ군에서 써먹어도 될 듯ㅋㅋㅋ
이곳이라고 현대와 완전히 동떨어진 전략, 전술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대부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고, 활용할 수 있는 무기나 방법이 다른 것뿐이었다.
드레젠은 실제 군대에서 배웠던 지식을 적용해, 적들을 무찌른 적이 있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배웠던 것들을 써먹어 보세요. 꽤 재밌습니다.”
-흐흐
-좋다!
-아직 군필이 아니라ㅠㅜㅠ
-미필은 웁니다ㅜㅜ
밤 산책을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여유로운 시간이 어디 있을까.
드레젠은 시청자들과 함께 엘프에 대해서 떠들며 밤길을 거닐었다.
그러면서도 기감은 항상 넓게 퍼뜨려 놨다.
이곳은 적진이었으니.
‘음?’
그의 감각에 익숙한 기운이 잡혔다.
그 기운은 빠른 속도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자, 가볍게 뛰어오는 하이디엔과 엘르엘라가 보였다.
하이디엔은 그렇다 쳐도, 엘르엘라가?
“지금 어디 가는 건가?”
하이디엔이 물었다.
드레젠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성소에.”
“당신 미쳤어?!”
엘르엘라가 놀라서 조금 큰 소리를 냈다.
주변에 누군가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엘르엘라가 자기 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성소에 가려고? 거기 있는 자들은 보통내기가 아닌데.”
“상관없다. 적어도 내 은신을 감지하진 못할 거야.”
대답은 하이디엔에게서 들려왔다.
드레젠은 그림자 기사단이라는 조직에 속해 있다고 했다.
인류뿐만 아니라 세계의 균형을 지킨다고 했던가.
타 종족의 입장에서는 오만한 단체였다.
“제아무리 그림자 기사단이라도 성소의 감시망은 피해 갈 수 없을 거야. 저곳은 특수한 마법진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뭐?”
“나도 알고 있다고.”
‘실제로 성소에 들어가 보기도 했고.’
말이 성소지,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무도 못 들어온다는 성스러운 장소.
정말 좋은 실험 장소가 아닌가.
그렇기에 드레젠은 성소에 더욱 가고 싶었다.
“하이디엔, 아까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그래. 멜리젠인가 하는 녀석이 잠들어 있다고 했지.”
“그거 말고. 엘프 중 일부가 마족들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이야기.”
하이디엔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엘르엘라가 관심을 보였다.
마족이라면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베리드.
끔찍한 쇳덩어리로 이뤄져 있는 무생물체였다.
“마족? 지, 진짜?”
“조용히 좀 있어. 널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 왜! 혹시 몰라? 내 신기와 같은 궁술이 도움 될지?”
하이디엔은 어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궁금증이 일어났다.
진짜 마족들과 손을 잡은 이가 있는지.
베일에 싸여 있는 성소의 진짜 역할은 무엇인지.
‘거기다 멜리젠을 잡으면-.’
드레젠.
적어도 허튼 말을 할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도시의 주민들은 아직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지만 은연중에 느껴졌다.
“좋아. 어디 한번 가 보지. 만약 거짓이라면 단순히 추궁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날 한번 믿어 보라고.”
-오빠 믿지?
-ㅋㅋㅋㅋㅋ한 번만 믿어 보셔
-드레젠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얼른 믿으라구!
시청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궁금했다.
과연 엘프의 민낯이 어떤 모습일지.
세 사람은 천천히 성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