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화
116화 - 은과 어둠
#1
풀썩 쓰러진 인물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 공포라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위도우는 눈을 아래로 깔아 머리에 화살이 꿰뚫린 집행자를 바라봤다.
쉬익-!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포위하고 있던 암살자 한 명이 또 고꾸라졌다.
“이게 대체…….”
위도우 근처에서 황금색 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부하가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인 줄만 알았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완벽한 천라지망.
그 속에 갇힌 자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드레젠, 그 양반이 일을 제대로 하긴 했나 봅니다.”
“간 떨어지게 하고 있네 진짜.”
위도우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안심을 했다.
수풀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희미하지만 강렬한 기척이었다.
“……이제 어쩔까요?”
“일단 대기하면서 몸부터 추스르자. 덤벼 오는 녀석들만 쳐 낸다.”
“알겠습니다.”
위도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철저하게 은폐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정보가 빠져나갔을까?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난잡하게 펼쳐져 있던 기억의 퍼즐들이 하나씩 맞춰졌다.
“그 여직원.”
“그러고 보니, 며칠 전 휴가를 신청하긴 했는데.”
“하! 명랑한 계집이군요.”
사실 그 여자가 아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그저 의문의 남자와 길드장이 만났다는 것뿐.
알고 보니 그 의문의 사나이가 드레젠이라는 것.
수상한 담화가 오갔다는 것 정도?
“그것도 아니면 만월의 하수인이었겠지. 처음부터.”
“허…… 감히 우리 정보망을 피해 갈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겁니까?”
위도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계속해서 죽어 나가는 암살자들은 이미 신경 밖이었다.
신경 쓰지 않았던 여직원.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어쨌든 다크몬드를 접수하게 된다면 그 여자도 볼 일이 있을 거다.”
써먹을 수 있다면 써먹으면 된다.
최우선 과제는 역시 암궁을 암살하는 것.
어느 정도 숨이 돌아온 위도우가 대거를 빙글 돌렸다.
누구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굵고 단단한 동아줄이 내려왔다.
“우리가 잡은 줄이 쇠줄이길 바라자고. 가자.”
“헷, 알겠습니다.”
“한번 가 봅시다!”
위도우를 비롯한 부하들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반격의 시간이었다.
#2
“어후, 끝이 없네.”
“화살은 괜찮아?”
엘르엘라가 시위에 화살을 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그들의 우월한 신체 능력과 환경의 이점을 충분히 살렸다.
암살자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땅에 처박히거나 나무에 그대로 박제되었다.
“조~금 모자라긴 한데, 뭐- 우리 대장이 잘해 주지 않겠어?”
“돌입하자.”
하이디엔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말했다.
인간.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자를 처참하게 죽이고, 그가 겪을 수 있는 모든 모독과 치욕을 겪게 했던 집단의 인간들.
그녀가 천재가 아니었다면, 혹은 암살자들의 기술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스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요란스럽게 떨어졌다.
살기를 전혀 감추지도 않았고, 암살자들의 덕목인 지형지물도 이용하지 않았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온 수해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저저, 또 시작이네.”
“어쩌겠어. 우리가 이해해야지.”
팀원들이 작게 한숨을 쉬고 산개했다.
모든 시선이 하이디엔에게 쏠렸다.
뾰족한 귀,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었다.
암살자들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실버 문!’
‘위도우 그레인! 실버 문과 내통하고 있었는가!’
은빛 달은 검은 달을 싫어한다.
찬란한 빛으로 어둠을 불살라 먹을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뚜둑-.
하이디엔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살벌하게 주변을 노려봤다.
“다 덤벼라. 버러지들.”
살벌한 미소와 함께 혈전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창은 닿는 모든 것들을 분쇄했다.
성좌 : 미카엘이 전수해 주었다고 전해지는 창술.
그것은 닿는 모든 것을 물어뜯는 맹수처럼 보였다.
“이걸 받아라, 인간.”
“당신들은…….”
뒤에서 남성 엘프가 스윽 나타나 무언가를 건네줬다.
하이디엔의 전투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위도우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건네받았다.
영롱한 빛깔의 목걸이.
‘초크에 가까운 목걸이. 이게 바로…….’
“신비한 힘이 느껴지더군. 드레젠인가 하는 놈이 자네에게 전해 주라던데.”
“고맙소.”
첫 번째로 욕심내지 않고 자신에게 전해 줬다는 것.
두 번째로 위기에서 자신과 동료들을 구해 주었다는 것.
위도우의 감사함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흥.”
엘프는 코웃음을 한번 치고는 은신술을 사용했다.
뒤이어 벌어지는 일은 학살극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다.
뻐억-! 소리와 함께 날아간 다크몬드의 암살자.
위도우가 화살이 날아온 자리를 바라보자,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얼른 안 가 봐? 드레젠이 기다리고 있을 거래. 가서 누굴 베어 버리라는데? 자기가 시간 끌고 있겠다고 그랬어.]
“……뒤는 맡기겠소.”
이곳에서 콘스텔라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하루를 꼬박 간다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 감각은 죽지 않았다.
초크 모양의 목걸이가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약속은 잘 지키는군. 너희들은 어딘가로 가 있어라.”
“혼자 괜찮겠습니까?”
“암살자가 떼 지어 다니는 거 봤나?”
부하 중 한 명이 눈을 돌려 학살당하고 있는 다크몬드의 암살자들을 바라봤다.
위도우는 피식 웃고 부하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일단 조용한 곳에 가 있어라. 내가 만월의 자리에 앉으면…… 그때 다시 부르마.”
“알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위도우의 뒷모습을 봐야만 했다.
초크를 목에 걸자 신비로운 힘이 몸에 깃들었다.
“……진짜였군. 루시퍼의 눈물.”
암살자들의 성좌는 루시퍼가 아니었지만, 그는 정체를 숨기고 수십 년을 살아갔다.
그 힘이 스며든 초크에 이런 힘이 깃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루시퍼의 눈물을 착용한 위도우가 은신술을 펼쳤다.
‘앞으로 많은 적들이 있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모두 피해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콘스텔라로 향했다.
초인이 된 그의 신체가 날 듯이 숲을 건너갔다.
#3
[왜 나는 싸우지 못하는 거지?]
“어…… 네가 있으면 암살이 아니잖아.”
콘스텔라 근처 상공.
그리폰들은 올 수 없는 높은 상공에 떠 있는 와이렉스와 드레젠은 한창 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와이렉스의 투정을 드레젠이 달래 주는 중이었다.
[다 죽이면 그뿐이지 않나?]
-ㅋㅋㅋㅋㅋㅋ
-그주그소
-(대충 깽판 치자는 내용)
-개 웃기눜ㅋㅋㅋ
-와이렉스 얘기도 충분히 들어 봐야 한다ㅋㅋㅋㅋ
“그렇긴 하지. 그렇긴 한데…….”
-할 말 없는 거 보솤ㅋㅋㅋㅋ
-ㅋㅋㅋㅋ맞는 말이긴 하거든.
-와이렉스 시원하게 말 잘하눜ㅋㅋㅋ
[‘시바시바’ 님 1,000코인 후원!]
[와이렉스랑 정면으로 들이받으면 10만 원!]
[‘만두’ 님 1,000코인 후원!]
[5만 원 얹습니다.]
[‘이름짓기귀찮아’ 님 5,000코인 후원!]
[받고 10만 원 더!]
드레젠은 헛웃음을 지었다.
방송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더 재미있는 장면을 강제로 연출당하는 것.
다양한 미션을 거는 시청자들 덕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래…… 어떻게 싸우고 싶은데?”
[그야 당연히 브레스를 시원하게 갈기는 거 아니겠는가.]
황제가 있는 수도에서 브레스를 시원하게 갈긴다고?
드레젠은 이마를 짚었다.
그때 시청자 한 명이 의문을 제기했다.
[‘암살왕’ 님 7,777코인 후원!]
[그런데 위도운가 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드레젠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거야 되게 간단한 문제였다.
“그럼 제가 먹으면 되죠. 까짓거.”
-엌ㅋㅋㅋㅋㅋ
-가능한 일이다.
-줘도 못 먹으니 내가 먹는다!
-ㅋㅋㅋㅋㅋ근데 왜 안 드시지?
“조직 관리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아십니까? 그래서 귀찮은 건 위도우에게 시키고 급한 일이 있을 때 부려 먹으려 했죠.”
사탄의 선생님처럼 행동하는 드레젠의 모습.
시청자들은 좋다고 깔깔댔다.
드레젠은 와이렉스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어떻게 해야 조용하고 화려하게 깽판을 칠 수 있을까요?”
제국의 수도엔 많은 강자들이 존재했다.
지금 드레젠이 애를 먹거나,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적도 분명 존재하겠지.
그들의 눈은 수도 곳곳을 감시할 수 있었다.
아마 다크몬드와 연관된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지금 생각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콘스텔라에는 다행히도 바르고 정의로운 자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한 인물 중에서.
그는 수도의 억제력이었으며 정의로운 인물들의 표본이기도 했다.
[가는 건가?]
“그래. 마탑주 아저씨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그 양반이랑.”
이건 현실이 아니다.
눈을 감고 뇌까렸다.
그래.
여긴 진짜 브락시아가 아니었다.
수습이야 어떻게든 될 테고.
“들이받고 안 되면 리겜하죠 뭐.”
-엌ㅋㅋㅋㅋㅋ
-그거야!
-우리가 원하던 것!
-이럴 때마다 너모 좋아~ 루삥뽕빵뽕ㅋㅋㅋㅋ
-세계 평화(물리)를 위한 길!
드레젠은 세이브를 했다.
싱글 패키지 게임인 세이브 더 브락시아는, 당연하게도 세이브가 되는 게임이었다.
기존 게임에서 사기적인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되긴 했다.
안 되면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행동하면 그뿐이었다.
“그럼-.”
와이렉스가 활짝 펴고 있던 날개를 접었다.
서서히 기울어지는 거대한 몸체.
드레젠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사슬을 단단하게 잡았다.
마나를 일으켜 몸을 보호함과 동시에 세상이 점점 거대해졌다.
-간드아아아아-!
-다크몬드 딱 대!
-만월 딱 대!
-오늘도 클립 준비되어 있습니다^^7
쿠오오오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내리꽂히는 와이렉스.
이미 좌표는 알고 있었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콘스텔라의 번화가에 본부가 자리하고 있을 터.
“저기. 가장 큰 탑으로 가.”
[저기 말인가?]
“그래. 마탑 바로 옆에 있는 두 번째 탑.”
탑.
수십 세기 전부터 존재했던 단단하고 거대한 구조물.
누군가는 성좌가 세웠다고 하지만, 아직 정확한 기원을 밝히긴 어려웠다.
수도, 콘스텔라에는 총 세 개의 탑이 존재했다.
“마탑은 다들 아실 테고. 저곳은 일종의 암시장입니다.”
온갖 물건을 취급하고, 돈만 있다면 누구든지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쇼핑몰.
다크몬드는 그 탑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정확한 명칭은 ‘에쿰-타베르나’.
누구에게나 평등한 상점으로 은빛 유성이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한 포효가 수도의 밤을 깨웠다.
다크몬드를 향한 선전 포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