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6화
106화 - 나를 복제할 수 있는 힘
#1
서리족은 돌로 만든 집에 살았다.
심미적 감각, 손재주가 뛰어난 드워프와 달리 다소 투박한 집이었다.
인테리어는 없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인간들이 사는 집에 비해선 많이 누추하죠? 저희가 이사를 많이 다녀서……. 헤헤.”
친위대 중에는 여성 친위대원도 있었다.
서리족은 강한 자의 대접을 받을수록 귀빈이라는 소리가 있었다.
친위대가 직접 안내를 맡았다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지.
“쉴 수만 있으면 되지 뭐. 그나저나 주변에 약초 같은 건 좀 있어?”
“약초는 구비해 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내어 주는 건 문제 되지 않아요.”
“그럼 조금만 써도 되겠나? 대금은 지급하지.”
여성 친위대원이 손사래를 쳤다.
귀빈에게는 무언가를 받으면 안 된다.
선의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뇨아뇨,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음껏 써도 됩니다. 대금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딱딱한 말투였지만 정감이 듬뿍 묻어났다.
-공짜로 준다는데 뭐
-ㅋㅋㅋㅋㅋㅋ이거 약간 클리셰 아니야?
-강한 부족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아재요’ 님 3,000코인 후원!]
[아재요, 밤에 조심하세요.]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서리족은 그런 문화가 없었으니까.
‘아마존 신화가 한몫했지.’
여성들만 살았다고 하는 섬의 이야기는 너도나도 전부 아는 이야기였으니까.
서리족은 그런 문화는커녕,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결혼도 일찍 해서 자녀도 많았고.
공동 육아라는 점에서 아이를 많이 낳아도 부담 없는 문화가 발달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그런 뻔한 상황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약초를 보관하는 동굴이었다.
경비가 꽤 삼엄했는데, 울타리만 몇 겹으로 둘러져 있었다.
“귀인께서 약초가 좀 필요하다고 하신다.”
“알겠습니다. 여기, 출입증 작성해 주십시오.”
친위대원은 능숙하게 출입증을 작성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비들이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을 뒤로하고, 드레젠은 몇 가지 약초를 챙겨 방 안에 틀어박혔다.
지금부터 그가 만드는 것은 할레단 후작가와의 팀 파이트에 필요한 약물이었다.
“자, 돌아온 연금술 강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건 아마 프로 리그에서도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보고 있죠? 다들?”
-프로 리그에서도?
-그럼 따로 만들어 가야 하나?
-일단 들어 봐야 할 듯
일단 여왕의 뇌를 통째로 집어넣었다.
약초를 모두 넣어, 그냥 끓였다.
약초의 양은 딱히 상관없었다.
들어가는 약초도 전부 구하기 쉬운 것들이었다.
“여왕의 뇌가 약초들을 흡수해서 거대한 내단으로 변합니다. 이건 영구적인 거라, 캐릭에 적용이 됩니다.”
-진짜?!
-크으 영구 강화라니;;
-근데 레이드 클리어하는 게 수준급이라 ㅜㅜ
-빡센 만큼 보상은 제대로 주는구만ㅋㅋㅋ
하루 정도 푹 고아 두면 이제 탱글탱글한 내단이 완성될 것이다.
이제 한숨 자고 나면 완성이 될 텐데, 드레젠은 딱히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몸이라 상관없었다.
“잠을 자기엔 좀 아까우니까 방어구 하나 만들러 갈까요?”
-아니 이 사람 방어구도 만든다고?
-대체 못하는 게 뭐얔ㅋㅋㅋ
-저번에 대장장이 일도 할 줄 안다고는 했는데
“대장장이까진 아니고, 그냥 대충 만들 수 있는 정도입니다. 오랜만에 망치 좀 잡아 봐야겠네요. 지금 현실은 몇 시죠?”
-오후 2시입니다.
-2시
-14시!
-14시 뭐얔ㅋㅋㅋㅋ
-군-
-병원도 14시라고 말한다구욧
10시에 방송을 켜고 12시 반쯤 게임에 접속했으니 점심 먹고 낮잠 잘 시간이었다.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ASMR을 들려줄 수 있겠지.
드레젠은 오늘 가지고 왔던 얼음덩이들을 챙겼다.
여기다 간단한 인챈트만 한다면 속성도 정할 수 있었다.
“오늘 만들 방어구를 착용하고 팀 파이트에 참가할 겁니다. 그럼 가시죠.”
서리족의 마을은 있을 건 전부 있는 곳이었다.
필요한 만큼 쓰라는 마을 사람들의 배려를 그냥 넘기면 안 되지.
드레젠은 근처 대장간으로 향했다.
“야심한 시각에 누구요?”
“외부인입니다만. 초청받은 사람이죠.”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지만, 풍채는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데다가, 한국에선 맞는 상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락부락한 몸매를 지녔다.
“당신이 골칫거리를 해결해 준 사람이구만. 이 늙은이에게 무슨 용무인가.”
후욱-.
불이 들어오고 대장간의 안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재료들.
작은 화로와 큰 모루와 망치.
사이즈별로 나뒹구는 집게까지.
‘있을 건 다 있는데.’
“재료 좀 빌리러 왔습니다. 이걸 좀 사용하고 싶어서요.”
“영원의 얼음인가. 가공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 정도는 할 줄 압니다.”
늙은 대장장이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라고?
영원의 얼음은 서리족에게도 악명이 높은 재료였다.
그 역시 가공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릴 정도로 다루기 어려웠다.
“그 정도라면 어디 가서 대장간 차려도 손주 놈까진 먹고 살겠군.”
“과찬이죠. 번개의 정수 있습니까?”
“썩어 넘치지. 재료는 마음대로 쓰게. 귀인에게는 모든 것을 베풀어도 모자라니까. 내가 해 줘도 되는데 말이야.”
드레젠은 고개를 저었다.
장인의 기술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들의 기술은 분명 존중받아 마땅했다.
장인들이 쌓아 올린 세월과 땀, 홀로 쉬었을 한숨과 손에 박였을 굳은살을 웃으며 넘겨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당한 대가를 주고 의뢰를 맡겼다.
“당신의 기술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는 없죠. 저 혼자 하겠습니다.”
-착해;;
-와 진짜 존중이 뭔지 아는 사람이다
-리스펙!!
-오빠 나 반했어!
-덜렁
드레젠은 선선한 미소를 짓고 주변을 훑었다.
일단 동선을 짜고 움직여야 작업이 편해질 테니까.
재료를 모으고, 얼음 결정을 주르륵 놓았다.
장인이 일어나서 끈을 가져왔다.
“갑옷 만들려는 게지? 이 정도는 도와줘도 괜찮겠지.”
“아, 감사합니다.”
갑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치수를 재고, 옷본을 만들어야 했으며, 끈과 다양한 도구로 움직임을 확보해야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이뤄졌다.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갑옷 만드는 거 엄청 복잡하네;;
-그냥 망치만 땅땅땅 두들긴다고 되는 게 아니었음ㅋㅋㅋㅋ
-근데 그걸 다 하는 드센세는 대체;;
“하루 하고 반나절 정도 걸리겠네요. 다들 주무시고 오십시오.”
-땅땅 낮잠 타임인가
-묘하게 빠져든다 빠져들어
-크으 팔뚝 섹시한 거 봐ㅋㅋㅋㅋ
작업의 시간이었다.
드레젠은 집중해서 작업을 시작했다.
치이익-!
영원의 얼음이 녹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ASMR이 시작되었다.
#2
“후아암-.”
VR로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한 시청자.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할 정도로 평화로운 방송이었다.
항상 전투와 급박한 상황으로 점철되어 있던 드레젠의 방송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평화로웠다.
그와 비슷한 상황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후아아아암~.”
-ㅋㅋㅋㅋ방송하기 싫어?!
-저러다 코 골면 레게노
-ㅋ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
-다영 님 정신 차려요!
“으에? 아…… 좀 졸았나 보네요. 진짜 너무 평화롭다.”
다영 역시 드레젠의 방송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땅땅 두들기는 소리가 너무 평화로웠고, 작업을 하며 내는 소리가 정겨웠다.
시청자들이 조금 빠져나갔지만, 무시할 수준이었다.
“근데 눈을 뗄 수가 없네. 엄청 잘 만드신다.”
뭔가를 잘하는 남자는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지.
다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의 눈에서는 하트가 뿅뿅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 손놀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다영은 묘하게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봤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착각인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을 정도로 기시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착각이겠거니, 하고 생각을 감추려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행사장에서의 일.
드레젠이라는 그 스트리머는 묘하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주변에서 봤을 수도 있겠지.’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고 잠 좀 깰 겸 편의점이나 다녀오기로 했다.
“저는 편의점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잠 깨러 가는 다영 짱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차피 우리는 드센세 방송 보면 되니까 다녀오라굿!
-ㅋㅋㅋㅋㅋ개 웃기눜ㅋㅋㅋ
-다영 없는 다영 방송ㅋㅋㅋㅋ
다영은 외투를 챙겨 입고는 마이크를 꺼 두었다.
혹여 실수할까 봐, 두어 번 확인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편의점으로 갔을 때, 이전에 보이던 아르바이트생이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아?’
공방 위에서 노니는 드레젠의 손놀림.
계산을 하기 위해 물건을 집고, 봉투를 잡던 손놀림이 겹쳐 보이는 건 착각이었을까?
다영은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그 실루엣, 그 하관.
이 편의점에서 정말 많이 보던 얼굴이었다.
다영은 홀로 감탄했다.
“진짜 가까이 사셨잖아?”
그녀는 그 사실만으로 기뻐 걸음이 빨라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덕질은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니까.
어쨌든 드레젠의 모습을 더 빨리 보고 싶었다.
“음음~ 먹으면서 힐링해야지.”
입안 가득 맛있는 것이 퍼지고, 드레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것이 소확행이 아닐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3
꼬박 하루가 지났다.
갑옷을 만드는 작업도 거의 다 끝나 갔다.
이제 출고를 위해 표면을 연마하고 연결부를 리벳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끝났다.
“후우, 끝났습니다. 이제 인챈트를 해야겠군요.”
“거 대단한 집중력이로군. 하루 종일 갑옷을 만들다니. 게다가 오늘 전투도 치렀다고 들었는데.”
게임이니까.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그저 웃음만 지었다.
매끄럽게 연결하는 손놀림은 보통이 아니었다.
장인도 드레젠의 손놀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후우-.”
“이게 필요하겠지? 설마 인챈트도 할 줄 아는 거냐?”
“네. 간단한 수준이지만.”
남이 보기엔 절대 간단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한쪽 구석엔 작은 인챈트 도구가 놓여 있었다.
웬만한 도시라면 건물을 따로 쓰지만, 이곳에선 한 번에 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끝났습니다. 지금 몇 시죠?”
“벌써 해가 중천일세. 다들 자네를 기다리고 있던데.”
“다들 고마운 사람들이군요. 만약 터를 바꾸신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야 로드의 뜻을 따라야지. 늙은이가 별수 있겠나.”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할레단 후작가를 혼내 주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