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화
119화 - 일이 끝난 후
#1
“움직이지 마라!”
“…….”
기사단은 마나를 끌어 올려 무기에 오러를 주입했다.
그 상태로 수십 명의 기사가 드레젠에게 무기를 겨눴다.
드레젠은 흘끔, 위를 한번 보고 입을 열었다.
“저거 소환수는 가만히 둘 겁니까? 그리폰이 엄청 불쌍해 보이는데요.”
“……회수하는 걸 허락하도록 하지.”
중후한 목소리.
태산과 같은 위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길이 없는 압박감이었다.
드레젠은 위를 올려다보며 와이렉스를 호출했다.
[이제 그만 놀고 내려와.]
[알았다. 오랜만에 신나는 비행이어서 만족한다.]
그리폰들을 가지고 노는 것도 이제 질리던 참.
와이렉스는 포효로 그리폰들의 움직임을 일순간 막고 탑으로 내려왔다.
거센 바람이 장내를 덮쳤다.
기사단장이 와이렉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알기로 하얀 와이번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한 명밖에 없는데. 아닌가?”
“맞습니다. 제가 드레젠이죠.”
“감히 제국의 수도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드레젠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말을 잘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잘못한다면 마스터와 한판 붙을 수도 있었으니까.
몸을 빼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존경하는 인물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뭐어…… 저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지라. 소란을 피운 것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만.”
뒤이어 ‘생각보다 다루기가 많이 까다로워서요.’라는 말을 붙였다.
아직까지 흉성을 유지하고 있는 와이렉스를 바라본 기사단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변명이었다.
“사람을 해치지 않아서 봐주는 줄 알아라.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뭐지?”
드레젠은 머리를 긁적였다.
탐지 마법에 머뭇거리고 있는 자들이 걸렸다.
아마도 하이디엔과 위도우 일행일 터.
제아무리 그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눈앞에 있는 기사단장의 이목을 속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한담.’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게 만들어야 했다.
아니면 틈을 만들어 주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
역시, 능력 있는 자는 다르다니까.
귓가로 파고드는 말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마 분신과 함께 몸을 숨기겠지.
적절한 판단이었다.
“안쪽에 꽤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혼내 주러 왔죠.”
“흠. 갸륵한 생각이로고. 하지만 그대 역시 믿을 수 없다. 진실의 구를 가지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는 순간 수많은 검이 날아들 것이다.
더불어 움직이는 성채라고 불리는 기사단장도 달려들겠지.
전장에서 수도 없이 괴물을 베어 온 기사단장이었다.
그것도 오우거 이상의 거대한 몬스터만 골라 잡는, 독특한 취향의 인간이었다.
“손을 올려라.”
드레젠은 순순히 손을 올렸다.
이런저런 질문이 오갔으나, 전부 진실로 밝혀졌다.
이전에도 당했던, 통칭 진실의 구는 좋은 심문 도구였다.
“의외로군. 이렇게 깽판을 쳐 놔서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하하…… 그건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수금이 목적이었지ㅋㅋㅋㅋ
-그렇지 수금 때문에 그랬짘ㅋㅋㅋ
-행복은 돈이다^^7
-너어어어희들은 진짴ㅋㅋㅋㅋ
차마 ‘밖에서 돈을 줘서-’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드레젠은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안쪽을 조사해 보시면 될 겁니다.”
“이자를 감시하도록.”
기사단장은 몇몇 기사들을 이끌고 안쪽으로 돌입했다.
이제 시간을 끌면 되는 일.
근처까지 다가온 하이디엔에게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기다렸다가 기사단이 퇴각하면 안쪽으로 들어가.]
[알겠다. 당신은?]
[난 걱정하지 말라고.]
별다른 생각 없이 보낸 메시지였는데, 어째 반응이 격했다.
빼액 울리는 하이디엔의 목소리.
[내, 내가 왜 당신을 걱정하겠나! 찝찝하게 만들지 말고 처신이나 잘해라.]
[……그래그래.]
드레젠은 별생각 없이 답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보내며 기사단장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조용히 넘어가려면 이런 방법이 최고였다.
#2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기사단장, 프레드릭 고드먼은 정갈한 필체로 쓰인 장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중대 사안이었다.
수많은 불법 행위가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황제께서 아신다면 어떤 호통을 치실지 벌써부터 고민이었다.
“다른 흔적은 없는가.”
“예. 현재는 그자가 벌인 일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와해되었다고 봐도 되겠는데요.”
고드먼은 황제를 지키는 것과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내였다.
그러므로 이런 방면으로는 상대적으로 눈이 어두웠다.
“내가 봐도 심각하군. 썩어 빠진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야. 낱낱이 드러나겠구만.”
“저자는 어찌하실 겁니까?”
“흠…… 본래라면 공로를 인정해야 할 정도의 공훈이다. 하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소란을 일으킨 점도 있다. 사실대로 보고하고, 판단은 폐하께 맡겨야겠지.”
적어도 무언가를 지키는 기사라면 법을 준수해야 함은 물론이요,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고드먼의 신념이었다.
그는 황제를 수호하는 방패.
그저 사실만을 가져다 바치면 될 뿐이었다.
“이곳을 정리해라.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수집한다.”
“알겠습니다.”
다크몬드라니.
말로만 들었던 암살 집단이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부에 나와 있는 귀족 중엔 고드먼과 친분이 있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드먼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친분으로 감싸 주면 기강이 서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털어 버리고 장부를 챙겼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친 후, 탑은 텅텅 비게 되었다.
재건축이야, 황실에서 재정을 조금만 떼어다 쓰면 될 일이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드레젠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만.”
“고생했군. 범죄자들은 뿌리를 뽑아야 하지. 설령 그것이 귀족이라도.”
우직한 그의 말에,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면 덕분에 그는 적도 많았지만, 적어도 신뢰를 쌓은 이들이 돌아서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이 터졌을 때 아주 큰 무기가 되었고, 드레젠 역시 든든하게 뒤를 맡길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저는 이제 가 봐도 되는 겁니까?”
“조만간 성으로 서신이 날아갈 것이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령에는 꼭 따르도록.”
고드먼은 드레젠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첫인상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본래라면 끌고 가 구속해야 했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공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판단했다.
“기사단장은 성주의 신분을 함부로 구속할 수 없지. 다음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고하도록 하죠.”
“개인적인 원한이든, 노림수가 있든 개의치 않겠다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 제국의 귀족들은 생각보다 더 집요하니까.”
드레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여기 있는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기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나머지는 이제 저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읏차-. 그럼 이제 집으로 가 볼까요?”
-으아 끝났다~
-에피소드 끝!
-ㅋㅋㅋㅋ잘되었다~ㅋㅋ
-이제 뭐 하실 거임?
다음에 할 거라…….
드레젠은 성을 조금 더 돌보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방비를 해야 할 시기였다.
골렘도 많이 만들어야 하고, 병력들도 가르쳐야 했으며 무엇보다 크리스에게 페베스 검술을 비롯한 것들을 알려 줘야 했다.
“당분간 성에 틀어박혀서 살아야겠군요.”
-던전 공략 안 해 주시나요?
-탑은?
-탑도 가셔야죠!
-맞아, 그림자 기사단 스토리 궁금한데
-탑 가즈아아아아!
그랬지.
그림자 기사단이 탑으로 오라는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성에 신경 쓸 차례였다.
명색이 성주인데 너무 오랜 기간 성을 비우면 안 되니까.
드레젠은 루시퍼의 눈물을 잠시 풀며 말했다.
“며칠 정도만 성에서 정비하고 갑시다. 와이렉스도 돌려놔야 하니까요. 위도우가 오기 전에 이것도 좀 빼 두고.”
-찬성!
-고건 킹정이지
-흐흐 오랜만에 크리스 얼굴 보겠누
-하악하악 크리스 짱!
크리스를 향한 러브 콜이 쏟아졌다.
이윽고 기사단이 모두 떠나간 자리에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제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일반인의 기척까지 모조리 잡아 뒤질 수는 없는 노릇.
‘마스터도 피곤하겠어.’
수도에서는 일부러 기감을 제한하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이디엔과 위도우는 그런 빈틈을 노려 잘 숨어 있었던 것.
“설마 하운드 기사단장까지 나설 줄이야.”
“일은 처리해 놨으니까, 안쪽으로 들어가.”
“……정말 고맙군.”
위도우는 가만히 무너진 탑을 바라봤다.
지금은 모두가 떠나간 상황.
입구 쪽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 몇 명만 있을 뿐.
“저 정도는 쉽게 넘어갈 수 있겠지?”
“그래. 당분간은 몸을 좀 사리면서 세력을 규합해야겠군. 새로운 만월이 등장했다는 것도 알려야 하고.”
“잠깐.”
둘의 사이에 하이디엔이 껴들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만월인가 뭔가 하는 것이 된다면 명단도 볼 수 있겠지?”
“그렇겠지요. 왜 그러는 겁니까?”
“그 명단에서 내가 말한 자를 찾아 줘. 도움의 대가는 이걸로 받지.”
위도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까지 구해 준 은인이었다.
비록 간부라고는 하지만, 이제부터 새로 개편될 조직이었다.
“어차피 새롭게 출발해야 할 조직이니, 도움을 드리겠소.”
“……그래.”
하이디엔은 그 말을 남기고 휑하니 돌아섰다.
드레젠과 위도우는 서로 피식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난 이만 성으로 가 봐야 해서. 뒤처리는 잘하리라 믿는다. 네가 만월이 안 되면 내가 다시 올 거야.”
“하하! 루시퍼의 눈물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지. 파트너.”
두 사람은 악수를 하며 훗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드레젠은 와이렉스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와아, 역시 와이번의 등은 정말 넓고 편안하네요.”
“……저기요?”
“네? 저는 이제 할 일 없는 백수가 되어서…… 잠깐 신세를 질까 합니다만.”
뻔뻔하시네요.
드레젠이 작게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암궁이 있었다.
[이 여자 좀 떼어 내라. 소란을 피울 수 없어서 얼마나 거슬렸는데.]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결정타를 날렸다.
“소녀를 부려 먹으신다면, 성이 아~주 안전할 겁니다. 오갈 데 없는 가녀린 소녀를 방치하지 마옵소서.”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주인?]
어차피 얼마 안 있어 위도우에게로 가 버릴 사람.
조금 부려 먹어도 상관없겠지.
그는 쇠사슬로 칭칭 감은 암궁을 태우고 바람을 갈랐다.
“제 이름은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성주님.”
드레젠은 대꾸 없이 성으로 향했다.
재정비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