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화
139화 - 과거의 인연
#1
하루의 방송이 끝난 후, 강일은 기지개를 켜며 마나를 확인했다.
아직 뭔가를 할 수 있는 마나는 아니었다.
만약 강일이 게임 캐릭터였다면 10에서 15 정도 되는 마나양.
그래도 지속적으로 소모가 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어머니도 깨워야겠다.”
어머니.
아직도 사경을 해매고 계신 분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 상태를 보고 있었지만, 호전되진 않았다.
병원비가 충분하다고 해도, 깨어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이제 슬슬 원천도 흡수해야 하니까.’
앞서 말했듯 생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마나가 필요했다.
원천은 끊임없는 마나를 생성한다.
그 마나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문제는 없으리라.
지금까지 어머니를 깨우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어머니를 다시 이 반지하로 데려오기 싫었으니까.
“그러니 열심히 해야지.”
짝!
손뼉을 강하게 친 후,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팀이 구성된 만큼, 방송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편하기도 했다.
정산일이 얼마 남지 않아, 괜스레 가슴이 떨렸다.
프로 리그 개막전도 일주일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하이디엔도 고생하겠군.’
지금 그녀는 유럽 전역을 돌고 있었다.
각국의 프로 리그를 직접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기사 따위를 확인하고 있자니, 시간이 벌써 자정이 넘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먹을 것이 떨어졌다.
편의점에 가서 먹거리를 사 올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몸이 으스스 떨릴 정도의 추위였다.
올해는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릴 거라던 일기 예보가 생각났다.
브락시아와는 전혀 다른 기후를 느끼는 것도 나름 좋은 기분이었다.
“어서 오세요.”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 그가 일했던 편의점이었다.
이렇게 손님으로 들어온 적은 정말 오래간만이라 꽤 색다른 기분이 느껴졌다.
요즘도 새벽에 물건이 들어오나?
‘그대로네.’
이제는 폐기를 집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은근히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카드에 잔고도 넉넉하겠다, 간단히 물을 부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골랐다.
컵라면만 먹고 살았던 옛날과 비하면, 정말 진수성찬이었다.
장바구니 그득하게 물건을 담고 있을 때, 익숙한 콧노래가 들렸다.
“흠흠~♪ 이것도 맛있겠네.”
“……계산요.”
“……음?”
계산을 마치고 다시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다 했더니, 과거의 인연이 있었던 자였다.
그 작은 인연이 지금도 이어져 있다고 봐야겠지.
일방적인 것이었는데, 이젠 아니게 되었다.
“그…… 드레젠 님?”
맑고 고운 목소리가 떨렸다.
강일은 잠시 고민했다.
무시하고 갈까?
아니면…….
“다,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 안 할게요. 어…… 그냥 반가워서 인사하려고 불렀어요. 다영이라고 아시죠? 헤헤.”
“……언제부터 아셨던 겁니까?”
강일이 뒤를 돌아봤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쌀쌀했는지, 코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녀가 한 걸음 거리를 좁히며 답했다.
“전에 행사 참여하시고 나서- 우연히 눈치챘어요. 전에 계산도 해 주셨잖아요.”
“기억력이 꽤 좋으시네요.”
“헤헤, 저도 이쪽 방향인데 가, 같이 가도 되나요?”
“네 뭐.”
설마 그녀가 자신을 뒤에서 칼로 찌르기라도 하겠나?
드레젠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허락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송, 안 힘들어요?”
“저는 이거 아니면 할 게 없거든요.”
“아아……. 그래도 부러워요. 같은 업계 사람이라서 그런가?”
다영은 확실히 좋은 재능을 타고났다.
그 눈은 드레젠도 없었던 눈이었으니까.
잘만 성장하면 마스터까진 금방일 터.
“다영 씨는 재능이 있습니다. 저보다 더 나은 부분도 있으니, 경험만 잘 쌓으시면 될 겁니다.”
“진짜요?”
“내가 장담하죠.”
드레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 속 어린 생명들이 생각났다.
그가 지어 준 웃음은, 용사로서 그런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곤 했을 때 지었던 미소였다.
퍽 안심이 되었는지, 다영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열심히 해서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잘 성장해서 엔딩 꼭 보세요.”
다영은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 사람은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다영의 집은 어디일까?
같은 동네 사람이란 것은 알았지만…….
“집이 어딥니까?”
“저기, 저 건물 꼭대기에 살아요.”
“……그렇군요.”
다영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자신이 가야 할 곳과 일치했다.
조금 난감했지만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왜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는지도 궁금했다.
“드레젠 님은요?”
“저도 저 건물에 삽니다.”
“저, 정말요?! 왜 지금까지…….”
그녀의 뒷말은 안 들어도 뻔했다.
왜 한 번도 못 마주쳤냐는 뜻이겠지.
시간대가 겹치지 않으면 생각보다 마주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학생이신가요?”
“아니요, 이제 막 졸업하고 바로 스트리머로 전향해서…… 별로 나갈 일이 없었어요.”
“저는 얼마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겁니다.”
다영은 입을 작게 벌리고 ‘아-.’라며 끄덕였다.
같은 스트리머이니 대화할 거리는 많았다.
강일, 드레젠은 다영에게 공략법을 알려 주었다.
다영이 질문하면 그가 해답을 내놓는 식이었다.
“와……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안 그래도 거기서 막혀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재밌게 즐길 수 있으면 됩니다.”
“헤헤, 벌써 나왔네요. 아쉬워라~. 몇 층에 사세요?”
그녀가 살고 있는 건물엔 반지하가 있었고, 1층에는 경비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2층부터 주거 공간이 나왔는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일은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인사했다.
“저는 이 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종종 뵙죠.”
“네? 아…….”
강일은 슬쩍 묵례를 하고 터벅터벅 반지하로 사라졌다.
다영은 강일이 들고 있는 비닐봉투에 눈이 갔다.
전부 인스턴트식품이었다.
반찬 역시 비닐에 포장되어 있는 일회용.
그녀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조, 조심히 들어가세요.”
강일은 말없이 아래로 사라졌다.
게임에서의 모습과 다를 것 없는 태도였지만,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왜일까?
다영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강일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쓸쓸해 보였는데.’
감히 그녀가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람이었지만,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으음…… 월세를 조금 낮춰 달라고……. 아니야. 이미 돈 엄청나게 버실 텐데 뭐.’
민감한 문제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그녀는 결국 집에 들어갈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녀는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린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아! 사인!! 사인 안 받았어!”
그녀의 보물 1호가 될지도 몰랐던 사인은,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2
띵동-.
아침부터 초인종 소리가 들려 강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이디엔이나 팀원들이라면 찾아온다고 얘기를 할 텐데, 그것도 아니었으니까.
문득 어제 잠깐 마주쳤던 다영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지?’
뭐 또 물어볼 것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어 줬다.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다영이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이거 좀 드세요.”
“음? 이건…….”
“어머니가 해 주신 반찬이에요. 어제 보니까 냉동식품만 드시는 것 같아서…….”
“아…… 하지만 둘 곳이 없는데요.”
다영은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작은 냉장고 하나는 있을 줄 알고 찾아간 건데!
강일은 작게 웃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조만간 이사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때 받으러 오겠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아…… 네. 어쩔 수 없죠.”
마치 귀가 축 처진 강아지처럼 보이는 것이, 강일을 웃게 했다.
다영은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이번엔 종이를 스윽 꺼냈다.
“저기…… 그러면 사인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못할 것도 없죠.”
“감사합니다! 사실 고맙다는 반응을 유도한 후에 자연스럽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으으.”
그녀의 얼굴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귀가 점점 빨개지는 것이, 엄청 부끄러운 모양.
강일은 피식 웃고 슥슥 사인을 해 주었다.
그녀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이거, 코팅해서 간직할게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제 신변은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이죠. 폐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아.”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음료수 몇 개만 건네주었다.
강일은 기쁜 마음으로 호의를 받아들였다.
계속 거절만 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으니까.
“안녕히 계세요!”
언제 들어도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이제 다시 드레젠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작은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 강일이 캡슐을 실행했다.
-드레젠 님. 이거 보세요.-
휴대폰에 짧은 톡이 도착했다.
팀원들이 만든 단톡방이었다.
엘리스가 그곳에 사진 몇 장을 올렸다.
“흠?”
-유언비어를 제대로 퍼뜨리고 다니는 놈들이 있는데요?-
-바로 작업 들어가서 캐내겠슴다. 사장님!-
-본때를 보여 줘야겠네요.-
사진에는 인터넷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다.
꽤 유명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내용이었는데, 꽤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제목의 내용은 이러했다.
[드레젠은 사기꾼임. 주작 해명해야 할 거다. 회사랑 짜고 잘하는 짓이다.]
그 밑으로는 열심히 분석해서 내놓은 글들이 있었다.
읽어 볼 필요도 없는, 그런 허무맹랑한 글이었다.
그런데 꽤 정교하게 편집을 해 놔서 그런지 선동당하는 댓글이 있다는 것.
강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엘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사님! 전화받았습니닷!”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어디서 찾은 겁니까?”
“마, 말 편하게 하십쇼.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커뮤니티야 뻔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랬다.
인터넷에는 꽤 다양한 커뮤니티가 있었다.
카페나 특정 제목을 달고 있는 사이트가 대표적이었다.
강일이 브락시아에 있을 때도 이런 경우는 허다했다.
‘옛날에 그놈들을 어떻게 했더라.’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없었음에도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실제로는 세뇌당한 용사라느니, 학살을 자행했다느니 했던 인간들이 있었다.
언론 플레이를 통해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자들의 최후는 언제나 똑같았다.
잡아서 사지를 찢어 놓거나, 진짜 돌팔매를 맞아 죽게 하거나.
‘흠, 지구에서는 그게 어려우니까…….’
“그것도 그러네. 일단 팀이 움직일 테니까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고. 내가 엿을 먹이면 되는 건가?”
“그렇겠죠?”
강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새삼 그가 유명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방송을 준비하면서 그자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하필 건드려도 자신을 건드리다니.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