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화
108화 - 번개 튕겨 내기
#1
[할레단 후작가]
[기사 3 / 마법사 6]
[화염 2 / 나무 2 / 물 3 / 금속 3]
[드레젠]
[도플갱어 1]
[번개 2]
화려한 할레단 후작가와는 다르게 조촐한 드레젠의 모습.
후작은 피식 웃었다.
건방진 녀석이 홀로 덤비다니, 번개라는 속성은 제법 빠른 속성이었다.
나무 속성의 효과로 정령까지 튀어나온 자신들은 아홉 명.
‘좁은 전장에서 이들을 모두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심지어 마법 공격력이 반절 이상 증폭되는 효과까지 가졌다.
기사는 어떤가.
지잉-.
성좌가 부여해 준 마나 보호막이 그들을 보호했다.
“가라. 금속 마법사들은 빠른 마법으로 최대한 많이 타격하라.”
“알겠습니다. 어라?”
잠시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드레젠이 없어졌다.
할레단 후작은 순식간에 스캔 마법을 펼쳤다.
제아무리 성좌에게 특성과 직업을 부여받았어도, 타 직업의 기술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전유물인 그림자 장막 역시 마찬가지였다.
‘10초밖에 안 되지만, 그 시간은 충분히 크다.’
“크아악!”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마법사 하나가 황금빛 폴리곤을 뿜으며 리타이어되었다.
경기 시작 5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적의 그림자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기술, 그림자 기사단의 고유 기술이 또 하나 등장했다.
“그림자 기사단이 쓰는, 그림자밟기라는 겁니다.”
-오오 신기술이다!
-무슨ㅋㅋㅋㅋㅋ
-경기 5초 만에 한 명 컷하고 시작하네
-이거 진짜 이기겠는데?
드레젠은 과거, 헤시라둔을 상대할 때보다 몇 배는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게임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성장은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곤 했다.
어제 고블린을 잡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오크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게임은 그게 가능하거든.’
특히 드레젠 같은, 비정상적인 성장력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마탑주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드레젠의 일격을 보고 감탄했다.
“깔끔하군.”
“……이전엔 실력을 숨겼던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여유롭게 변했군요.”
마탑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흡족하게 웃었다.
카이렌을 죽였던 때의 실력이 진짜가 아니었든, 그새 실력이 향상되었든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흘흘, 말년에 좋은 친우를 얻겠구나.’
경기는 계속되었다.
마법이 난무했고, 기사들이 드레젠을 포위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에게, 쉽사리 덤벼드는 자는 없었다.
“아, 너. 그래 받을 빚이 있었지.”
“손쉽게 당해 줄 것 같은가!”
드레젠이 모나르를 향해 칼끝을 겨눴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모나르였지만, 이미 드레젠은 그 자리에 없었다.
파직-.
그가 지나온 자리에 번개의 잔상이 남았다.
번개의 능력이었다.
“전투 마법사면 기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배틀 메이지.
전투 마법사들은 일반적인 마법사들보다 훨씬 빠르고 민첩했다.
그렇지만 암살자들의 꼭대기에 있는 그림자 기사단보단 아니었다.
서걱-.
“끄악!”
“넌 잠깐 그대로 있어라.”
일부러 리타이어를 시키진 않았다.
그 대신, 드레젠은 전투 불능이 된 모나르를 잡아 인질로 삼았다.
“젠장, 공자님이!”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진짜 죽지 않는다! 뭣 하고 있는 거야!”
[매직 미사일!]
[바인드!]
다양한 마법들이 드레젠을 노리고 날아왔다.
드레젠은 모나르를 냅다 던져 버렸다.
투쾅-!
각양각색의 마법들이 그대로 모나르의 몸에 직격했다.
“푸하하핫! 이거 걸작이군!”
드레젠은 광소하며 내달렸다.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리타이어한 모나르.
그에 대한 처벌은 경기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드레젠은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기 시작했다.
기사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마법사들만 집요하게 노렸다.
빠른 기동력, 그리고 압도적인 파괴력을 앞세웠다.
할레단 후작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2
“……이럴 수가.”
경기 시작 10분.
희미한 번개의 잔향을 두르고 있는 사내에게, 모든 이가 리타이어되었다.
남은 것은 후작 본인뿐.
6서클.
마스터를 넘볼 수 있는 경지였다.
‘게다가…….’
아직도 도핑의 효과는 남아 있었다.
마법을 캐스팅할 때마다 뻥튀기되는 위력을 몸소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닿지 않았다.
“설마 이렇게 형편없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마족들이 본격적으로 넘어오자마자 죽었는지도 모르지.
일곱 영웅을 뒷받침해 주는 귀족 가문들 중에 할레단 후작가는 없었다.
강일 본인이 넘어오기 전에 멸망했거나, 아예 몰락해 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뭐라……?”
“너무 형편없잖아. 전투 마법사라고? 빠르기만 하다고 전투 마법사인 줄 아냐?”
“그런 모욕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드레젠은 한숨을 쉬었다.
내심 쫄깃한 전투를 기대했다.
1 대 8,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들만 모여서 전투를 치르는 팀 파이트였으니까.
하지만 드레젠은 실망했다.
“그럼 어디 보여 봐. 그 잘난 전투 마법이라는 거.”
드레젠은 검을 늘어뜨렸다.
후작은 들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캐스팅을 했다.
전투 마법사답게, 간결하고 빠른 마법 위주로 드레젠을 노렸다.
“진짜 전투 마법사는, 검으로 튕겨 낼 수준의 마법을 쓰지 않습니다.”
드레젠은 여유롭게 마법들을 튕겨 냈다.
파이어볼, 헤비 봄버, 매직 미사일을 비롯해 다양한 마법들이 쏟아졌지만, 모두 튕겨 냈다.
단 하나도 피하지 않고 모조리!
-ㅗㅜㅑ;;
-이건 킹정이다;;
-후작 표정 봐ㅜㅜ
-마치 우리를 보는 것 같다
-지금 내 표정도 비슷함ㅋㅋㅋㅋ
[‘뉴비환영해!’ 님 1,000코인 후원!]
[아…… 내 안전 자산이ㅜㅜ]
“이것도 받아 내나 보자!”
이제 경기는 뒷전이고, 아예 드레젠을 맞히기 위한 마법 쇼가 되어 버렸다.
할레단 후작은 방어도 포기하고 비장의 수를 준비했다.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고유 마법.
“드레이크도 일격에 보냈던 마법이다. 지옥으로 떨어져라!”
“거참…….”
유치해도 너무 유치한 발언이 아닌가.
드레젠은 마나를 검에 불어 넣으며 마법을 바라봤다.
묘하게 익숙한 마법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중이었다.
“분명…….”
마법명 : 풀게트라.
뇌전의 광선으로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일격이었다.
일곱 영웅 중 한 명이 즐겨 사용하던 마법이었다.
문제는 이 마법이 원래 마족의 하수인 중 하나가 쓰던 마법이라는 것.
‘아아, 어째…….’
운명의 수레바퀴가 있다면 콱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의 전개.
2대 용사를 키워서 시뮬레이션을 완성해야 하는데, 왜 자신의 세션이 진도가 가장 빠를까?
헛웃음이 나왔다.
“저건 위험한데.”
VIP석에 앉아 있던 황자가 중얼거렸다.
느껴지는 마나가 심상치 않았다.
오우거 정도는 한 방에 날려 버릴 파괴력을 담고 있는 마법이었다.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드레젠 저자가 택한 일이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기사단원 한 명의 걱정을 묻어 버린 단장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드러냈다.
객기와 만용, 그리고 자신감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자신이 말한 내용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어디 한번 볼까.’
황자에게 어울릴 재목인가.
기사단장은 더욱 냉철한 눈빛으로 대전을 지켜보았다.
쿠아아아아-!
노랗다 못해 새하얀 뇌전이 드레젠을 향해 쏘아졌다.
‘이 마법은…… 여기가 약점이었던가.’
드레젠은 눈을 부릅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주변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그의 눈은 마나의 결을 찾았다.
“흐읍-.”
오러 블레이드까진 필요 없었다.
검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때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보통 때라면 비껴 내겠지만-.”
지금은 뒤쪽에 사람들이 있는 상황.
다 자신의 노동력이 되어 줄 사람들이었다.
마나의 결을 따라 검을 쳐올렸다.
두 손으로 단단하게 손잡이를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그 자리에서 폭발할 테니까.
“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마법을 튕겨 냈다.
그그그극-, 하는 느낌과 함께 거대한 지렁이가 검날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을 가득 채웠던 빛이 사라졌다.
멍하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할레단 후작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관중들만 보였다.
“후우…… 이게 끝이냐?”
“……어찌 이럴 수가.”
“내가 말했잖아. 형편없다고.”
-아아아아아
-킹편없다
-ㅋㅋ뤀ㅋㅋ넼ㅋㅋㅋ
-킹전 자산이 없어지는 순간이닼ㅋㅋㅋ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드레젠에게는 털끝 하나 닿지 않았다.
‘이 내가…… 내가 이렇게 무기력하다고?’
후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껏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대 할레단 후작가가 고작 한 사람 때문에 무너지게 생겼다.
수 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위대한 가문이!
“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무너진다고?”
“자업자득이지. 처신을 잘하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잖아. 그치?”
-킹정이지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어우 사이다 보소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드레젠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빨리 경기를 끝내고 대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삶의 의지를 잃으면 안 되겠지. 일단 경기를 끝내지.”
“크윽…….”
후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마나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마나를 쏟아부은 결과는 정말 초라했다.
도핑까지 했지만 드레젠에게 들어간 유효타는 하나도 없었다.
“그 정도 도핑까지 했으면서 이 정도 위력밖에 안 나오면 진짜 심각한 거라고.”
“도핑이라고? 증거 있나?”
“마법의 잔재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는데 뭘. 지금까지 안 걸려 왔다고 다 속일 줄 알았나?”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경기가 시작될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집중하느라 굳이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밝힐 건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무엄하구나. 정말로 무엄해. 감히 도핑을 논해?! 이 신성한 결투에서!”
“사실 성좌들이 도핑을 금지한 건 아니거든. 설마 성좌들이 결투에 임하는 자들의 신체도 모를까? 하지만 제국 내에서는 불법이지, 안 그래?”
마법이 폭발한 흔적을 조사하면 도핑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오우거 파워 포션을 복용하면 훨씬 넓어짐과 동시에 불규칙한 마나의 잔재가 남았다.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훗날 마족과의 전투 땐 없어서 못 파는 물약이 되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있을 거야? 아니면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명예를 지킬래?”
“……크으으.”
후작은 벌겋게 변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충혈된 눈동자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선언했다.
“항복한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나와야지.”
[경기 끝났습니다! 계약서의 내용대로 이행될 것을 선언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경기는 드레젠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는 씨익 웃으며 경기장 밖에서 치료하고 있는 모나르를 바라봤다.
푸르죽죽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은 꽤 볼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