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0화
110화 - 성좌의 아내
#1
이 세상엔 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이 모두 이뤄져야만 할까?
딱딱 맞아떨어지면 좋겠지만,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재미있군.”
그림자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계획과 계획이 부딪치면 그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는 재미있는 소설을 읽듯,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드레젠이라고 했나? 꽤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딱-.
그가 손을 튕기자 그림자가 옅어졌다.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기척을 드러냈다.
“조사를 시작해라. 흔적은 찾기 쉬울 거다. 와이번을 타고 이동하는 자는 그밖에 없으니.”
기척이 멀어져 갔다.
그는 종이를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천하의 다크몬드를 뒤집어엎으려는 계획.
처음 그 계획을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재미있는 친구들이야.”
계획과 계획이 맞물릴 때, 결국 남는 것은 더 치밀하고 강한 쪽의 계획일 것이다.
재미있었다.
과연 이 계획의 끝이 어떻게 될지, 계획을 완성하는 자는 누가 될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림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빛이었다.
#2
-그래서 여긴 어디임?
-지도가 없으니 불-편
“이곳은 할레단 후작가와 제국의 수도 근처에 있는 작은 성소입니다.”
와이번을 타고 내린 곳은 허름한 성소였다.
주변 마을에 있는 자들이 이따금 들르는 곳으로, 상당히 개방적인 장소였다.
문제는 이런 장소에 루시퍼의 눈물이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시청자들은 걱정했다.
-벌써 누가 가져간 거 아님?
-엌ㅋㅋ그랬으면 레전든데;;
-대놓고 있는 장소에 있는데 안 가져간 게 더 이상함ㅋㅋㅋ
[‘울랄라’ 님 5,000코인 후원!]
[쓰앵님 있었는데 없었으면 어떡합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뭐가 뭔지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퍼즐이 조금 복잡하거든요.”
빈티지 숍에 아무리 좋은 물건이 숨겨져 있다 한들, 알아보는 이가 없으면 그저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하물며 그 장소가 숨겨져 있으면 찾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 후반부 콘텐츠는 이곳, 어둠의 성소를 확인하면서 성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수학여행 시간입니다.”
-엌ㅋㅋㅋㅋ
-킹학여행
-나는 경주를 너무 많이 갔어ㅜㅜ
-난 제주도 갔다 왔는뎈ㅋㅋ
-비행기 그때 첨 타 봄!
수많은 추억들이 올라왔다.
드레젠 본인도 수학여행에 대한 추억이 있었다.
그 기분을 떠올리며 성소의 구석으로 향했다.
“여기 올 때는 횃불 하나만 챙겨 오시면 됩니다. 이미 탐지나 추적술이 제법 높으신 분들은 그냥 오셔도 되고요.”
성소에는 작은 신상을 모셔 놨는데, 그 모습이 꼭 현대에서 묘사하는 악마를 닮아 있었다.
드레젠은 다시 한 번 세계관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은 악마라고 해서 마족이 아닙니다. 성좌 중에서도 악마들이 있거든요. 마족은 일단 기계족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계관의 상식이 부서진다
-메……모…….
-크킄 이곳의 악마는 눙물을 흘리겠군
-;;;;
마족의 하수인은 주로 언데드나 그들에게 세뇌된 몬스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훗날엔 몬스터 전체가 마족과 손을 잡고 하수인이 되었지만, 아직은 머나먼 이야기였다.
“기계들의 위에 있는 자들이 무의 추종자들입니다. 조금 복잡하긴 한데 덤벼 오는 놈들은 모두 마족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사람도?
-일단 덤비면 마족인 거임ㅇㅇ
-ㅋㅋㅋㅋㅋ내 편이 아니면 다 마족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긴 하짘ㅋㅋㅋ
이분법적인 사고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브락시아를 떠나기 전에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자신도 포함해서.
“그럼 비밀의 방으로 가 볼까요?”
서론이 너무 길었다.
악마들은 날개의 숫자를 통해 서열을 정한다고 했다.
지금 신상으로 세워져 있는 악마의 날개는 2쌍.
“두 쌍의 악마는 인간으로 따지자면 기사 정도 계급입니다. 오크 대전사와 비슷하겠네요.”
하지만 신은 아니지.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악마는 노련한 기사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세 쌍, 더 나아가서 네 쌍 정도는 되어야 신이라고 불릴 만하지 않을까?
드레젠은 날개 부분을 잡았다.
“이 날개는 하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겹쳐 있는 날개입니다.”
소복하게 쌓여 있는 이끼의 감촉이 까끌까끌하게 전해졌다.
오랜 시간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티가 날 정도.
브락시아의 신상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신상이었다.
신의 형태를 한 것은 사람이 건들 수 없다는 문화 때문이었다.
“이곳 브락시아 사람들은 신상에 손을 대는 걸 금기시합니다. 감히 신성한 성좌를 인간의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오
-우리는 맨날 기름칠하지 않나
-ㅋㅋㅋㅋ우리랑 다르네
-진정한 의미의 존경일지돜ㅋㅋ
그래서 신전에 있는 신상도 이끼가 껴 있고, 닳아서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신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철컥-.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겹쳐 있던 날개를 폈다.
네 쌍의 날개가 펴진 악마의 모습이 되었다.
“이게 첫 번째 퍼즐입니다.”
악마의 눈이 잠시 붉게 점멸했다.
그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열렸다.
제한 시간은 20초.
그 안에 들어가야지 무사히 유적에 입장할 수 있었다.
“20초 안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탐험이다!
-곰보겜 되는 거 아니냐 ㅜㅜ
-아까 전투 없다고 했음ㅋㅋㅋ
보통 이런 유적이나 던전에는 전투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이곳은 예외였다.
오래전에 다녀간 누군가가 몬스터를 싹 다 날려 버렸기 때문에.
쿵, 하고 문이 닫히자 진득한 어둠이 시야를 물들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드레젠은 손을 들어 화염 마법을 일으켰다.
“여러분은 횃불 챙겨서 오세요.”
-드레젠 특 : 나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
-킹정이라 할 말 없음
-ㅋㅋㅋㅋ우리 같은 브린이는 횃불 꼭 챙기라 이 말이에오
-브린이들 서러워서 우러요ㅠㅠ
마법을 익히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육체긴 했지만, 글쎄.
현대에 살고 있는 일반인들 중에 마법을 익힐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될지 몰랐다.
그냥 속 편하게 횃불이나 야광석을 들고 오는 것이 나았다.
“계단을 내려가서 무조건 왼쪽 벽을 따라가세요.”
내려가니 보이는 것은 거대한 미궁.
벽에는 빼곡하게 그려진 벽화들이 드레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쥐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악마와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천사들의 싸움.
드레젠은 벽화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천사와 악마는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쟁이었죠,”
미로 안에는 뚜벅거리는 소리만 가득 울렸다.
드레젠은 자신이 공부한, 그리고 겪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성좌들이 왜 이곳, 브락시아에 오게 되었는지.
“한 남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죠.”
생명체를 부활시키는 힘.
새로운 육체를 그려, 생명을 불어 넣는 힘.
자신의 고향을 구하고 신족과 마족의 전쟁을 종결시킨 그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자가 발견한 것이 바로 브락시아라고 합니다. 마법도, 오러도, 마나도 알지 못했던 브락시아에 내려와 마법과 마나를 전수했다고 하죠.”
역사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별처럼 내려와, 아직 깨치지 못한 것들을 가르쳤다. 그는 세상의 빛이 되었고, 그때부터 역사는 새롭게 흘러갔다.]
그는 알 수 없는 재앙들을 막았고, 그의 옆에 있던 자 중에는 신위를 보였던 이들도 있었다.
화륵-.
불빛을 키우며 벽화를 조금 더 자세하게 보여 주었다.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천사와 악마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루시퍼, 그리고 아스모데우스는 끝까지 저항하던 악마였지만 끝끝내 굴복하고 맙니다.”
루시퍼는 그 후, 이곳에 몰래 내려와 여흥을 즐겼다고 나와 있었다.
그는 무자비한 폭군이었고, 냉혈한이었지만 딱 한 번,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루시퍼는 최강의 신좌 중 한 명이었습니다만, 그가 사랑한 사람은 인간이었죠.”
그것도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가 수명을 다하고 죽었을 때, 루시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곳은 그녀의 무덤입니다.”
악마를 숭상하는 자들은 그녀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상태 - 마트리나(Sancte - Matrina).
직역하면 성스러운 대모였다.
“여러분은 지금 성녀의 무덤을 보고 계신 겁니다.”
-역사 교육 오늘도 미쳤네
-크으 더 해 주세오 슨생님
-역사 시간보다 더 재밌는 게임 역샄ㅋㅋㅋ
드레젠은 왼쪽 벽을 따라 쭉 걸었다.
마트리나는 루시퍼의 권능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근력.
인간을 초월한 마나.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그녀의 철퇴는 몬스터들에겐 곧 재앙이었다.
“마트리나는 치열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 홀로 일만에 달하는 언데드를 처리한 건 유명한 일화죠.”
아르게논 대륙에서 단 한 명의 지원군으로 참전, 일대를 모조리 정리한 일화는 전설로 기록될 정도였다.
실제로 천주교와 비슷한 방식의 종교가 있었는데,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데이몬.
악마들의 왕이었다.
“여기까지 도착했으면 두 번째 퍼즐도 끝났습니다.”
꼬불꼬불한 길을 30분 정도 걸었다.
오직 왼쪽 벽만 바라보고 오니 끝이 보였다.
조그마한 철문.
그것을 여는 것이 세 번째 퍼즐이었다.
“세 번째 퍼즐은 간단합니다. 제가 외우는 말을 그대로 하면 됩니다.”
단어를 매개로 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철문.
이 안에 루시퍼의 눈물이 잠들어 있었다.
드레젠은 문에 손을 대고 말했다.
“위대한 성녀시여, 그대의 슬픔을 거두게 해 주십시오.”
파직-.
문에 걸려 있던 마법이 해제되었다.
아주 간단한 파훼법이었지만, 이걸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이걸 알아내기 위해 고생 좀 했지.’
이곳에서 갈려 나간 학자의 수만 열이 넘었다.
모험가들도 도전하게 되지만, 결국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그들 위도우 그레인이었고, 드레젠은 먼 훗날 그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제가 했던 말을 명심하세요. 이에 관련된 문서는 아크리움 신전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철문이 열렸다.
위도우 그레인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아무것도 없다고 했었다.
드레젠도 그 말을 믿었고, 실제로 문을 열고 나서 죽은 자는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으음?”
-드디어!
-뭐 있는디?
-뭐지? 뭐가 있는데?
-여자다!
-여자?!
빨리 매니저를 뽑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드레젠은 눈앞에 있는 인물을 바라봤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 드레젠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드레젠과 마주쳤을 때,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