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화
95화 - 프로가 사용할 수 있는 것들
#1
엘프가 사용하는 창술.
유연함과 빠르기가 가미된 창술의 특징은, 일반적인 기사들이 잡을 수 없는 타이밍을 찌를 수 있다는 것.
엘프와 인간의 근육이 다른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
“뭐 해? 덤벼야지.”
하이디엔은 싸구려 창을 든 인간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 같은 창으로 승부를 보자는 건가?
인간의 창술로?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공격을 이어 나갔다.
찌르기.
그리고 창대를 휘감아 돌려 따라가는 연격.
“어딜.”
카앙-!
마나가 듬뿍 담겨 있었기에 무기가 엉겨 붙지 않고 튕겨 나왔다.
같은 찌르기로 응수하는 드레젠을 보며, 하이디엔이 눈을 부릅떴다.
“그, 그 창술!”
하이디엔과 똑같은 자세, 똑같은 형.
드레젠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래, 분명 이런 이름이었지.
다소 유치했지만, 이만큼 어울리는 이름도 없을 것 같았다.
“템페스트였나? 그런 이름으로 부르더군.”
“네, 네가 어떻게 그 창술을 익히고 있는 것이냐!”
하이디엔의 이성이 점점 연해졌다.
템페스트.
적을 쓸어버리는 광풍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대대로 하이 엘프들 사이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비전.
보통은 완력이 강한 남성 엘프가 익혔지만, 하이디엔은 이례적인 하이 엘프였으니까.
“그거 말하면 너 기절해.”
“……죽일 이유가 더 늘었군.”
고오오오오-.
그녀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마나가 피어났다.
이제 완전히 암살자의 모습을 벗어던진 하이디엔.
정면 승부로 상대방을 꺾을 때만 나오는 기세가 폭발했다.
“찌릿찌릿한데, 이 정도는 돼야 재밌겠네요.”
-거의 최종 보스급인데?
-화면 떨리는 거 보솤ㅋㅋㅋㅋ
-와 저런 거 어떻게 이기냐
-마! 함 붙어 보자!
그 어마어마한 기운 때문일까,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저택으로 돌아갔던 후작은 물론이고, 마나를 좀 느낀다 하는 자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아, 후작님? 이건 정당방위라 성벽값은 좀 곤란합니다.”
“뭣?”
“격해질 것 같거든.”
헤시라둔 이후,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드레젠은 새삼 이 시기의 하이디엔이 얼마나 강한지 깨달았다.
하이 엘프의 보물이자, 재능이 넘치는 엘프들 중에서도 천재라 불린 이였다.
쌓아 온 마나의 양도, 경험도 인간보다 훨씬 많았다.
-ㅋㅋㅋㅋ갑자기 존댓말ㅋㅋㅋㅋ
-‘드’도 돈 앞에서는 ㅜㅜ
-드하다 추야ㅋㅋㅋㅋㅋㅋ
-돈이 최고지 암요암요
드레젠은 저릿한 마나를 느끼며 선공을 가했다.
마나의 절대량이 많으면 좋긴 하지만, 그걸 얼마나 잘 다루느냐도 문제였다.
그 점에 있어서는, 드레젠은 인류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다.
콰아아앙-!
이미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듯, 과격하게 들이대는 하이디엔.
“죽어라!”
“엇차.”
드레젠은 그녀가 무슨 공격을 할지, 마나를 어떻게 운용할지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미묘한 습관은 고치기 힘들었으니까.
아직 로드가 아니고, 마족과의 전투도 치르지 않았다.
‘아직 어설프네. 마나는 여전히 많지만.’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창끝에서, 압도적인 마나가 느껴졌다.
그래도 질 수는 없지.
드레젠은 창대의 중앙을 쳐올렸다.
템페스트의 가장 큰 장점은 회수와 공격이 일체가 된다는 것.
반대로 말하면, 타이밍을 빼앗는다면 방어에만 급급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읏차.”
막 자신에게 팔을 뻗으려는 찰나, 절묘하게 들어간 엘프식 체술.
빠악! 소리와 함께 창대로 막은 하이디엔은 혀를 찼다.
설마 절묘하게 체술을 사용할 줄이야.
그녀는 침착하게 다음 공격 기회를 엿봤다.
드레젠은 그 틈을 주지 않고 역공을 취했다.
‘젠장, 나보다 훨씬…….’
싸우면 싸울수록, 그녀는 점점 말리기 시작했다.
1 대 1에선 적수가 없었던 그녀는 충격에 빠졌다.
‘내가 밀린다고?’
“아직 멀었군. 강해져서 돌아와라.”
“헉!”
흥분은 이성을 억누르고, 그런 상태에선 수를 읽는 능력이 떨어진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지키기 힘들어하는 싸움의 방식.
아드레날린이 만연한 뇌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고 속삭일 뿐이었으니까.
드레젠의 마나가 순간적으로 폭발했다.
“꺄악!”
창끝으로, 다른 창의 끝을 맞힐 확률이 얼마나 될까?
드레젠은 내질러지는 하이디엔의 창끝을 정확히 가격했다.
작은 점에서부터 퍼지는 마나의 파동이 하이디엔의 전신을 헤집었다.
그녀의 팔이 비틀림을 일으키며 파열되기 시작했다.
마나가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불구가 되었을 일격.
“끄으…….”
“마나만 넘쳐 나면 뭐 하냐.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거.”
“하이디엔!”
“대장!”
싸움의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엘프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하이디엔과 똑같은 창술을 익히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녀를 실력으로 압도하기까지 했다.
상처야 치료하면 되지만, 그녀에게 가해진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후퇴하자.”
“……젠장.”
“빨리 꺼져라~ 형 바쁘다.”
-쿨 가이 보솤ㅋㅋㅋㅋ
-크킄,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창으로 덤볐다 창으로 깨졌쥬?
-그래서 공략은?
공략이고 나발이고, 캠조차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전투였다.
뭐가 보여야 따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시청자들은 그저 그의 신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드레젠 역시 공략보단 공유라고 했으니까.
“너, 두고 봐!”
멀리서 활을 쐈던 엘프가 한마디를 쏘아붙이고 저 멀리 사라졌다.
순식간에 전투가 끝났고,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무시무시하군.’
‘젠장! 저러니까 암살을 피했지!’
슬쩍 나온 모나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일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엘프들의 창술은 마스터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엘프의 미모를 전해 들은 그가 수소문했었으니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괴물입니다.”
“저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와선…….”
후작은 일이 더욱 어려워짐을 느꼈다.
후우, 작게 한숨을 쉰 그는 큰 결정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강해지는 것만이라도 막아야 할 터.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녀석에게 합류하는 모든 이들을 막아라. 녀석은…… 홀로 싸워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각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었지만, 그거야 포장하면 될 일이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어떻게 얘기가 흘러가느냐에 따라서 소문의 양상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드레젠은 홀로 전장에 나와야 할 운명이었음을.
#2
[세이브 더 브락시아를 종료합니다.]
“1부 고생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2부로 만나 뵙죠.”
-오늘도 알찼누
-ㅋㅋㅋㅋㅋ2부까지 보는 내 인생이 레게노
-2부는 좀 짧아서 아쉬움 ㅜㅜ
-아무래도 다 하면 16시간이니까ㅠㅜㅜ
-이따 다시 옴!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강일은 캡슐 밖으로 나와 한숨 돌렸다.
마나는 꾸준하게 차오르는 중.
핸드폰을 보니 하이디엔의 연락이 와 있었다.
그녀가 보낸 톡 내용은 웃음을 자아냈다.
-제가…… 옛날에 저랬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ㅜㅜ
-아직도 창술 잘 쓰시네요 ㅎㅎ
“개구리 올챙이 때를 생각 못 한다더니.”
강일은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이제 슬슬 편집자와 매니저를 구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회사 사람을 쓴다면 훨씬 신용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매니저를 구할까 하는데, 아는 사람 있어?
답장은 바로 왔다.
-있어요! 내일 행사에 오시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
-힘 팍 주고 오세요!
방금 그렇게 치고받고 싸웠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사근사근한 태도.
세월, 그리고 다양한 사건은 그녀의 인격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드레젠은 내일 있을 행사를 기대했다.
아마 전 세계 유저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준비는 다 됐고. 편집이나 해야겠다.”
노트북 앞에 앉아, 편집을 시작했다.
쌓여 있는 분량은 많아져만 가는데 속도는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동영상 하나를 올린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약속이 많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3
유난히 쌀쌀한 날이었다.
강일은 기다란 코트를 걸치고 창문을 열었다.
후욱 하고 찬 바람이 들어왔다.
찬 바람을 맞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강일 님? 뭐 하세요?”
좌르륵 쏟아지는 금발이 창문을 가득 채웠다.
쪼그려 앉아서 창문을 바라보는 하이디엔의 표정엔 얼른 올라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드르륵-.
미련 없이 창문을 닫아 버리고는 문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대답 정도는 해 주셔도 될 텐데…….”
“얼른 오라며.”
차 앞에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이디엔을 뒤로하고, 그녀의 차에 올랐다.
부드러운 승차감이 정말로 좋았다.
이사를 한다면 차 정도는 뽑아야겠지?
사실 지금도 충분히 지불할 능력이 있었지만, 딱히 생각은 없었다.
‘뭐든지 어울려야지.’
부웅-.
부드럽게 출발하는 차 안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표독하게 날을 세운 실버 문의 수장이 아닌, 이제는 완벽하게 강일을 신뢰하고 있는 하이디엔의 모습이었다.
“먼저 코치들과 선수들을 만나러 갈 거예요. 오늘 회사 분량이 꽤 되니까……. 혹시 불편하시면 안 오셔도 되긴 하는데.”
“뭐가 불편하겠어. 그쪽에 용성이랑 하이츠도 올 거 아니야?”
“맞아요. 그분들이 계시면 괜찮겠네요.”
이현성도 참가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커다란 행사였다.
게임 방송국에서도 많은 관계자들이 온다고 했으니까.
“그럼 본사로 먼저 가죠.”
하이디엔은 액셀을 쭉쭉 밟았다.
강일이 물었다.
“그런데 그냥 혼자 뛰어다니는 게 더 빠르지 않아?”
“그러면 현대에 사는 의미가 없죠. 소비의 맛을 알아 버렸달까?”
“……그래라.”
“강일 님도 조만간 그렇게 되실지도 몰라요. 후후.”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강일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뒷자리에 놓여 있는 서류를 집었다.
행사 내용과 더불어 대본, 업데이트 내용까지 들어 있는 문서였다.
“한번 읽어 보세요.”
“그러려고.”
언제나 업데이트 내용을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권리가 있는 강일.
당장 오늘 있을 내용뿐 아니라, 분기별로 착착 정리가 되어 있었다.
강일은 날카로운 눈으로 내용들을 살펴봤다.
자잘한 오류는 물론, 유저들의 편의를 위한 패치들이 많이 있었다.
콘텐츠 추가는 물론이고 PvP 조정까지 있었다.
“역시 그것도 있네.”
“그럼요. 게임사의 역할도 충분히 해야죠.”
“성좌들은 여전히 개입이 없었지?”
하이디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었다.
두 사람은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아마존 TV 본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