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화
127화 – 의문 해결하기
#1
“어떻게…… 살아남은 건가.”
눈티아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두 눈을 껌뻑였다.
마나의 파동을 느낀 선배 기사단원들도 헐레벌떡 뛰어왔다.
드레젠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궁금했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오래 걸린 건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걸 말이라고 해? 22일이나 지났어. 그사이에 아그네스도 왔다 갔다고.”
“그렇다네. 우리도 포기하려던 참이었지.”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22일.
예상보다 오래 걸렸지만, 좋은 것들을 얻었다.
파직-.
그녀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간질였다.
-너는 습득력이 남들보다 빠르다. 그러니 계속 정진하도록. 내 후계자가 생겨서 정말 기쁘구나.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다는 건, 자기의 가치가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하물며 격이 한참 높은 성좌의 인정임에야.
드레젠은 쿡쿡 웃으며 눈티아를 바라봤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이제 정식 기사단입니까?”
“허허, 그렇다네. 축하하네! 오늘은 조촐한 파티를 열어야겠군.”
허허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45도로 고개를 돌려, 일부러 눈빛을 보여 주지 않았다.
드레젠은 함께 웃었다.
정말 기쁜 듯이.
“당분간은 탑에서 수련하면 되겠군요. 제가 지낼 곳은 있습니까?”
“음, 그건 안내를 받아야겠군. 누가 안내 좀 해 주겠나?”
선배 기사단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드레젠을 보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탑에서 지내다 보면 감정이 메마르기 마련이어서, 미소를 짓는다는 건 상당히 격한 감정 변화였다.
“잘 부탁한다. 막내.”
“저야말로.”
“내 이름은 오베론. 요정왕의 후손이지.”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뾰족한 귀가 드러났다.
인간보다 긴 눈썹과 엘프보단 짧은 귀.
등에는 보이지 않는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이 요정족의 특징이었다.
‘그래. 이자도 있었지.’
오베론.
전쟁 초반, 정찰 및 암살 임무를 훌륭하게 소화해 냈던 인물이었다.
결국 눈티아에게 최후를 맞이하지만, 그의 죽음은 나름대로 큰 전환점이 되어 전 종족의 단합을 이끌어 냈다.
드레젠은 그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이번엔 죽지 않게 해 드리죠.’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
“좋아. 가지.”
-아 잘생겼다;;
-진짜 브락시아 나오고 나서부터 연애를 못하무ㅜ
-엌ㅋㅋㅋ다들 게임에서 연애한다~ 이 말이야
-진짜 어떡하냨ㅋㅋㅋ
게임 내의 캐릭터가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외모였으니,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오징어로 보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런지, 헤어지는 커플이 정말 많다고…….
씁쓸한 현실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나중엔 다 부질없다는 걸 깨닫겠죠.”
드레젠은 멀찍이 걸어가는 오베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내받은 곳은 2층에 있는 넓은 방.
웬만한 호텔보다 훨씬 좋은 방이 드레젠을 반겼다.
“편히 쉬게. 오랜만에 전부 모여서 식사를 하겠군.”
“고맙습니다.”
어느새 드레젠의 얼굴엔 따스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오베론은 잠시 그의 눈동자를 보더니 지나가듯 말을 뱉었다.
“슬픔이 많이 보이는군. 그 슬픔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세상을 바꾸도록 해 보자. 그럼…….”
요정은 사람의 눈동자를 보며 심리를 파악하는 감각이 뛰어났다.
저도 모르게 옛날 생각 때문에 그랬겠지.
드레젠은 픽 웃고는 소파에 앉았다.
“조금 쉴 수 있겠네요. 그나저나…… 생각보다 많이 남아 계시네.”
-이젠 우린 안중에도 없숴!
-시청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스트리머가 있다?
-하악! 방금 오베론하고 사귀는 상상 함!
-어림도 없는 소리 좀;;
“자, 그럼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오늘 밤엔 알아볼 건들이 있었다.
과거, 이곳에서 지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지냈다.
하지만 일을 겪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롭고, 달라 보였다.
“자아…… 그럼 옛날 얘기를 좀 해 보죠.”
-킹날 얘기
-옛날 옛적에~
-이분 게임 2회 차였던 거임
-엌ㅋㅋㅋㅋㅋ우리나라 역사보다 재밌는 게임 역사
드레젠은 오베론에 관한 얘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눈티아가 마족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도.
“그러니까, 제가 생각한 건…… 역으로 연락할 수단을 찾아내면 침투를 먼저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은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이제부턴 또 잠입물인가!
-그림자 장막은 소용없지 않음?
“잘 쓰면 됩니다. 잘 쓰면.”
이 시점의 눈티아는 완성형이 아니었다.
마족의 힘을 받아들이기 전, 그의 실력은 마스터 두 명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였다.
즉, 지금 드레젠의 스펙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것.
지금 눈티아는 자만심에 빠져 있기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어디까지 타락했을까. 눈티아.’
드레젠은 마나를 최대한 넓게 퍼트려 탐지를 사용했다.
기억하고 있는 대로의 탑이 맞는지, 그리고 동료들의 동선은 어떠한지, 그 밖에 각종 정보를 모으기 위해 계속해서 탐지를 했다.
“여러분과 함께 동선을 짜 보죠.”
-본격 시참 방송
-ㅋㅋㅋㅋ역시 머리를 맞대면 조으다
-근데 미니 맵 디테일 보소;; 나는 그냥 10미터 앞도 보기 힘든뎈ㅋㅋ
-그건 님이 조루라……. 크흠
-쳐내 쳐내!
드레젠의 탐지 레벨은 무려 28.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수치였다.
프로 선수들 역시 탐지, 추적 레벨을 필히 올리곤 했다.
마나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기에.
“꾸준히 연습하는 길밖엔 없습니다. 저도 상당히 많이 노력했죠.”
베타 테스트보다 훨씬 격렬하고 비정하고 혹독한 곳에서.
그렇게 동선을 짜고 나니 저녁이 되었다.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오베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저녁 먹을 시간이다. 단장이 1층 식당으로 내려오라더군. 그리고 마나 좀 그만 뿜어 주겠나. 위치라면 천천히 안내해 줄 테니까.”
“……그러죠.”
최대한 얇게 퍼뜨렸음에도 알아차린 것을 보면, 역시 그림자 기사단의 실력은 알아줘야 했다.
드레젠은 자리에서 일어서 식당으로 향했다.
오베론이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마나를 다루는 실력이 보통이 아닌데……. 미래가 기대되는군. 그나저나 그림자 기사단엔 왜 입단하려고 한 건가?”
“……믿을 수 있는지 직접 판단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흠.”
오베론은 의미심장한 대답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식사는 정갈했지만 고급스러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드레젠은 눈티아라는 사람을 최대한 파악했다.
암살을 준비할 때,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때로는 가스라이팅을 통해 편을 만들어야 했으며, 거짓 정보를 뿌려 동선을 꼬아야 할 때도 있었다.
‘역시 만만찮군.’
“하하, 막내는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군.”
“앞으로 일해야 하는 직장의 상사를 파악해 두는 것은 기본이죠.”
기본적으로 식사는 코스 형태로 진행됐다.
어디서 구했는지, 하인들이 척척 식사를 날라 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을 하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
너무 비밀이 많은 곳이었으니까.
“너무 많은 것을 알려 하지 말게. 그림자 기사단은 철저하게 사생활을 존중하는 집단이니. 자네가 밖에서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아. 주어진 임무만 완벽하게 해낸다면.”
눈티아의 기세가 조금씩 커져 갔다.
사생활을 꺼려 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드레젠은 적당히 물러났다.
“그러죠. 임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파직-.
그의 손에서 검은 뇌전이 피어났다.
이제 성장이 없을 줄만 알았던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터 준 힘이었다.
“새로 얻은 힘도 있으니.”
싱긋 미소를 짓는 모습이 눈티아에게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은 눈티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사생활을 즐기러 가 보겠네. 후식까지 꼼꼼히 챙겨 먹고 해산하게.”
“알겠습니다.”
단원들이 일제히 답했다.
눈 깜빡할 새에 사라진 눈티아.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단원들이 일제히 드레젠에게 눈을 돌렸다.
“막내. 아주 미쳤구나?”
“단장님에게 맹랑하게 군 사람은 오랜만이군.”
“기백은 인정해 주지.”
몇 안 되는 선배들이 칭찬과 걱정을 늘어놨다.
저렇게 보여도 눈티아는 단장이었다.
누구보다 능글맞고,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였다.
“너무 튀는 건 좋지 않아. 단장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까.”
“……명심하죠.”
선배들의 분위기도 알았다.
그래, 눈티아를 완전히 믿는 자는 몇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곱. 속을 알 수 없는 자가 넷. 완전히 불쾌감을 드러낸 자가 셋.
파악은 모두 끝냈다.
“막내. 너무 나대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건방진 건 용서하지 않는다. 처신 잘하라고.”
그 불쾌감을 드러낸 자들이 동시에 자리를 떴다.
저들은 눈티아를 따라 마족의 개가 되는 인간들이겠지.
드레젠은 적아를 구분하고 식사를 마저 마쳤다.
-살벌하누
-텃세;;
-똥군기라니! 똥군기라니!!
“똥군기는 여기가 더 심합니다. 브락시아는 말 안 들으면 바로 때리거나 죽여 버리거든요.”
-엌ㅋㅋㅋㅋ
-그러면 똥군기가 아닌데수웅ㅜㅜ
-살벌하눜ㅋㅋㅋ
의미 없는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냈다.
오늘 밤, 동이 트기 전 움직일 계획이었다.
이미 미니 맵은 머릿속에 모두 그려 놨다.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을 뗄 차례였다.
#2
야심한 시각.
고요함 속에 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 밖의 일이로군.”
[미끼를 보내겠다.]
눈티아는 까끌까끌한 수염을 매만졌다.
지금 자신의 기분처럼 맹숭맹숭한 느낌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느꼈다.
그는 대놓고 자신들을 시험하고 있었음을.
‘건방진 것.’
그림자 기사단이 서열에 민감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라도 적정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단장 앞에서 저렇게 기고만장한 기사단은 또 처음이었다.
성좌의 총애를 받아서 그런 건가?
눈티아는 괜스레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부탁하지.”
앞으로 다양한 기술들을 알려 주며 세뇌를 시킬 생각이었다.
오늘 식사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모든 음식엔 극미량의 약물이 첨가되어 있었다.
아마도 오늘 밤중부터 서서히 효과가 나타날 터다.
[혹여 죽지 마라. 네 심장에 있는 것은 제작하기 힘든 물건이니.]
“……내가 누군가에게 죽을 위인으로 보이는가?”
자존심을 긁는 말투에 저도 모르게 날이 선 반응을 했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고, 유기체로 이뤄진 고철 덩어리들 따위가 그림자 기사단의 자존심을 긁어?
더 이상 건들지 말라는 제스처를 보냈으나, 상대방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실패할 확률이 23%로 늘어났다. 조금씩 가능성이 어그러지고 있다. 주의하라.]
“알아서 할 테니 준비한 거나 잘 보내.”
눈티아는 씹어뱉듯 말하고 연결을 끊어 버렸다.
그는 드레젠이 다소 멍청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의심했더라면 조금 더 태연하고 영악하게 움직였어야 한다.
경계심만 잔뜩 심어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과를 보고…… 결정해야겠군.’
미끼를 이용해 목을 칠지, 아니면 충실한 수하로 거둘지는 시간이 결정해 줄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드레젠이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눈티아는 음산한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땅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