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화
91화 - 위도우 그레인
#1
엘프들, 그중에서도 하이 엘프들만으로 이뤄진 실버 문의 특무조.
모든 엘프 로드들이 거쳐 간 엘리트 코스.
실버 문의 실질적인 수장인 특무조장은 세상을 배우고, 앞으로 엘프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정한다.
그녀, 혹은 그가 보는 세상이 곧 엘프가 나아가는 방향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역시 평화로워.’
하이디엔은 와이번을 추적하며 생각했다.
일부 엘프들은 인간이란 족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곤 한다.
서로 간의 신뢰만 구축되면 엘프들은 안전 속에 번창할 수 있을 거라고.
‘거짓말.’
그녀는 실버 문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인간들을 겪어 왔다.
주 임무가 인간들, 혹은 이종족들을 상대하는 것들이었으니까.
하이디엔이 겪은 인간들은 하나같이 교활했고, 비열했다.
성급한 일반화라고 하기엔 겪은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인간들은, 언젠가 멸망해야 할 존재들이지.’
킁킁.
저 멀리서 비릿한 하늘의 냄새가 풍겼다.
와이번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증거였다.
그 혐오스러운 비스트 마스터의 자식들.
와이렉스의 주인을 꼭 만나리라 생각했다.
“대장, 그런데 그 예언이라는 것이 뭐야?”
“그러게. 우리는 듣지 못했으니까. 하이 엘프의 직계 후손인 대장은 알고 있겠지?”
“예언이라…….”
하이디엔은 나름 끔찍했던 예언의 내용을 상기했다.
[이방인이 은백의 빛을 하늘에서 뿌릴 때, 멸망의 군대가 깨어나리라.]
멸망이라니.
그것이 이 세계의 멸망인지, 아니면 엘프들의 멸망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가 되었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내용.
엘프의 예언은 성좌에게서 직접 내려오는 것.
대부분, 아니 모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적중률이 뛰어났다.
“뭔데, 진짜 끔찍한 예언인 거야?”
“끔찍하다면 끔찍할 수 있겠지.”
하이디엔은 딱딱하게 말했다.
속에서 계속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그런 말투가 나왔다.
그녀의 버릇 같은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닌 대원들이 침묵했다.
그중 가장 쾌활한 성격을 지닌 엘프가 너스레를 떨었다.
“뭐, 우리 같은 엘프들이 예언을 알아봤자 뭐 하겠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대장.”
“그래.”
그녀는 한마디로만 답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스스스-.
나뭇잎이 요란하게 울었다.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들이 있을 때나 내뱉는 울음소리.
인간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연의 감정.
“정지. 거의 다 왔다.”
그녀는 마나를 끌어 올려, 손을 펼쳤다.
하늘을 향해 펴진 손바닥 위에, 작은 새가 피어났다.
마나로 이뤄진 새는 부드러운 손짓에 이끌려 숲속으로 나아갔다.
“잠시 대기하고, 와이번을 사냥하러 가자.”
“진짜 우리끼리 가능하겠어?”
우려가 섞인 소리가 들렸다.
무려 와이번이었다.
어지간한 하이 엘프 전사들도 무시하지 못할 상대.
드래곤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는 몬스터.
그것도 우두머리급 몬스터였으니.
“와이번을 직접 노리는 것이 아니야. 비스터 마스터의 후예를 찾는 것이 목표다.”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와이번은 좀 무리야. 그치? 우리는 암살자잖아?”
당연한 말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암살자라도 와이번을 상대하긴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대인전에 뛰어난 엘프 암살자들이었으니까.
“그래도 대장은 괜찮지 않아? 마법도 엄청 잘 쓰잖아.”
“엄청이 뭐냐? 전대 로드를 뛰어넘고 있는데.”
하이디엔은 천재 중의 천재로 통했다.
역대 로드들 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
와이번 정도는 홀로 감당해 낼 수 있는 실력자였다.
“단순한 와이번이라면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어. 하지만…… 저건 평범한 와이번이 아니잖아.”
“하긴. 그럼 얼른 정보부터 모으자.”
“난 가까운 마을에 가 있을게.”
하이디엔은 조원들에게 적절한 명령을 내려 주었다.
각자의 특기를 살린 명령이었다.
총 다섯 명의 엘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두 명은 인간이 살고 있는 마을에, 다른 두 명은 숲속을, 마지막으로 자신은 와이번을 직접 탐사하기로 했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와이번들이 날뛰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지기에 최대한 기척을 죽였다.
여차하면 와이번을 죽일 수 있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
그라메인.
드레젠은 평범한 사람처럼 위장한 후, 그라메인의 거리를 거닐었다.
위장이라고 할 것까진 없었고, 그냥 평범하게 돌아다니는 것뿐이었지만.
그가 향하는 곳은 꽤 유명한 길드이자, 상단이었다.
“길드와 용병단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그럼그럼
-길드 : 상인 집단이라고 배웠습니다!
-교과서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선생님!
-워매 다들 똑똑한 거 보솤ㅋㅋㅋ
확실히 중세 시대 세계사를 배웠다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요즘도 그런 걸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길드는 상인이나 뜻이 맞는 자들이 모여 만든 집단을 뜻했고, 용병단은 말 그대로 보수를 받고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곳을 말했다.
다크몬드는 똑똑하게도, 산하 길드를 수도 없이 많이 두고 있었다.
“조금 길이 복잡해지겠네요. 길드에 들렀다가- 던전에 갔다가, 할레단 후작가로 쳐들어가겠군요.”
-너모 길다 ㅜㅜ
-그래도 정보 많이 얻을 듯!
-드천포로 빠지지만 않으면 오케이지
-엌ㅋㅋㅋㅇㅈㅇㅈ 삼천포로만 안 빠지면 ㅇㅇ
밑 작업이 지루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기 마련.
드레젠은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을 잘 유지하면서 진도를 나갈까 고민했다.
이제 슬슬 고정 팬층이 생기고 있었지만, 아직 방심해선 안 되는 시기였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나자’ 길드.
여느 평범한 길드처럼 맞이해 주는 접수원이 보였다.
드레젠은 그녀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길드장님에게 전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개인적인 쪽지는…….”
드레젠은 쪽지 위에 묵직한 금화 두 개를 올려놨다.
종업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2골드.
그녀가 한 달 내내 일해도 벌기 힘든 돈이었으니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틈에, 드레젠은 추적술을 사용해서 주변을 훑었다.
나자 길드는 중소 규모의 길드였다.
가지고 있는 건물은 세 개.
상단 하나, 작은 용병단 하나를 운용하고 있었다.
“규모가 꽤 작은데도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하네요.”
-그러네
-마나 흔적 보소
-냄새가 난닼ㅋㅋ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거대한 마나의 잔재.
이제 제법 마나의 양과 질을 판단할 줄 아는 시청자들도 생겼다.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드레젠은 톡톡, 책상을 두들기며 여직원을 기다렸다.
“여직원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나올 수도 있겠군요.”
그의 예상대로, 여직원이 아닌 다른 이가 나왔다.
칼집에 잘 들어가 있는 날카로운 보검을 보는 것 같은 기분.
겉으로는 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마나를 지니고 있는 사내가 나왔다.
‘왔구만.’
마지막으로 봤던 기억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한 사내.
어둠을 주름잡았던 그림자의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반 길드원으로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
“그대가 이런 서신을 보냈습니까?”
“그렇지. 어때, 좀 얘기해 볼 가치가 있나?”
“따라오십시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2층으로 향했고, 드레젠 역시 따라 올라갔다.
드레젠이 2층에 발을 딛자마자 주변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이곳부터는 나자 길드가 아닌, 다크몬드의 지부라는 느낌.
졸졸 따라왔던 여직원 역시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밑으로 사라졌다.
“이곳이네.”
점잖게 그를 안내한 청년은, 작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과 작업을 할 수 있는 책상.
갖가지 서적이 꽂혀 있었고 다과를 준비할 수 있는 마법 물품이 열심히 움직이는 방.
드르륵- 하는 소리가 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고 온 것 같더군.”
“그래. 이런 것도 가져왔지.”
인도하는 곳에 있던 지부장의 명패를 꺼낸 드레젠.
그것을 보고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 위도우.
하지만 이내 피식 웃어 보였다.
-같은 편이 당했는데 반응 무엇
-사실 내부 알력이 있었던 걸까?
-저런 조직이면 정치는 없을 수가 없음ㅋㅋ
“새로운 인재가 그곳을 지배하겠군. 그래도 훈련을 잘 받은 녀석이라 정보를 얻기가 까다로웠을 텐데.”
“편법을 좀 사용했는데.”
“그대가 내 소원을 알고 있다는 것도 놀랍군.”
위도우는 제법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단기간에 엄청난 업적을 이뤄 낸 인물.
드레젠이라는 자의 소식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남부에 있어야 할 자가 이곳에 있다라…….’
그렇다면 얼마 전에 있었던 의뢰의 내용을 알아차렸다는 뜻.
생각보다 반응이 빨라서 놀라웠다.
또한 압도적인 기동성에 한 번 더 놀랐다.
“안 그래도 와이번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대가 이끌고 온 건가?”
“그렇지. 할레단 후작가에 볼일이 있어서.”
“루시퍼의 눈물을 내게 준다는 이유가 뭐지?”
-내 꼬붕이 돼라!
-노예 추가하려고 그러지 뭨ㅋㅋㅋ
-너! 내 노예가 돼라!
드레젠은 시의적절하게 올라온 채팅에 미소를 머금었다.
시청자들의 말이 100% 맞는 말이었지만,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는 법.
위도우 그레인은 신중하고 치밀한 자였다.
쿨레드 때처럼 대놓고 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주변에서 건드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나를 스파이로 이용하겠다, 뭐 이런 건가?”
“스파이? 지부장을 할 정도의 사람이 이렇게 스케일이 작아서 어떡해?”
드레젠이 또다시 그 미소를 지었다.
시청자들은 물론, 그를 본 자들마다 사악하다고 했던 그 미소.
위도우 역시 드레젠의 미소를 보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뭐지? 이 위화감…….’
“고작 지부장 정도로 만족할 건가? 그림자의 왕.”
“……자네, 설마.”
드레젠은 쪽지와 연필을 들어 슥슥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모양은 다크몬드의 정점, 오직 단 하나만 존재하는 등급의 상징이었다.
둥그런 달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구름의 무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자네에게 만월의 자리를 보장해 주지. 대신, 나를 위해서 일해 줘야겠어.”
“그대의 개가 되란 말인가?”
“개라니,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 어디까지나 파트너지, 파트너.”
파트너.
세 음절이 만드는 단어가 주는 힘은 대단했다.
위도우 그레인은 야망이 있는 자였다.
그의 재능은 정말 뛰어났고, 그 재능을 썩힐 인물도 아니었다.
“자, 어떻게 할 건가?”
드레젠은 다시 한 번 물었고, 잠시 고민하던 위도우 그레인은 입을 열었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니까.
“…….”
그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