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화
115화 - 반격
#1
엘프들의 전력은 소수 정예로 취급되었다.
전쟁 중에서도 그들은 특공대, 혹은 별동대로 활약했다.
긴 수명에서 나오는 지혜.
풍부한 마나와 지형에 구애받지 않는 기동성까지.
그렇기에 엘프들은 소중한 전력이었다.
“어떻게 움직이면 되는 건가?”
“간단해. 내가 말한 사람 하나를 빼 오는 거지.”
작전을 위해선 위도우가 필요했다.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드레젠이 깽판을 치고 시선을 돌릴 동안 엘프들이 위도우를 빼 오는 것.
그 후 합류해서 각자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다.
“다른 준비는 별로 필요 없겠지. 다들 실력 하나는 자신 있는 분야잖아?”
“맞아! 역시 뭔가를 좀 아네! 이 친구가!”
“아직 우린 널 믿을 수 없다.”
다른 엘프들은 아직 드레젠을 경계했다.
엘프와 인간의 사이엔 깊은 골이 존재했다.
어린 엘프를 잡아가는 인간.
인간의 전사들을 잡아 노예로 부리는 엘프.
“날 안 믿어도 상관없다. 그냥 작전이나 잘 수행해. 물건은 꼭 전해 주고. 그럼 출발하지.”
“……정이 안 가는 녀석이라니까.”
엘르엘라가 투덜거리곤 하이디엔을 바라봤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팀원들은 모두 그녀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었다.
하이디엔이 고르고 고른 정예이기도 했다.
그녀는 드레젠이 건네준 목걸이를 바라보다 말했다.
“움직이자.”
그녀는 표홀하게 나뭇가지를 밟아 사라졌다.
엘프답게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드레젠은 살아남은 이들을 모두 처리하겠다고 했다.
도착하는 것은 그들이 먼저일 터.
“늦지 않게 와라.”
“걱정하지 말고 가.”
드레젠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왜인지 모르게 하이디엔은 안심할 수 있었다.
든든한 느낌일까, 아니면 반드시 해낸다는 믿음 때문일까.
모호하게 간질이는 감정이라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마나를 다리에 집중했다.
-가즈아아아!
-엘프와 합동 작전이라닠ㅋㅋㅋ
-이 모든 것은 드좌의 큰 그림ㅋㅋㅋ
-진짜 한 번도 안 들키고 쟤네들 잡는 거 실화야?
“그림자 기사단이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는 이유가 있죠.”
마스터도 암살하는 집단이다.
이 정도 역량도 안 된다면 그림자 기사단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용사라는 신분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던 드레젠이었다.
저 아래 있는 치들보다 더 감각이 예민하고 전투력이 뛰어났던 이들과도 겨뤘다.
‘그때는 진짜…….’
충분히 차오른 마나를 확인하곤 다시 장막을 둘렀다.
만월.
위도우 그레인 전에 찬란하게 빛났던 보름달이 누군지 생각났다.
육체 개조를 많이 받았던 인물인 데다, 온갖 흑마법으로 떡칠을 했던 인간.
“흠…… 방금 만월이 누군지 생각났습니다.”
-누군데?
-누굽니까?
-궁금하다! 우리는!
-알고 싶다! 나는!
[‘뉴비환영해!’ 님 10,000코인 후원!]
[사장님. 알려 주세오.]
-ㅋㅋㅋㅋㅋㅋ
-매니저도 못 참게 하는 그는 대체…….
-ㅋㅋㅋ엌ㅋㅋ매니저가 직접 나섰닼ㅋㅋ
-매니저는 우리 편이지!
본명은 알 수 없었다.
위도우 그레인과 대화를 할 때 얼핏 들은 것이 전부였으니까.
얼굴은 본 적도 없었고.
실력은 당연히 최상위.
마스터에 필적할 만한 실력자에, 암살 실력만큼은 뛰어난 인물이라고 들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궁술로 암살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월 - 암궁.
한자로 풀이하면 그렇게 불렸던 이름이었다.
산등성이에서 도시에 있는 표적을 맞혀 일격에 사살한 일화는 유명했다.
아직도 호사가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곤 했으니까.
“정보는 물론이고 암살자들을 다루는 실력까지 상당하죠. 그의 화살은 성기사의 방패도 관통할 정도라고 합니다.”
겪어 보지 않은 일이라 그랬더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방심하면 안 되는 상대라는 것.
그를 비롯해서 다수의 암살자들과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레벨을 바짝 땡겨서 가겠습니다. 다 죽여야겠군요.”
-이거시 바로 암살이다
-ㅋㅋㅋㅋ아무도 안 보면 암.살!
-암살하러 가즈아!
서걱-.
루시퍼의 눈물을 착용한 드레젠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모두 베면서 레벨을 쭉쭉 올렸다.
이상하게 90레벨 이상부터는 정말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부터가 진짜라는 얘기겠지.’
바닥이 황금빛 웅덩이로 물들 때쯤, 눈앞에는 한 명의 생존자만 남아 있었다.
현재 레벨은 96.
이번 일만 처리한다면 아마도 99렙이 될 것이다.
“사, 살려…….”
“미안하군.”
살려 줄 수 없었다.
이미 그렇게 변해 버렸으니까.
드레젠은 쓴웃음을 지으며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숏 소드를 휘둘렀다.
서걱-.
폴리곤 덩어리가 흩날리며 마지막 암살자가 사라졌다.
“챙길 건 몇 개 챙겨 가죠.”
암살자들은 기본적으로 여러 도구를 사용하여 의뢰를 완수했다.
품 안에서 다양한 도구가 나왔다.
수적으로 열세인 드레젠에겐 좋은 생존 수단이 될 도구들이었다.
뒤적거리며 아이템들을 입수한 드레젠.
품목은 다음과 같았다.
[아르딘의 체액 10ea]
[연막탄 10ea]
[마비 투척 나이프 5ea]
[독 투척 나이프 5ea]
[예비용 숏 소드 2ea]
“그리고 잠깐 캠 좀 끄겠습니다. 옷 좀 갈아입어야 하니까.”
-?!
-ㅗㅜㅑ
-보여 줘 보여 줘!
-하악하악!
-오빠! 나 죽어어어!!(덜렁)
-ㅂㅇㅈ!
-ㅂㅇㅈ!
채팅 창은 폭동이 일어날 기세였다.
하지만 드레젠은 가차 없이 캠을 꺼 버렸다.
지금 폭동이 일어나는 것보다 심의가 더 중요했으니까.
“흠…… 이 정도면 됐으려나.”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가 다시 캠을 켰다.
역시나 채팅 창은 난리가 나 있었다.
암살 복장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드레젠.
오늘은 마침 달빛도 희미했다.
“정말 암살하기 좋은 날씨군요.”
노을이 지고 있는 하루, 그가 와이렉스를 호출했다.
지금 위도우는 뼈 빠지게 도망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살아남으면 다크몬드의 주인이 되는 일이었다.
아마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드레젠은 상공에서 날아오는 와이렉스를 향해 점프했다.
멋진 탑승과 함께, 그는 다크몬드의 본거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2
피슉-!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독침에, 위도우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디서부터 정보가 빠져나갔을까.
혹은 자신이 속았던 것일까?
‘젠장.’
그의 측근 중에 몇은 암습을 당해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엄청난 숫자의 암살자들이 길드에 들이닥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뼈아픈 손실은 있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나 검을 휘두르는 암살자의 공격을 막아 내며 생각했다.
드레젠.
불쑥 나타나서 거래를 제안했던 그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할레단 후작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팀 파이트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죽어라-!”
“지긋지긋한 것들.”
뒤에서 찔러 오는 검을 겨드랑이 사이에 껴, 막은 다음 우득 꺾어 버렸다.
괜히 반월이 된 것이 아니었다.
얼쩡거리는 것들을 모두 베어 낸 위도우는 도시의 지하로 숨어들어 갔다.
“후우…… 이거 완전히 속은 거 아닙니까?”
“아직 모르지. 분명한 것은 이미 돌이킬 수는 없다는 거다.”
“젠장! 대체 그 새X는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평단원일 때부터 자신과 함께했던 부하들이 성을 냈다.
능력 하나만을 보고 뽑은 인재들이었기에 쉽게 죽지 않았다.
살아만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일단 도시를 벗어난다. 만월을 치기 위해서는 콘스텔라로 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위도우는 남은 마나를 체크했다.
그럭저럭 일반적인 암살자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기척이 느껴졌다.
전투를 치르며 이동했으니 마나의 자취가 줄기줄기 남았기 때문.
“서둘러 이동하자.”
“알겠습니다.”
“어딜 가시나.”
그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었다.
바로 앞쪽에서 여러 인영이 나타났다.
위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 무슨 짓을 벌이나 했더니 고작 반란일 줄이야. 드레젠이라는 놈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
“…….”
위도우는 눈앞의 사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월의 측근이자 실질적인 행동대장인 자.
반월과 만월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집행자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드레젠이라면 벌써 죽었을 테지. 정예 150명을 보냈으니까.”
“그가 그렇게 쉽게 죽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데.”
일말의 불안감을 숨기면서도 뻔뻔하게 말했다.
불안감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지 훤히 보였으니까.
작은 심리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칼날은 치명적이고 날카로웠다.
위도우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주변에 있는 놈들은 미지수. 빠져나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해야 한다.’
정면 승부는 승산이 없었다.
자신들은 전사나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였다.
휘릭-.
손에 들린 대거의 감촉이 오늘따라 끈적했다.
“그가 살아온다고 해서 너희들을 구할 수도 없지. 다 죽여라.”
이전보다 거세진 공격들이 쏟아졌다.
위도우는 감각을 바짝 세우고 노도처럼 닥쳐오는 공격을 감당했다.
마나가 잔뜩 담겨 있는 칼날, 치명적인 독과 마비 독까지.
그가 다크몬드에 몸담고 있으면서 배웠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노렸다.
“위도우 님, 이쪽으로!”
“끄아악!”
부하 중 후방을 맡고 있었던 자 한 명이 결국 비명을 질렀다.
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모래처럼 굳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위도우는 입술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분함을 삼켰다.
“고작 저딴 놈이 뭐라고.”
단단한 워커가 이미 굳어 바스러지고 있는 부분을 꾸욱 밟았다.
다 큰 성인에 혹독한 훈련까지 받았지만,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올 정도의 고통이었다.
뿌득-.
고통을 참고자 앙다문 이가 부서졌다.
“끌고 가서 캐내라.”
“알겠습니다.”
집행자라고 불리는 남자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만월이 했던 얘기를 상기했다.
-위도우가 진짜 반란을 꾀하고 있다면 목적지는 콘스텔라일 겁니다.-
-재미있는 구도가 되겠군요. 군데군데 인원을 배치하면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겁니다.-
-그를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군요.-
만월, 암궁이 했던 말이었다.
제국 수도에서 얌전히 있던 암살자들이 움직였다.
위도우가 살아서 콘스텔라에 갈 수 있는 확률?
글쎄.
설령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암궁의 화살에 대가리가 꿰뚫리리라.
‘촉망받던 인재였는데, 아쉽게 됐군.’
집행자는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며 위도우의 뒤를 쫓았다.
#3
완전한 밤이 되었다.
위도우는 길 한복판에서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통제했는지, 영지의 상비군도 중앙군도 보이지 않는 상황.
도움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몰려드는 인원들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허억…… 허억…….”
“이런이런, 이제 막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벌써 지친 건가?”
조롱하는 말투.
위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행자를 쳐다봤다.
달려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 더욱 절망적이었다.
“어떻게 죽여 줄까? 응? 회를 떠 줄까? 아니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능욕을 당하면서 죽게 해 줄까? 흐흐, 어떤 것을 해도 재밌겠군.”
“…….”
이대로 끝인가.
집행자가 검을 들었다.
“재미가 없군. 달콤한 비명을 듣고 싶었는데.”
쩝, 하고 입맛을 다신 그가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위도우는 그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집행자는 묘한 기시감에 움직임을 서둘렀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오늘은 유난히 긴 밤이 되겠어.”
누군가가 흘린 목소리가 암살자들의 귀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