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화
104화 - 정원의 주인
#1
만드록스라는 이름은 풍요의 축복이라는 뜻이었다.
메마른 땅을 지키며 땅의 정기를 수호한 지 수백 년.
아이들을 대륙 각지로 보내고, 홀로 여왕과 맞선 지도 까마득했다.
비스트 마스터, 나의 아버지가 내게 준 사명은 간단했다.
-이 땅을 지켜 강력한 전사들을 육성하라-
아이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련하다고 했다.
차라리 내륙에서 강력한 동료들을 모아 오는 것이 낫다고.
‘그렇게 떠나보낸 아이들아, 지금까지 무얼 하고 있는가.’
만드록스의 다섯 아이들.
화염을 상징하는 붉은색.
물을 상징하는 푸른색.
대지, 그 자체를 상징하는 황토색.
나무와 자연을 상징하는 초록색.
마지막으로 냉기와 강인함을 상징하는 하얀색.
[크아아아아아아-!]
다 어디 가고, 홀로 남아 척박한 땅을 지켰는가.
서리족이라는 가능성을 버리고, 왜 나약한 인간들에게 가능성을 걸었던 것인가.
만드록스는 그렇게 회의감에 빠져 갔다.
세월이 지나고, 대지의 정기가 약해질 때쯤, 유혹의 손길이 찾아왔다.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주마.]
[여왕님은 위대하다. 대지를 부흥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상상해 보라! 메마른 대지에 도는 생기를!]
그것은 떨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지친다.
자신도 그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지만, 만드록스는 지쳐 있었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갔을지도 몰랐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
한참을 어둠 속에서 허우적댄 것 같았다.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멍청하다고 손가락질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보였다.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부드럽고 힘 있는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꺼내 주었다.
[누군가, 그대는.]
[아직 늦지 않아 다행이군. 잘 들어라. 지금부터 여왕이 심어 놓은 기생충을 없앨 거다.]
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꺼져 가고 있었던 열정에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친숙한 목소리.
그래, 마치 옛 주인을 만난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이 꺼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주사 놓는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자마자 흐릿해진 감각 사이로 후끈한 통증이 일었다.
불로 지진 칼로 전신을 헤집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흐릿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몽롱한 꿈을 헤매다 찬물을 맞은 것 같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린 것에 대한 기쁨인지, 지난날의 후회인지 모를 포효가 울렸다.
상처투성이인 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오늘, 여기서 지긋지긋한 사명을 끝낼 테니까.
#2
“막아라, 이 정원에 있는 것들을 전부 쓸어버려야 한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전투에 가세한 이들.
비록 열 명밖에 안 되지만, 기사 백 명도 능히 때려눕힐 수 있는 자들이었다.
서리족.
최정예 중에서도 꼭대기에서 부족을 다스릴 인재들이었으니까.
[크아아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는 만드록스.
그 위에 타고 있는 드레젠은 신성력을 흡수하고 있는 만드록스를 느꼈다.
무협 소설에서의 고독처럼, 여왕은 아주 작은 기생충을 심어 놓았다.
그것이 조금씩 만드록스의 육체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이…… 건방진 것이!]
“여왕은, 자신의 방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야바아아아알
-아 내 안전 자산이ㅜㅜㅜ
-ㅋㅋㅋㅋ개미들 폭망하는 거 보솤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개 웃기눜ㅋㅋㅋ
-이미 클립 따 놨다 먹튀하기만 해 봐랔ㅋㅋㅋ
시청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지금이 드레젠이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안타깝게도 여왕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는 모양.
실제로 간간이 고드름이 떨어질 뿐, 드레젠에게 향하는 직접적인 마법은 없었다.
“여왕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만드록스를 가로채려 했던 것이죠. 이 녀석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으니까.”
체스, 장기에서도 저 멀리 우직하게 있는 록과 차, 나이트와 포 같은 말이 지니는 영향력은 크기 마련이었다.
만드록스는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생명체였던 것.
그런 만드록스가 드디어 제정신을 차렸다.
[그대가…… 나를 구해 주었군.]
“그런 셈이지.”
크르르-.
만드록스가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었다.
아직도 꾸역꾸역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만드록스의 압도적인 육체 능력 앞에 모두 나가떨어졌다.
“주변 정리부터 얼른 해야겠네.”
마나가 간당간당하긴 했다.
드레젠은 챙겨 온 물약 하나를 마시며 검을 휘둘렀다.
“여기, 받아라.”
휙 하고 날아온 것을 받자, 가죽 주머니였다.
친위대 중 하나가 드레젠에게 넘겨주었다.
“마나 포션을 녹인 마유주다. 마시면 도움이 될 거야.”
“고맙군.”
-이 진짴ㅋㅋㅋㅋ
-아오 진짜 도움이 안 되네!
-죽어야 하는데! 아아아아으ㅜㅜㅜ
“그러게 잘 보고 거셨어야죠. 아직도 제 방송을 모르시네.”
-야바루ㅜㅜ
-너무하다 진짴ㅋㅋㅋㅋ
-근데 이 형은 꼭 이럴 때마다 살아났음ㅋㅋㅋ
-그냥 죽기를 포기했다.
서리족은 보조 마법을 거의 쓰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음식이 발달했다.
마유주 하나로도 마나를 채울 수 있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꿀꺽꿀꺽 마시니 씁쓸한 맛과 비릿한 맛, 그리고 마나 포션 특유의 상큼함이 더해졌다.
“고맙군.”
“만드록스는 괜찮은가?”
[그렇다. 서리족의 전사들이여.]
“다행입니다. 수호신이여. 저는 로드의 아들인 쿠우쿠라고 합니다.”
주변이 정리되고, 잠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리족과 만드록스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드레젠은 정산 시간을 가졌다.
[3페이즈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히든 조건 달성!]
[드레이크 렉스 - 만드록스가 합류합니다.]
[클리어 시간 : 0 : 25 : 32]
[클리어 시간이 서버에 기록됩니다.]
“자, 3네임드도 무사히 클리어했군요. 수금하겠습니다. 선생님들.”
-아…….
-ㅜㅜ
-풍악을 울려라~
-축배를 들어라~
곧바로 후원금이 우수수 쏟아졌다.
짭짤한 수익을 올린 드레젠이 흡족하게 웃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쿠우쿠가 그에게 다가왔다.
“귀인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서리 종족 로드의 아들, 쿠우쿠라고 합니다.”
“그냥, 뭐 좀 구하러 온 사람이야.”
“그림자 기사단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스텔라 교단에서 나오셨는지.”
눈앞에 보이는 서리족은 예의라는 것을 알았다.
서리족에게 있어서 최대 난제로 통했던 만드록스.
제아무리 인간과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그걸 해결해 준 자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아니, 저~기 남쪽 출신이지. 정원에 있는 재료가 필요해서.”
“협력하겠습니다. 귀인.”
“그래 주면 좋지. 서리족은 튼튼하니까. 도움이 많이 되겠어.”
쿠우쿠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드레젠은 그의 얼굴을 진득하게 바라봤다.
확실히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보다 푸석푸석하고, 조금 더 메마른 느낌이었지만.
‘쿠우쿠. 아니, 서리족의 로드였던가.’
서리족의 대이동을 추진했던 젊은 로드.
그 덕분에 대륙의 북쪽에선 한동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작정하고 내려오는 서리족을 막을 수 있는 가문은 몇 없었다.
결국 브레이시스 제국은 일부의 땅을 서리족에게 내주어야만 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다친 인원은 없습니다만.”
“그럼 지금부터 내가 지휘권을 가져도 되는 건가?”
“……원하신다면.”
다른 이들도 살펴보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함을 숭상하는 것은 인간이나 서리족이나 비슷했다.
드레젠은 피식 웃고 여왕에 대한 것들을 설명했다.
“여왕을 상대하는 법을 알려 주겠다. 지금부터 조를 나눠서…….”
영원의 여왕.
기계와 얼음으로 덮인 육체를 가지고 있는 자.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작업이 필요했다.
든든한 동료가 생겼으니 훨씬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얼음 갑옷을 먼저 부숴야 본체가 나온다. 그 거대한 육체는 움직이질 못하니 병사들이 많이 나올 거야.”
“그렇다면…….”
“다섯은 잡졸들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기사를 잡아 껍질을 벗긴다. 나는 여왕의 공격을 받아 내다가 얼음 갑주가 벗겨지면 여왕의 본체를 칠 거다.”
드레젠은 각 조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멀뚱히 서 있는 만드록스의 발톱을 빌려 가면서까지.
[내 발톱은 미술 도구가 아니다.]
“거 가만히 있어 봐. 무거우니까.”
“…….”
저 자존심 강한 드레이크 렉스가 가만히 자신의 팔을 내주다니.
그걸 또 도구 삼아서 커다란 지도를 그리고 있는 드레젠도 가관이었다.
중앙에 있는 여왕, 그리고 양쪽으로 거대한 계단과 발판이 있었다.
“이 발판을 이용해서 전투를 벌인다. 여왕의 하수인 중에는 거대한 검을 들고 있는 기사가 있다. 그놈의 검이 필요해.”
여왕의 얼음 갑옷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갑옷이었다.
당연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틈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 검은 아주 튼튼하고 무겁지. 거기다 자체적으로 열기까지 가지고 있어, 얼음을 녹이는 덴 최고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ㅋㅋㅋㅋㅋㅋ
-비-터니까
-베타 테스터의 힘!
-이미 미래를 보고 왔소이다 허허.
“뭐,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출처가 있다고만 해 두지.”
“홀로 여기까지 오신 분이니 믿을 수 있을 거다.”
[서리족이여, 이자를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만드록스가 힘을 실어 주었다.
서리족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사실 의심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럼 각자 맡은 포지션 잘 기억하고, 가자.”
“알겠습니다.”
열한 명의 전사들이 몸을 움직였다.
드레젠은 마지막으로 만드록스에게 말했다.
“때 잘 맞춰서 와.”
[걱정하지 말거라.]
인자한 동네 아저씨가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드레젠은 피식 웃고 등을 돌렸다.
쿠르르르-.
정원 자체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여왕의 분노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저…… 저 그러면 밖에 있는 병력을 불러오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안 돼. 희생만 커진다. 여왕은 가끔가다 광역 공격을 퍼붓거든. 그걸 피할 역량이 되지 않는 전사들은 깔끔하게 얼어붙을 거야.”
드레젠의 단호함에 친위대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소중한 병사들을 잃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신기한 듯, 드레젠을 바라봤다.
‘어째서 저런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거지?’
의심이 되었지만, 배신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그는 동료들과 이미 눈빛으로 의사 교환을 마쳤다.
수상한 행동을 한다면 바로 제지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간다.”
덜컹-.
얼음으로 된 문이 열렸다.
스산한 냉기가 문틈으로 빠져나왔다.
여태까지 느꼈던 냉기와는 차원이 다른 냉기였다.
문안에는, 드레젠이 그림으로 그렸던 것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준비해라.”
무기질적인 음성이 울렸다.
드레젠의 명령이었다.
그의 귓가에도 낭랑하지만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4페이즈]
[영원의 여왕 토벌]
[제한 시간 : 1 : 00 : 00]
보스전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