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화
125화 - 거짓 시험
#1
쩌어엉-!
드레젠은 공격을 쳐 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박살 내고 있었다.
어느새 마나까지 끌어 올린 채, 주변을 활활 밝히는 중이었다.
촛불로 온 어둠을 밝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 주변의 안전은 확실히 지킬 능력을 주었다.
“흐압-!”
그가 게임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기합다운 기합을 질렀다.
전투기가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 비슷한 것이 주변을 훑었다.
“역시-.”
콰가가각!
날아오는 공격들을 모두 쳐 낸 뒤, 한쪽으로 내달렸다.
그는 반쯤 확신을 가진 채 움직였다.
이 공격들, 질리도록 익숙한 공격들이었으니까.
[키리릭?!]
예상외의 속도였는지, 당황함이 묻어나는 울음이 들렸다.
드레젠은 손을 뻗어, 소리의 근원지에 있는 물체를 잡았다.
차갑다.
처음 만진 느낌은 그것이었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차가움이 아니라, 메탈릭한 느낌이었다.
“-이 시험은 가짜였군요.”
‘히든 던전’이라고 표기될 만한 공간.
본래 그림자 기사단이 내주는 시련에는 기계가 등장하지 않았다.
선배들, 그리고 성좌 젤다르의 직속 부하들의 사념이 만들어 낸 공간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림자 기사단이었으며, 기사단의 정수를 물려주는 의식을 행했다.
“본래라면 성좌의 부하들이 직접 나서서 치르는 행사인데, 방법은 같지만 주체는 다르네요.”
드레젠은 급박하게 움직이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콰드드득-!
그의 전신에서 혼돈의 힘이 몰아쳤다.
그림자 기사단만 쓸 수 있다는 그 힘이 기계를 무차별적으로 찢어발겼다.
[키리리리릭!]
단말마는 처참했다.
드레젠은 뒤이어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몸을 날렸다.
펄럭-.
그림자 기사단이 사용하는 기술들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까딱 잘못하다간 날아오는 공격에 난자당할 것이다.
‘집중할 때로군.’
그는 입을 앙다물고 대놓고 포격을 가하는 기계들 사이로 움직였다.
손에 마나를 잔뜩 담아, 신성력으로 변환했다.
동시에 다리에는 바람을, 몸통에는 어둠을 휘감았다.
퍼엉-!
세상이 일순간 환하게 변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죠.”
그림자는, 기사단의 주 무기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기계들 뒤로 나타났다.
서걱-!
처음을 시작으로-.
서걱서걱서걱-!
[쿠리리릭!]
모든 그림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단 일격에 기계들의 핵까지 꿰뚫었다.
평범한 기계들은 아니었는지, 꿈틀거리는 녀석들도 보였지만, 그뿐.
마나가 아닌 혼돈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재생력은 없었다.
“자, 그럼…….”
피융-.
고개를 틀어, 머리를 노리고 쏘아진 붉은 광선을 피한 드레젠.
저 멀리, 붉은색 광원이 보였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붉은 점이 오직 드레젠 하나를 노리고 있었다.
“……재밌겠네요.”
-대체 뭐가ㅋㅋㅋ
-저걸 다 피할 수 있을까?
-체력 몰빵하고 개돌하면 가능할지도
-매드 무비! 매드 무비가 마려워!
드레젠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그대로 달려갔다.
퍼퍼퍼퍼펑!
그가 있던 자리에 무수히 많은 관통의 요청이 들이닥쳤다.
드레젠은 목숨을 위협하는 광선 사이로 이동했다.
“이놈들은 마족이 아닙니다.”
뜬금없는 설명이지만 시청자들은 이미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제대로 몰입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드레젠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그는 마나를 일으키며, 아껴 뒀던 스킬을 발동했다.
[‘하이 부스터 스트렝스’ 발동]
[지속 시간 - 2 : 00]
느려진 시간 속을 달리며 그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는 어느새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둠을 가르는 중이었다.
“브락시아 대륙엔 거대한 관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문엔 온 세상에 퍼지는 마나의 원천이 있죠.”
그 마나의 원천 중 일부가 지금은 한국에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붉은 광선을 내뿜고 있는 기계들은 마족 따위가 아니었다.
마나의 원천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들.
관문 군주인 ‘베드모아젤’의 부하들이었다.
“그 원천을 지키는 기계들을 수호자라고 부릅니다. 저 기계들은 그 수호자들의 레플리카인 것 같네요.”
진짜 수호자들이었다면, 그리고 이만큼의 숫자였다면 드레젠은 진즉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
그만큼 가공할 만한 존재들이었다.
드레젠은 정신을 집중하고 페베스 검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강림하라-!”
호사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딱 한 번.
스카이워커의 초대 가주가 진심으로 싸웠던 일이 있었는데 산맥 하나가 날아갔더라.
그와 맞붙은 자는 검은 머리칼에 날개 없는 드래곤을 소환한 친우였다.
스카이워커는 날개 없는 붉은 드래곤을 소환했고, 푸른색과 붉은색은 한데 뒤엉켜 마나의 폭풍을 일으켰다고.
-?!
-저거 용 아니야?
-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
-용인디?
-왜 판타지에서 용이 나오냐곸ㅋㅋㅋㅋ
쿠아아아아아-!
페베스 검술의 12형.
‘렉테 : 아톨로(recte : attóllo)’.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거대한 용오름이 시작되었다.
[키릭-!]
마나를 나타내는 바가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접근, 그대로 페베스 검술의 정수를 퍼부었다.
어둠은 이미 없어졌다.
화려한 폭발과 압도적인 화력으로 모든 적을 격멸한 흔적이 곳곳에 흩뿌려졌다.
“……후우, 끝났네요.”
[1단계 클리어]
[2단계로 넘어갑니다.]
-또 있어?
-진짜 우리랑은 다른 세계에서 사누
-방금 진짜 용인가? 이 정도면 그냥 무협진뎈ㅋㅋㅋㅋ
-그러게 옛날 소설 생각나누
-지존 천마 강림 이런 건갘ㅋㅋㅋ
드레젠은 숨을 고르며 피식 웃었다.
손을 뻗어 보자 부드러운 마나가 느껴졌다.
평소에 지내던 브락시아 본토보다 훨씬 농밀한 마나의 양.
그는 한껏 숨을 들이켜며 자신의 특기를 발휘했다.
“여긴 마나가 빨리 차는군요.”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차오르는 마나.
시청자들은 그저 특별한 필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냥 게임은 아니라니까.’
체득하고 있는 기술들을 모두 써먹을 수 있으니, 그는 회귀라도 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게임이 아닌 것을 인지하니 몸은 더욱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가 무한한 적들과 싸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지금 여기서 드러나는 중이었다.
“자, 그럼 2단계는 뭘까요?”
자신이 알고 있는 2단계라면, 절대 죽일 수 없는 생명체에게서 살아남는 것.
만약 정예 수호자 중 하나가 나온다면, 진짜 게임 오버를 각오하고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의 공격력으로는 한없이 부족할 테니까.
“제법 흥미로운 전개였다. 인간.”
하지만, 들려온 것은 그 걱정을 가볍게,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다.
드레젠은 풀썩, 무릎을 꿇었다.
불가항력.
지금 가진 캐릭터의 스펙으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힘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설마…….”
“전에도……. 흐음.”
딱딱하지만 곧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송출되던 소리가 뚝 끊겼다.
-??
-방송에 문제 있어!
-소리 안 들리누ㅠㅠㅠ
-으아아아 이게 뭐야아아아!!
시청자들은 난리가 났지만, 드레젠은 시청자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성좌.
그것도 한 차원의 관문을 지키는 자가 직접 강림했으니까.
“전에도 만났었지. 생각보다 많이 허약해졌구나.”
“……그걸 아시면 좀 풀어 주시겠습니까.”
“이것도 시험의 일부다. 견뎌 내면 좋은 보상이 따를 것이다.”
드레젠은 이를 악물고 마나를 흡수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물에 빠진 소금처럼 마나가 녹아내렸다.
현기증이 이는 것도 꾹 참고 이야기를 들었다.
“원천의 일부를 다시 넘겨주기 위해서 왔다. 마스터께서는 그간 고생한 대가라고 하더군. 더불어 마스터의 동업자 자리까지 생각하고 계신다.”
“……그 위대하신 분 말씀입니까?”
여인의 목소리에 기쁨이 맴돌았다.
벌써 마스터를 위해 싸운 지 수백 년.
마스터는 새로운 동료를 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기쁘다. 일부러 시련을 빌려 이 자리를 만들었다. 감사하게 받도록.”
“그렇다면 이 마나들이 전부…….”
“그래.”
하지만 이곳은 게임일 뿐, 현실에서의 육체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원천을 주려면 차라리 이곳 말고, 현실에서 주는 편이 나을 텐데…….
드레젠의 생각을 읽은 듯, 여인이 말했다.
“네가 사는 곳은 평화로운 곳이어야 한다고 했지. 우리도 그 말에 동의하는 바이다. 마스터의 고향도 ‘지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
드레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속 밝혀지는 거대한 진실.
여태까지 몰랐던 성좌 위 존재의 일들.
마치 잘 짜인 극본처럼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도 제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그렇다.”
“하! 정말…….”
드레젠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분노했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에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만큼 좋은 조건이었으니까.
“이 세계를 마스터가 현실로 만들 것이다. 그대는, 이곳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평행 세계로 만들어 다오.”
“……그 말은?”
“세계를 완전히 분리해, 무의 추종자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다. 마스터께서는 그 작업을 하고 계시지.”
“그럼 현실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겁니까?”
여인, 베드모아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젠은 어느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캐릭터의 최대 마나양이 커지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성좌들이 개입할 것이다. 적은 두 배가 되겠지만, 그래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정말이지…….”
드레젠은 이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결과가 끝나고, 그들은 이 세계를 자신들의 세계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럴듯한 생각이기도 했다.
드레젠은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부터 궁금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셨답니까?”
“그분께선, 그대가 있는 세계를 사랑하시니까. 마지막 남은 ‘지구’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구가 전장으로 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다.”
드레젠은 고민했다.
현실에서는 하이디엔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노력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받아들이기엔, 결정력이 부족했다.
한 번쯤 묻고 싶었다.
“지구엔 생존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의사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얘기를 나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그 점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끝났다. 걱정하지 말도록.”
아.
성좌들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드레젠은 피식 웃으면서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드모아젤이 눈에 이채를 머금었다.
‘역시. 마스터께서 눈여겨볼 만하군.’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검을 들었다.
강해질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
이젠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 후계자를 양성할 시간이었다.
“이제 소리가 들릴 거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단 한 번의 전투를 통해서.”
-오오, 들린다!
-뭐라 뭐라 한 거 같은데 안 들리뮤ㅠㅠ
-와 근데 저 누난 또 뭐얔ㅋㅋㅋ
-요즘 여캐 많이 나와서 좋다 허헣
-다시 꿀잼 각인가!
“그림자 기사단으로서의 자격을 시험하기 위해, 젤다르 대신 본인이 왔다. 그대, 본인의 가르침을 받으라.”
“……기꺼이.”
드레젠은 늘어난 마나를 확인하며 검을 들었다.
관문 군주.
그녀의 모든 것을 배울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