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화
145화 - 황제의 부름
#1
집무실에 앉아 있는 드레젠은 아그네스와 샤페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드레젠은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때부터였군.’
용사, 그리고 영웅.
그 거대한 프로젝트는 여기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제야 그림이 어느 정도 맞춰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도 성큼 다가오리라.
‘그렇다면 이곳에도 영웅들은 존재한다는 이야긴데.’
대현자.
검성.
그림자의 왕.
철혈의 방패.
아크메이지.
갓 핸드.
마지막으로 데스 킹.
‘그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던 거지.’
영웅은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영웅이 탄생할 수 없었다.
검성 - 프리크 파르젠 공작의 토벌전도 이쯤이었다고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요즘 영웅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먼저 소집하실 겁니까?”
“영웅이라…… 난 그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아.”
그들도 자신과 똑같이 감정을 가진 연놈들이었다.
문득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과연 그 프로젝트가 실재한다면,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 이곳으로 소환될까?
그의 안색이 냉막하게 굳었다.
“…….”
샤페론과 아그네스.
둘 다 드레젠의 표정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뿜어 대는 압박감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럼…….”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마족들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힘부터 합쳐야 하거든.”
건방진 엘프족, 작업광인 드워프.
거대한 행상인을 자처하고 있는 수인족과 지금쯤 북방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서리족.
사라미스 지대에 있는 인간들과, 저 멀리 스텔라 신성 왕국의 성기사들.
브락시아 너머, 아르게논 대륙 어딘가에서 숨어 있을 요정족과 사브리아스 대륙에 기거하고 있는 인간들까지.
“황궁은 안 들르실 겁니까?”
“그쪽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널렸거든. 다른 대륙으로 떠나면 황제도 어찌하지 못할 것 같은데…… 아닌가?”
아그네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기껏 성을 빼앗아 놓고는 성에 틀어박혀 있는 꼴을 보지 못했으니.
이 정도면 바지 사장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곳 사람들은 성주님이 안 계시면 불안해할 거랍니다.”
“그래서 대비하고 가려고. 황제는 뭐…… 아쉬우면 자기가 찾아오겠지.”
-저번에 기사단장이랑 약속했잖아요
-맞넼ㅋㅋㅋ
-저번에 약속해서 가야 한다~
-허허 이건 빼박이자너ㅋㅋㅋㅋ
“아.”
정작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 슬슬 황제의 초대가 올 때가 되었지.
드레젠은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황궁 근처까지 관여가 되어 있는 것 같다고?”
“네. 그들도 정확한 정보는 잘 모르더군요.”
황궁.
드레젠도 용사 시절 별로 추억이 없던 곳이었다.
황궁은 그야말로 숙소였다.
하루에서 이틀 정도 쉬고, 곧바로 전쟁에 투입되었다.
1년 365일 중에 3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전장에 있었으니.
“거긴 별로 가기 싫은데.”
“미지의 공간인 만큼, 조사는 꼭 필요하죠.”
그림자 기사단도 자세히 조사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드레젠 본인은 연구실, 훈련장, 숙소, 식당, 대전 정도밖엔 알지 못했다.
그래, 한 번쯤 탐지를 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 그럼 초대에 응해 볼까?”
“좋은 생각이에요. 호호. 저도 위도우 그레인을 보러 가야겠군요.”
아그네스도 슬슬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위도우 그레인은 다크몬드의 수장이었지만, 따스한 남자였다.
강한 것은 드레젠이었지만, 남자로서는 그가 더 나으리라.
드레젠은 회의를 하며, 종이에 무언가를 슥슥 휘갈겼다.
“샤페론.”
“예.”
“모집 공고다. 각 거리마다 붙이도록.”
하시스 성에는 아직 많은 자들이 사는 중이었다.
그들 중에서 뜻을 품은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브락시아 대륙의 모든 인구를 합치면 대략 100억 정도.
그만큼 규모도 크고 인구도 많았다.
“병사들을 새로 모집하시는 겁니까?”
“그래. 특히 이번엔 소년병 위주로 모집할 거야.”
“소년……병요?”
물음은 아그네스에게서 나왔다.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엄청난 지식과 그 지식을 실현할 수 있는 물자가 있었다.
마족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을 키우기 위해선 이제 갓 성인이 된 자들로는 부족했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육성해 놔야 해.’
물론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비인도적인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를테면…… 크리스와 같은 포지션이었으니까.
“후계자들도 육성해야 하니까.”
“아, 그거라면.”
“나만 강해선 무의 추종자들을 막을 수 없어.”
적어도 대성한 크리스와 같은 이가 열 명은 필요했다.
드레젠은 샤페론에게 문서를 건네주고 창밖을 바라봤다.
슬슬 골렘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을 테지.
오늘, 늦으면 내일.
손님들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2
장례식에서 울려 퍼지는 장송곡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드레젠은 멍하니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은, 아무리 게임이라도 몰입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슬프다 ㅜㅜ
-장송곡만 따로 편집해서 올려 주세요!
-이거 듣다가 울어벌임ㅜ
장례를 치르거나 해서 숙연해질 때면, 채팅 창 역시 고요로 물들었다.
드레젠은 불을 보는 걸 그만하고 참여한 이들을 눈에 새겼다.
이러나저러나 그가 살리고, 데려가야 할 사람들이었으니까.
‘저 아이는…….’
그러다 문득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꼬마를 발견했다.
이름이 록시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긴 지났는지, 훌쩍 커 버린 모습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마나의 자질이 꽤 괜찮았던 아이였지.
홀로 생각하고 있을 때, 눈을 뜬 록시와 시선이 마주쳤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꾸벅 인사를 하며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는 록시.
드레젠은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세금으로 환전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였다.
지금도 궁극적인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열심히 움직여야겠는걸.’
용사 시절에야, 여기저기 끌려 다니느라 이런 여유는 없었다.
수련이란 이름을 빙자한 고문.
무기질 덩어리들과의 전투.
온갖 정치질에만 휘둘렸으니까.
“자동 진행 켜겠습니다.”
드레젠은 많은 생각을 안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자동 진행을 켜 두었다.
날이 밝자마자, 그는 손님을 맞이해야만 했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 눈앞에 서 있었다.
“하하! 오랜만이로군!”
“……기사단장님? 아니 이게 다 무슨……. 황궁은 누가 지킵니까?”
멀대같이 크고, 천하장사처럼 우람한 자들이 빽빽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앞에는 거대한 방패를 뒤로 메고 있는 사내,
고드먼이 있었다.
“황궁의 저력을 무시하지 말게나. 자네를 특별하게 모시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네.”
“올 것이 오긴 왔군요.”
고드먼은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였다.
시청자들에게 황궁을 소개해 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으니까.
고드먼은 드레젠에게 황제의 서신을 보여 주었다.
“드레젠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으라!”
“……기꺼이.”
드레젠은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귀공자들도 이렇게까지 완벽한 선을 그리진 못할 것.
지켜보고 있던 자들 역시 내심 감탄하며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이 자리에서, 고드먼만이 황제 대리가 되어 서신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들끓는 악을 처단하고 다녔던 자네의 위명은 익히 들은바. 한낱 용병의 신분으로 있기엔 너무 아까운 자로다. 하여 짐이 그대에게 적당한 작위를 내리려 한다! 그대는 지엄한 제국의 태양을 받들어, 충신이 될지어다.”
“……명, 받들겠습니다.”
작위를 얻어서 나쁠 것은 없다.
자작이라면 정말 좋고, 남작이라도 괜찮았다.
어딜 가나 명성과 지위는 좋은 위치에 서는 것을 허락했으니까.
브락시아라고 다를 건 없었다.
“좋군! 그럼 당장 출발하지! 황궁까지 어떻게 갈 셈인가?”
[크아아아아-!]
때마침 첨탑에 앉아 있던 와이렉스가 크게 포효했다.
드레젠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씩 웃었다.
그에겐 훌륭한 비행기가 있었으니, 따로 말은 필요 없었다.
“허허…….”
고드먼은 그의 와이렉스를 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드레젠만의 상징.
와이렉스가 날개를 활짝 폈다.
“저는 이걸로 갈 건데, 같이 가실 겁니까?”
[무거운 녀석들은 사양이다. 주인.]
와이렉스가 투덜거리는 것을 끝으로, 드레젠은 황궁으로 출발했다.
#3
“……정말 바람 같은 분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샤페론과 이졸데가 나란히 앉아 와이렉스를 바라봤다.
오전, 드레젠은 샤페론에게 업무 사항을 지시했다.
그는 아이젠하트와 더불어 훈련 교관으로서의 일도 겸해야 했다.
집사는 그냥 따로 뽑기로 했다.
“샤페론 경은 어쩌다 성주님을 따르게 되셨어요?”
“제 잃어버린 마나를 되찾게 해 주셨죠.”
“와, 그런 게 진짜 가능한가요?”
샤페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잃은 자를 복원하는 것은 마탑에서도 중대한 일로 치부될 정도였다.
불치병 이상의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마나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샤페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 평생을 바쳐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성주님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저도 그래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끝까지 믿어 주신 건 성주님뿐이었으니까요.”
“정말 놀랐습니다. 그런 골렘을 만들 줄이야……. 생명 부담은 없는 겁니까?”
이졸데는 후유증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현대였다면 외상 후 스트레스로 엄청 고생했을 테지만, 이곳에는 마법이란 학문이 존재했다.
정신적인 후유증을 치료하는 마법은 얼마든지 발달해 있었다.
“네에, 쇼크로 죽을 수도 있지만 저도 버텨 냈으니까요. 앞으로 더 강도 높은 골렘을 개발하면 훨씬 나아질 거예요.”
“골렘 파일럿이라니. 세상이 변해 가고 있군요.”
어쩌면 기사들이 설 자리를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골렘은 단가도 비쌌고, 오러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극한의 물리력이 필요한 곳에만 쓰이는 수준이었으니, 결국엔 기사들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정말 고마우신 분이에요.”
“동감입니다.”
샤페론은 자리에서 일어서, 드레젠이 처리한 일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졸데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신청자가 꽤 들어왔을 겁니다.”
“아, 네. 고생하세요.”
이졸데가 일어서려 했지만, 샤페론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녀가 멀뚱히 샤페론을 쳐다봤다.
그는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는 훌쩍 떠났다.
샤페론은 그대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4
훈련장.
그 앞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공고가 걸리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아이였다.
그 아이의 오른손엔, 은화 하나가 꼭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