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화
146화 - 황궁에서
#1
수도 - 콘스텔라.
수도의 상공을 지키고 있는 그리폰 기사단은 오전부터 한 가지 전언을 받았다.
상공을 지키는 그리폰 기사단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요 몇 달 사이, 그들에게 있어 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나타났다.
[빼에엑-!]
“워워, 얘가 벌써부터 이러네? 진정 좀 해라!”
“으아아아-! 살려 줘어어어어-!”
그리폰 기사단장이나 황제가 봤으면 군기가 빠졌다고 할 장면들이 속출했다.
평소 얌전하고 말 이상으로 인간을 잘 따르던 그리폰이었다.
하지만 그놈만 나타났다 하면 그리폰들이 난리를 피워 댔다.
[빼에에엑-!]
그리폰들은 대열을 이탈하고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려 했다.
기수들은 거대한 창을 쥐고 있으랴, 그리폰을 통제하랴, 아주 죽을 맛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흉포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본래 새하얀 색이었지만, 태양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비늘을 가진 생명체가 빠르게 날아왔다.
“야, 저거 우리가 호위할 수 있겠냐?”
“호위는 무슨, 왜 그리폰이 와이번을 호위해야 해?”
그렇다.
그리폰 기사단이 오늘 맡은 임무는 와이렉스를 타고 오는 드레젠을 호위하는 것.
터무니없는 명령이었다.
제아무리 훈련을 받은 그리폰이라고 하지만, 와이번 앞에서는 통제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이었으니까.
“멀찍이 떨어져서 사고 안 나게 해라. 그게 최선인 것 같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이 가지고 있는 선택지 중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그리폰 기사단은 와이렉스가 방해받지 않고 황궁에 무사히 착지 하는 걸 도와주기로 했다.
멀리 퍼져, 감시 태세에 돌입했다.
[크오오오오오-!]
우렁찬 포효와 함께 새하얀 와이번이 수도 상공에 진입했다.
그리폰들이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기사들은 괜히 베테랑이 아니었다.
이 정도 거리에선 충분히 그리폰을 어르고 달랠 수 있었다.
“언제 봐도 박력 엄청나네.”
“그러게 말이다.”
쏜살같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 와이렉스는 그대로 황궁 기사단이 훈련할 때 쓰이는 연무장에 착지했다.
오늘 하루, 드레젠을 위해 통째로 비워 둔 자리였다.
드레젠은 와이렉스의 등에서 내리며 말했다.
“아마 사용인들이 와서 관리해 줄 거야. 깨끗하게 해 주는 거니까 불편하면 그냥 말로 해.”
[알았다. 그렇게 하지.]
-진짜 극한 직업일세
-악어 입속에 넣는 거랑 뭐가 달랔ㅋㅋㅋ
-그거보다 훨씬 쫄릴 듯ㄷㄷ
시청자들은 사용인들에게 연민을 보냈다.
훈련할 때 쓰이는 곳은 정말 넓었다.
한쪽에는 창고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훈련용 허수아비가 존재했다.
“……베타 테스트 때는 여기서 살았죠.”
그러고 보니, 여기도 참 추억인 장소였다.
항상 이곳에서 검성과 검을 휘두르고, 눈티아와 명상을 했었지.
드레젠은 옛 생각에 잠겨, 잠시 훈련장을 바라봤다.
-오오 그의 베타 테스트 시절은 과연?
-썰 좀 풀어 주세요 선생님ㅋㅋㅋㅋ
-으잌ㅋㅋ궁금하다 궁금해!
“그건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고 있지만, 생각나는 대로 또 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어서 오십시오. 드레젠 님. 하녀장 발바로사라고 합니다.”
단정한 옷차림.
핑크빛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내린 여인이 드레젠에게 다가왔다.
발바로사.
최강의 하녀장이라고 불리는 숨겨진 전사였다.
저 가녀려 보이는 여인이, 사실 소드 마스터라면 믿겠는가?
“드레젠입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이동하시죠.”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에서 입는 정장과 비슷하게 생긴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깔끔과 단정, 그 자체였다.
드레젠은 옛 생각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캠을 조정해, 황궁 곳곳을 비춰 주었다.
-와 황궁 클라스 보소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강남 한복판에 이런 부지가 있는 거 아녘ㅋㅋㅋ
-맞네;;
-와 진짜 멋있넼ㅋㅋㅋ
멋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드레젠 본인은 별 감흥이 없었지만, 처음 보는 자들은 반응이 전혀 달랐다.
황궁 내부는 대한민국 5성급 호텔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런저런 검문을 거쳐야 했다.
마나를 억제하는 팔찌를 차고, 모든 무기를 반납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드레젠은 순순히 검문에 응했다.
‘이것도 정말 하자가 많은 물건이니까.’
훗날 개량하긴 하지만, 그건 황태자가 암살 위협을 당했을 때 이후였다.
그것도 자신이 다 막아 냈던 일이었다.
도플갱어였던가.
마족들이 세작을 심어 놓는 사건이 있었다.
-오오
-와 이런 데서 사는 기분은 어떨까?
-진짜 지린다;;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경치였다.
수억에 달하는 제국민들 중에 황궁에 불려 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곳은 하녀 한 명도 허투루 뽑지 않는 곳이었다.
“끝났습니다. 이 팔찌는 다시 이곳에 오시기 전까지 벗으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드레젠도 발바로사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저렇게 단아하게 생겼지만, 그녀의 이명은 광녀, 미친년이었으니까.
간단하고도 철저한 검문이 끝나고, 드레젠은 드디어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예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다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시길.”
“…….”
발바로사가 눈을 치켜떴다.
그녀가 알기로 드레젠은 용병 출신.
황궁에서 쓰는 예법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레젠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화는 제가 입는 것이 아니기에 괜찮습니다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폐하께서 기다리신다면서요? 얼른 가시죠.”
“……알겠습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드레젠을 대전 앞에 세웠다.
쿵쿵-.
굳게 닫혀 있는 문의 손잡이를 이용해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폐하. 용병 드레젠이 도착했사옵니다.”
드드드드-.
어떠한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풍겨 오는 기운은 예사 기운이 아니었다.
드레젠은 당당하게 어깨를 쫙 폈다.
“들어오라.”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중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발바로사가 고개를 숙였고, 드레젠이 앞으로 걸어갔다.
정복을 입은 드레젠의 모습은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같았다.
“황제 폐하의 은혜를 먹고 사는 제국민, 드레젠이 인사 올립니다.”
수백, 수천 번을 연습했던 황궁의 예법.
주입식으로 때려 넣었지만,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동작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뒤에서 보고 있던 발바로사가 놀랄 정도였다.
“고개를 들라. 그대를 만나 기쁘군.”
드레젠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알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왼쪽 무릎을 꿇고, 같은 손을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 둔다.
이때 손은 자연스럽게 말아 쥐고, 절대 손가락을 펴거나 손바닥을 보여선 안 된다.
반대편 손은 주먹을 쥐고 땅을 짚으면 되며, 절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손을 옮겨선 안 된다.
‘지겹게도 했었지.’
황제의 얼굴은 그때와 똑같았다.
자신을 처음 봤을 때, 걱정이 많았던 그 얼굴과 정말 똑같았다.
결과적으론 좋은 황제였지.
상담도 많이 해 줬었고.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그래,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저자는.”
뿌득-.
순간적으로 드레젠의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 있었다.
인류의 희망이자, 브락시아의 사활을 쥐고 있었던 일곱 명의 영웅들.
그중 한 명인-.
“위험합니다. 성좌에 근접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호오, 그래?”
“그렇게 평가해 주시니 아주 영광이군요.”
드레젠이 씨익 웃었다.
황제와 옆에 있던 자는 그 모습을 보고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드레젠은 선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크메이지, 도리안 구스타프 님.”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드레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너는, 마법에 대한 재능이 없어.
-그래도 당하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해.
황제의 연인이자 그에게 마법적 지식을 가르쳐 주었던 자.
인류 최초로 9서클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
저 멀리, 동쪽 끝을 지키는 구스타프 백작 가문의 차녀.
“위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용병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정보도 많이 취급하기 때문이죠.”
자신과 더불어 황제의 옆에 설 수 있는 자 중 한 명이었으며, 마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자이기도 했다.
7서클 이상의 마법을 펑펑 날려 대는 도리안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포대였다.
“그렇구나. 기이한 힘을 많이 가지고 있네. 정말 흥미로워.”
“어쩌다 보니 기연을 여럿 얻어서 말입니다.”
그걸 기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자리는 드레젠을 포섭하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였으니.
“오늘은 그대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 줌과 함께 특별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하시스 성은 전략적 요충지이지, 하지만 하시스 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네. 그러니…….”
-뭘까?
-요새 하나 더 지으라는 건가?
-오오 심X티 가나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숲을 밀어 버리고, 그대만의 영지를 세우라.”
[퀘스트 발생]
[황제는 인류의 견고함과 부흥을 원한다. 그대에게 내려온 임무는 몬스터가 들끓는 숲을 점령하는 것. 파베론 산맥의 수해를 점령하여 새로운 전진 기지를 마련하길 바란다. 몬스터를 몰아내고 인류의 영토를 넓혀라.]
[보상 : ???]
“명을 받들겠습니다.”
때마침 좋은 명분이 생겼다.
지금 하시스 성의 전력으로는 숲을 밀어 버린다 해도 절대 점령하고 다스릴 수 없었다.
적어도 인근 영지의 도움을 받거나, 새롭게 유입이 될 주민이 필요했다.
지금 드레젠의 계획과도 아주 부합하는 조건이지 않은가.
“또한, 그대에게 ‘케이드’라는 성을 내리며, 백작 위를 하사한다.”
-???
-갑자기 백작이라고?
-아니 이게 말이 되냨ㅋㅋㅋㅋ
-와 백작이면 어마어마한디;;
백작!
드레젠 역시 놀란 처사였다.
브레이시스 제국에서의 백작은 현대로 따지자면 장군이었다.
백작은 전쟁이 났을 때 군의 통솔권을 갖는 귀족이었다.
“그대는 충분히 제국의 검이 될 자격이 있다. 범람을 막아 낸 것도 그대라지? 또한 얼마 전, 귀족들의 비리를 알아낸 것도 자네라고 하더군.”
“우연입니다만.”
“허허, 겸양은 되었네. 백작 위를 증명하는 패는 이미 준비해 두었네. 이후 작은 파티가 있을 터이니 즐기다 가시게.”
드레젠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약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