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화
98화 - 패치 공개의 정석
#1
게이머들에게 있어, 대규모 업데이트는 항상 설레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새로운 콘텐츠와 더 방대한 세계를 즐길 수 있게 했으니까.
안 그래도 세이브 더 브락시아는 어마어마한 볼륨을 자랑하는 게임이었다.
여타 PC 게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였으니.
“이렇게 빠르게 패치를 해 주신 개발자분들께 감사를 드리면서, 제가 직접 업데이트 내용을 시연하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헐…… 그럼 오늘 오신 이유도…….”
은겸이 진짜 목적을 알고 입을 떡 벌렸다.
사전에 하이디엔과 합의된 내용은 바로 이것.
뛰어난 피지컬로 직접 새로 추가된 적들과 맞서 싸우며 시연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
“그렇습니다. 일단 좋은 경기 펼쳐 주신 선수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용성과 하이츠 선수들이 캡슐에서 나와, 꾸벅 인사를 했다.
다시 한 번 박수와 갈채가 쏟아졌다.
확실히 수준이 높은 경기를 보여 줬으니까.
벌써 기사까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고 있을 정도였다.
은겸과 강일이 마이크를 각 주장에게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프로 리그에선 더 좋은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더 수련해서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두 프로 팀 선수들은 무대 뒤를 돌아 2층에 있는 관객석으로 향했다.
모든 프로 팀들이 앉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 역시 관객이 되어 업데이트 내용을 관람할 수 있었다.
“기대되는데요?”
“그러게. 밸런스 패치도 하려나?”
“음, 잘 모르겠는데.”
선수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이츠와 용성은 핸드폰으로 동영상까지 찍기 시작했다.
무려 드레젠의 시연이었다.
어떤 장면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대규모 업데이트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강일은 캡슐로 들어갔다.
드레젠으로 변모한 그가 거대한 평원에서 나타났다.
[세이브 더 브락시아 시즌. 1]
[마족 발현]
초원 위에 멋들어진 폰트가 생성되었다.
드레젠은 폰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상 마족들이 본격적으로 활개 칠 때가 되었지.
그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게임과 현실. 이 사이를 어떻게 극복할 거지?’
자신이야 원래 그쪽에 살던 이였으니 괜찮았고, 얼마든지 결과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웅 놈들과 더러운 정치판에서 뒹굴기 싫었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과연 어떻게 현실과 게임의 갭을 극복할 것인가.
‘나중에 하드코어 모드라도 내겠지.’
시뮬레이션은 무한정 반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현실과 아주 똑같은 환경을 만든다면, 그곳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겠지.
드레젠은 속으로 납득하고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아, 들리십니까?]
“들립니다.”
[지금부터 시연 매뉴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이 기능은 ‘귓속말’이고, 서로 친구 추가가 되어 있는 자들끼리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귓속말의 추가.
이 기능이 없어 꽤 불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구현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옆에 작은 화면으로 스크린이 보였는데, 업데이트 내용이 주르륵 소개되고 있었다.
[다음은 새롭게 추가되는 모드입니다. 먼저 연습 모드가 추가됩니다. 연습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드레젠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텅 빈 공간으로 텔레포트가 되었다.
몸이 붕 뜨고, 급격하게 추락하는 느낌.
딱 텔레포트를 받을 때와 동일한 기분이었다.
[대사를 출력해 드리겠습니다.]
드레젠은 반투명하게 뜬 대사를 그대로 읽었다.
사전 연습도 없었던 대사였지만, 그는 영웅 출신의 사나이였다.
사람들 앞에 수도 없이 많이 서 봤고, 이것보다 훨씬 많은 이들 앞에서 연설을 했던 경험도 있었다.
“자, 여기는 연습장입니다. 게임 시간을 투자해서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지금까지 NPC들의 눈치를 보거나 마땅한 연습 상대가 없었던 분들을 위한 공간이죠.”
연습장의 기능은 간단했다.
지금까지 잡았던 몬스터, 혹은 NPC를 소환해서 그간의 싸움을 복기할 수 있는 전장.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미지 미터기 기능도 추가되었다.
“또한, 딜 미터기 기능이 있습니다. 같은 기술을 써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서 대미지가 달라집니다.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메뉴라고 부르시면 각종 옵션이 나옵니다. 확인해 보세요.]
“메뉴.”
메뉴를 부르고, 무기와 적을 설정했다.
상대는 가장 만만한 오크.
모드도 대전 모드와 허수아비 모드가 있었다.
드레젠은 가장 기본적인 ‘보레아스식 롱 소드’를 들고 두 번의 베기를 시연했다.
촤악-!
황금색 폴리곤이 흩날렸다.
“와- 진짜 깔끔한데?”
“역시. 저분은 진짜야.”
“우리 팀으로 영입했으면 좋겠다.”
선수들은 드레젠의 간단한 몸짓만으로도 실력을 파악했다.
실로 깔끔한 베기였다.
“승수 형. 저걸 보고도 드레젠이 별거라는 얘기가 나와요?”
“…….”
김승수는 그저 멍하니 드레젠을 바라볼 뿐이었다.
뒤이어 나온 기능은 추가된 콘텐츠들이었다.
유저들끼리 파티를 맺고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인스턴스 던전.
값진 아이템을 파밍할 수 있는 레이드.
마지막으로.
“새로운 메인 레이드가 등장합니다.”
드넓은 평원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쿠웅-!
거대한 균열이 열리고, 미지의 생명체들이 나타났다.
브락시아 사람들이 ‘마족’이라고 부르던 것.
그건 일반적인 악마가 아니었다.
“어?”
“저건 로봇 아니야?”
“웬 로봇?”
브락시아는 일반적인 악마들을 마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악마들은 성좌의 일부분이기도 했으니까.
레메게톤에 나오는 악마들처럼, 그들은 인간들에게 간헐적으로 도움을 주곤 했다.
오직 파멸만을 원하는 종족은 따로 있었다.
[마족. 오직 파멸만을 위한 종족의 등장.]
키야아아아악-!
포털이 열리며 그들이 포섭한 인간들의 군세, 조종받고 있는 몬스터들의 군단이 튀어나왔다.
이전, 헤시라둔과 같은 데스 나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리치 역시 대규모 군세를 이끌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 서 있는 것은 오직 드레젠, 한 명이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악의 무리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공식 종족명은 ‘베리드’.
거대한 하나의 정신으로 묶여 있으며, 모든 생명체를 무로 돌리려는 기계.
기계뿐만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자들을 모두 모은 집단이기도 했다.
[크아아아아아아-!]
헤시라둔이 없어졌기에, 다른 데스 나이트가 마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다양한 괴물들이 대지를 찢어발기며 인류가 살고 있는 터전으로 진격했다.
압도적인 물량 앞에 홀로 서 있는 드레젠의 모습은 한없이 작아 보이기만 했다.
드레젠이라면.
드레젠이라면 뭔가 보여 주지 않을까 하는 찰나, 그의 뒤쪽에 포털이 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군.’
이종족들의 군대, 그리고 인간들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뿔 나팔 소리가 들리고, 마법사들의 기선 제압이 시작되었다.
엄청난 수의 기병과 보병이 대열을 이뤄 등장했다.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각 종족을 규합하고 거대한 위협에 맞서는 것입니다.”
뒤이어 화면이 바뀌었다.
레이드에 도달하기 위한 첫 번째 콘텐츠.
[고탑 조사]였다.
[이제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자유롭게 싸워 주세요.]
10층이라는, 비교적 높지 않은 탑이었다.
수많은 자들이 그 탑을 조사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나오지 못했다.
드레젠 본인이 그곳을 탐험했을 땐, 지옥도 그 자체였다.
시체들.
그런 시체들을 먹고 있는 괴물들.
‘들어갔던 모든 인간이 언데드로 변해 버렸었지.’
괴물들이 눈을 돌리며 드레젠을 노렸다.
탑 1층.
별것 없는, 그저 그런 모험가들이 유저들을 맞이해 줄 것이다.
드레젠이 몸을 날려 검을 흩날렸다.
지금까지 죽어 갔던 몸뚱이를 가르며 위로 올라가는 것이 1층에 대한 목표였다.
[곧 2층으로 전환됩니다. 계속 싸워 주세요. 테마만 보여 드릴 겁니다. 생각하시는 대로 무기도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을 넣었습니다.]
‘오케이.’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손톱이 자신을 노리고 들어왔다.
고탑은 곧 실험실이었다.
인체 실험을 극한까지 했던 폐기물들의 쓰레기통이기도 했다.
2층은 그런 키메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흡-.”
추억을 곱씹으며, 달아오른 몸을 풀었다.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실험체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그대로 일격.
답답하게 시야를 막았던 몬스터들이 단번에 펑! 하고 터져 나갔다.
프로들뿐만 아니라 브락시아의 고수들이 봐도 깔끔하다고 감탄할 공격이었다.
[넘어갑니다.]
그렇게 9층까지의 모든 테마를 보여 준 뒤.
드디어 10층에 도달했다.
공허한 분위기의 대전과 허름한 왕좌.
그 위에 앉아 있는 단 하나의 몬스터.
[여기까지 올라온 놈이 있다니, 제법이구나.]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드레젠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이 고탑은 참 사연이 많은 곳이었으니까.
[절망의 탑을 정복하세요.]
[다양한 보상을 얻으세요.]
[강해지고, 다가올 재앙을 준비하세요.]
마치 지금까지는 튜토리얼이었다는 듯, 더욱 강력해진 적들이 등장할 차례였다.
이제 드레젠, 강일이 할 역할은 거의 끝났다.
본격적으로 제작한 PV 영상이 스크린을 메우기 시작했다.
스크린에서 사라진 드레젠에게 하이디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선을 조금 바꾸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일단 유저들을 고인물로 만든 다음, 하드코어 모드를 출시할 거예요.]
“그게 낫겠지.”
[강일 님도 즐겨 주세요. 많은 콘텐츠를 준비했으니까.]
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일러 영상에서는 첫 ‘인스턴트 레이드’라는 콘텐츠가 추가되었다.
본격적으로 마족에게 대항하는 콘텐츠이자 스토리의 본격적인 진행이기도 했다.
“시연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즐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넷 방송은 채팅을 얼렸음에도 서버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엄청난 숫자의 업데이트 내용.
그리고 드레젠의 간단한 퍼포먼스까지.
“지리네.”
“괜히 용성이랑 하이츠가 발린 게 아니었어.”
“승수 형? 뭐라고 말 좀 해 봐.”
“……저기 방송 주소가 어디라고?”
결국, 프로 게이머 김승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