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4화
144화 - 오랜만에 찾아온
#1
콰우우우우-!
마나가 한꺼번에 이동하면, 자연 현상 역시 조금씩 바뀐다.
바람이 갑자기 많이 분다든가, 구름이 확 몰려온다든가 하는 현상이었다.
새하얗게 솟아오른 기둥을 중심으로, 바람과 구름이 모였다.
-허허;;
-진짜 저게 뭐얔ㅋㅋㅋ
-저런 건 마나통이 얼마나 필요하나요?
-?? 근데 마나는 별로 안 줄어들었는데?
-엥? 그러네?
실제로 마나 소비량은 생각보다 적었다.
다만 주변에 있는 마나를 느끼고, 컨트롤할 수 있어야 완성할 수 있는 검술이었다.
[크오오오오오-!]
드래곤이 바로 드레젠을 포착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숙적을 바라본 것.
드레젠은 하늘로 솟아올라, 드래곤과 정면 승부를 펼치기 위해 검을 내려쳤다.
“으랏차아아아-!”
-아니 기합 소리 무엇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으랏차 뭐냐곸ㅋㅋㅋㅋㅋ
-으랏차!(드래곤을 가르며)
콰드드드득-!
제어가 제대로 안 되는 드래곤 정도야, 오러 블레이드로 충분히 썰어 낼 수 있었다.
흑마법사가 잔뜩 주입한 마나가 신성력과 맞붙었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압력이었다.
‘살짝 파괴력이 모자란데-.’
낙하할 때의 힘까지 받았지만, 살짝 힘이 모자랐다.
그 모자란 힘을 메울 수 있는 틈이 필요했다.
“이졸데-!”
시선을 슬쩍 돌리니, 골렘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어차피 골렘이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콰드득-!
마지막 하나 남은 손으로, 드래곤의 뼈만 남은 갈빗대를 잡아 부숴 버린 골렘.
[크어아아아-!]
틈은 확실히 만들어졌다.
팽팽한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콰자자자작-!
드레젠이 드래곤의 머리를 쪼갰다.
그렇다고 죽는 건 아니었으니, 더 깊은 곳까지 쭈욱 내려갔다.
“아, 안 돼!”
“드래곤이…… 드래곤이이이이이이!”
끝까지 남아 있던 흑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역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니까.
힘들게 그린 모나리자가 찢어지는 걸 보면, 루브르 박물관을 관리하던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대충 그런 심정이었다.
“이제 당신들 역할은 끝인가요?”
“헉?!”
“정말 지독하군요. 이 정도까지 집념으로 뭉쳐 있을 줄이야.”
그녀는 가지고 온 주사기를 꺼냈다.
예전, 드레젠이 썼던 자백제였다.
“컥!”
“시간이 없습니다~. 얼른 묻는 말에 대답해 주세요?”
인자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녀가 취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살벌했다.
생명이나 인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와 앞으로의 일일 뿐.
“으…….”
“우리는…… 명령을 받았다.”
드레젠에게 전달해 줄 소중한 정보였다.
드래곤이 먼지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드레젠. 당신이란 사람은…… 알 수가 없군요.’
괴물 같은 전투력.
냉철한 상황 판단과 적절할 때 등장하는 것까지.
그야말로 영웅의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푸스스스-.
드래곤이 다시 땅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우…… 어쨌든 끝났군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몬스터들을 바라봤다.
이번 사건을 해결한 1등 공신은 드레젠도, 자신도 아니었다.
바로 골렘.
압도적인 효능을 자랑한 스톤 골렘 한 기였다.
#2
-끝났다!
-한 방이넼ㅋㅋㅋㅋ
-와 근데 골렘 결국 완성한 듯ㅋㅋㅋㅋ
-과학자들 어쩌냨ㅋㅋㅋㅋ
잊힐 뻔했던 내기를 언급하는 시청자들.
드레젠은 가루가 된 드래곤의 잔해 위에 걸터앉아 피식 웃었다.
골렘의 완성은 예견되어 있던 일이었다.
“잘됐군요. 증명까지 철저하게 됐으니.”
-ㅋㅋㅋㅋㅋ
-(축)노예 계약!
그동안 이졸데를 무시했던 연구원들의 콧대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납작해지다 못해, 얼굴 안으로 함몰되었을지도 모르지.
낄낄대던 드레젠이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아그네스가 숲속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중이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같은 단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 단원 아닌데?”
아그네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결국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괜찮았다.
‘하긴…… 그림자 기사단이 되었다면 이곳에 오지 못했겠지.’
아그네스가 홀로 생각하고 있을 때, 나머지 단원들이 그녀의 옆에 등장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들이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그녀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드레젠이 시련을 치를 때 빼고는 계속 조사만 하고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누님 눈 동그래지넼ㅋㅋ
-으악! 누나 나 죽어!!!
-진짜 내 이상형이다ㅜㅜ
-완전 귀여우시다ㅜㅜ
시청자들도 그녀의 표정을 보고 칭찬 일색이었다.
오죽하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다크몬드에 들어가는 플레이어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까.
궁금증에 휩싸인 그녀를 바라보며 오베론이 입을 열었다.
“우리, 그림자 기사단의 새로운 단장이다.”
“……네에-?!”
막내에서 단숨에 단장까지.
씨익 웃고 있는 드레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아그네스였다.
#3
사건이 일단락되었고, 전투 상황이 해제되었다.
꽤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전투가 일어난 후에는 항상 승리의 기쁨과 깊은 상실감이 뒤따랐다.
드레젠은 오늘도 합동 장례식을 열 생각이었다.
“장례식도 그만 열고 싶네요.”
-ㅠ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ㅜㅜ
-게임이지만 슬프잖어ㅜㅜ
-눈물 질질 짠다 또ㅜㅜ
합동 장례식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장례식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드레젠의 바람이었다.
‘이제 슬슬…….’
크리스도 착실하게 커 나가고 있었고, 이졸데가 만들어 낸 골렘도 톡톡히 실전을 치렀다.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은화를 주었던 꼬맹이가 생각났다.
그 아이도 아버지를 잃었었지.
슬슬 병력을 충원할 때가 되었다.
“병력을 충원해야겠군요. 크리스의 동료들도 좀 만들어 줄 겸.”
-소년병?
-설마 징병제는 아니겠죠?
-징병제는 좀 ㅜㅜ
“물론 징병제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소년병들은 최정예로 뽑을 생각입니다. 진짜 병력은 다른 곳에서 차출할 예정이에요.”
생각해 둔 바는 있었다.
일단 북쪽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서리족.
또 브레이시스 제국 너머, 서쪽 끝에 있는 대수림에 살고 있는 엘프족.
남쪽 끝, 또 하나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드워프와 수인.
“차출할 군인들은 많습니다. 각지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 좀 문제이긴 하지만.”
-오오!
-막 그런 건가? 유물을 얻으면 막 나오는?
-오오 숨겨진 옛 병사!
“비슷한 것도 있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각 종족의 은인이 되어서, 로드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아직 시기는 일렀지만, 위기야 언제든지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왜 위기가 터지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워프와 수인 종족이야 관문을 해결하면 그만이었고, 엘프는 근처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을 사냥해야 했다.
“잠시 내정을 다지고, 새로운 모험을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좋다!
-일단 주변부터 정리해야 할 듯
-와 진짜 전쟁 한번 터지면 난장판 되는 거 싫다ㅜㅜ
당장 박진감 넘치게 싸울 때도 위험했지만, 뒷수습은 더 힘든 일이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한 상태에서 싸우고 무슨 힘이 남아 있겠는가.
그 상태에서 벽돌도 나르고, 죽은 동료의 시신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돌봐야 했다.
PTSD가 와도 이상할 게 없을 환경이었다.
“우리야 그나마 게임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으니 망정이지, NPC들은 힘들 겁니다.”
-ㄹㅇ ㅠㅠ
-진짜 힘들 듯
-맞아 힘들어 힘들어 ㅜㅜ
전투 후의 케어를 얼마나 잘하느냐도 큰 숙제였다.
성주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으며, 앞으로도 적절하게 해야 할 역할이었다.
드레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활약했던 이들 중에서 단연 일등 공신은 이졸데와 골렘이었다.
“상을 주러 가야겠군요.”
아마 이졸데는 골렘 조종의 후유증으로 뻗어 있을 것이다.
드레젠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연구실로 향했다.
“이졸데! 괜찮냐?”
“……으으, 성주님.”
“성주님 오셨습니까?!”
연구원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그들 역시 골렘의 활약상을 똑똑히 지켜봤다.
그리고 문득 계약서에 사인했던 일도 생각났다.
철저하게 잘 보이기 위해 굽신거리는 연구원들을 바라보며, 드레젠이 웃었다.
“고생했네. 자네들도. 계약은 다들 기억하지?”
“네, 네…… 그럼요.”
“펴, 평생을 바쳐서 일하겠습니다!”
까놓고 보자면 이졸데의 조수로 평생 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물론 성에서 기초적인 생활비는 지급해 줄 생각이었다.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고생했다. 덕분에 큰일을 막았어.”
“하하…… 제가 성공한 거 맞죠?”
“그래. 후유증이 조금 있을 거야. 케어 마법을 좀 받으면 나아질 거다.”
“으으…… 아직도 온몸이 박살 난 것 같아요.”
이졸데는 마법진 밖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본래라면 병실로 호송해야 하지만, 함부로 만졌다간 큰일 날 수 있었다.
드레젠이 가볍게 치유 마법을 걸었다.
“……마법도 하실 수 있었어요?”
“간단한 수준이지만. 실생활에서 쓰이는 정도야.”
“으윽, 단점도 있네요. 맞으면 엄청 아파요. 신체가 손상되는 건 아니지만…….”
당연했다.
링크란 그런 마법이었다.
정신적 대미지를 받는 대신, 더욱 정교한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마법.
골렘의 핵에 링크 마법을 내장한 것만으로 이렇게 변화했다.
“지금은 푹 쉬고, 저기 공짜 노예들 있으니까 마음껏 부려 먹어.”
“네에.”
“곧 마탑이 또 찾아올 거다. 대답 잘하고. 시험용 하나 더 만들 수 있지?”
이졸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으니, 느긋하게 즐길 생각이었다.
-계속 부려 먹는 거 봨ㅋㅋㅋㅋ
-으잌ㅋㅋㅋㅋ극한 직업이네 진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곸ㅋㅋㅋ
이졸데는 녹초가 된 채 누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지막지한 고통이 뒤따를 텐데도 좋다고 실실 웃고 있었다.
드레젠 역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비식, 웃음을 던졌다.
고통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얻어 냈기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뒤처리를 해야지? 연구원들은 다 집합해.”
“네, 넵!”
드레젠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거처부터 시작해서 새롭게 들이닥칠 적들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다.
할 일은 많았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럼, 우리는 한 가지 공고를 냅시다.”
드레젠은 연구원들에게 엄청난 일거리를 떠맡긴 후,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 게임의 대부분은 내정과 티키타카 위주의 내용일 것이다.
오랜만에 겪는 소소한 일상이었다.
절대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