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화
88화 - 할레단 후작가로
#1
매일매일 두 번씩 보는 광경이었지만, 회백의 세상은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항상 일깨워 주었다.
드레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오늘도 다짐했다.
‘가볍게, 그리고 재밌게 하자.’
올라오는 채팅이 언제나 고마웠다.
심하게 몰입하지 않게 해 주었으니까.
다시 돌아온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성주님. 쿨레드입니다.”
“들어와.”
봇짐을 주섬주섬 싸기 시작할 때, 쿨레드가 퀭한 얼굴로 들어왔다.
근무 환경이 꽤 나아졌음에도 퀭한 얼굴은 여전했다.
서류 몇 가지를 들고 자연스럽게 브리핑을 시작하는 그.
-닉값하누
-쿨하넼ㅋㅋㅋㅋ
-성주가 뭐 하고 있는지 신경 1도 안 씀ㅋㅋㅋㅋ
-엌ㅋㅋㅋ 이졸데하고는 캐릭터가 많이 다르네
“몇 가지 브리핑드리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마탑주가 이곳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골렘의 제작에 들어갔고, 현재 생산 가능한 골렘은 아이언 골렘 다섯 기, 스톤 골렘 두 기입니다.”
“엉, 또?”
“방랑 상단이 방문하면 범람에서 얻은 오크들의 부산물들을 팔 예정입니다. 지금 시세로는 약 150골드 정도가 나옵니다만, 이건 변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150골드.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조직, 그것도 군사 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집단을 운영하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다.
현대의 국가들이 전면전을 펼치지 않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 역시 막대한 전쟁 비용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좀 짜네.”
“요즘 오크들의 활동이 많아지는 시기라, 시세가 조금 떨어집니다.”
“어쩔 수 없지.”
“레인저 부대의 육성 건입니다. 현재 아이들을 지원받아…….”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 기묘한 브리핑은 한동안 이어졌다.
성의 전반적인 운영 방침은 꼭 성주에게서 들어야 한다는 쿨레드의 방침 덕에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봇짐의 끈을 동여맨 드레젠은 자신의 갑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이제 끝났나?”
“예. 그나저나……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모르겠다. 이번엔 좀 길 거 같은데.”
“그럼 목적지는요?”
드레젠은 철컥- 하는 소리를 음미하며 간단하게 말했다.
할레단 후작가.
수도를 기준으로 남서쪽인 이곳에서, 북동쪽인 할레단 후작가까지 육로로 한 달 이상.
그만큼 먼 거리였다.
“할레단 후작가에 좀.”
“초대 온 것은 없는데……. 혹시 또 깽판 치러 가십니까?”
“얼추 맞지. 이번엔 마탑에서 너희들을 빼 온 것과는 좀 달라.”
“…….”
쿨레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놈의 성주는 어디서 자꾸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다, 멈칫했다.
설마, 그 사소한 마찰이…….
“그 장남 때문입니까?”
“맞아. 너도 봤잖아.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더라고. 맞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맞지맞지
-간도 크네 ㅋㅋㅋㅋㅋ
-어떻게 뒤집을지 생각만 해도 짜릿해!
-즐거워! 최고야!
-ㅋㅋㅋㅋㅋㅋ이건 쿨레드가 쿨하게 보내 주는 것도 인정할 만하지
“어디,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별로. 아, 한 100골드만 좀 줄래?”
“……그게 별로입니까?”
100골드라니.
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걸까?
쿨레드는 천재 소리를 심심찮게 듣고 자랐지만, 이 양반의 속내는 도통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100골드는 작은 길드나 용병단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설마…… 또 팀 파이트로 한판 하시려고?”
“오, 역시 천재답네.”
“조금 더 평화로운 방법이 있을 텐데요.”
“전쟁보단 이게 낫지, 안 그래?”
-암요암요
-평화(물리)를 추구하시는 분인뎈ㅋㅋㅋ
-충분히 평화로우시다^^7
-ㅋㅋㅋㅋㅋ쿨레드 멍한거 보소ㅋㅋㅋㅋ
쿨레드는 가만히 생각했다.
본래 거점이라는 것은, 각각의 거점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하시스 성에서 가까운 군노이스 자작령에서 깽판을 치면 모를까, 할레단 후작가는 너무 먼 구역이었다.
“단순히 병력 충원으로는 너무 과한데요. 그곳에서 암세력을 만드실 것도 아니고.”
“암세력을 먹을 거야.”
“무슨…….”
“다크몬드. 그 새끼들이 감히 시비를 걸었거든.”
“설마…….”
쿨레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화했다.
드레젠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다크몬드 정도면 100골드는 안 아깝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크몬드라니.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세력을 어떻게 꿀꺽하겠다는 말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100골드 줄 거야 말 거야?”
“……드, 드리겠습니다.”
까라면 까야지 뭐 어쩌겠는가.
결국 쿨레드는 100골드라는 거금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2
거대한 백색 와이번은, 오늘도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비스트 마스터의 역작이자 한때 드래곤과도 자웅을 겨뤘던 성스러운 몬스터.
언제나 그렇듯 덤벼 오는 몬스터는 없었고, 새로운 마스터는 인간의 일로 인해 바쁘게 지냈다.
‘날고 싶군.’
이미 오래전에 수없이 창공을 누볐던 몸.
그럼에도 와이번의 본능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최대한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반가운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서 울렸다.
[오랜만에 날자. 그럼. 원 없이 날게 해 줄게.]
그르르-.
와이렉스의 목울대가 부드럽게 울렸다.
주인과 함께하는 비행은 언제나 즐거웠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멀리 가는 거지?]
[대륙을 횡단해야 해.]
[아주 좋군. 호위도 좀 붙여야겠다.]
와이렉스가 몸을 일으켰다.
크아아아아아-!
기쁨이 가득한 포효를 내지르자, 주변에서 서성이던 와이번들이 호응을 했다.
그는 사념을 보내 다섯 마리의 젊고 튼튼한 와이번을 추렸다.
“가자. 우리 목적지는 할레단 후작가다.”
[비행은 언제나 환영이다.]
훌쩍 뛰어올라 가볍게 자리를 잡는 자신의 주인은, 기분 좋은 무게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콰아-!
날갯짓을 한번 하자마자 엄청난 풍압이 주변을 쓸었다.
왕의 날갯짓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
어느 이름 모를 숲.
나무 위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들이, 하늘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바라봤다.
쏴아아아-!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간 후, 뒤따라오는 풍압에 나무들이 요동쳤다.
“……와이번?”
“아니, 잠깐.”
그중에 가장 굵고, 위에 있는 가지에 앉아 있는 여성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꽤 충격을 받았는지, 사정없이 떨리는 눈이 와이번들의 잔재를 훑었다.
“저거, 와이렉스 아니야?”
“아닐걸~. 그 와이번은 붉은색이잖아. 더럽게 무식해 가지곤…….”
“각인.”
“어?”
다른 여인이 말했다.
각인에 대해서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모든 이의 시선이 ‘각인’이라는 단어를 말한 이에게 집중되었다.
“각인을 하면, 색이 바뀔 수 있어.”
“들어 봤어. 그렇다는 건…….”
“비스트 마스터의 후계자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쫓을 수 있겠어?”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말했다.
나머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번은 포식자다.
하늘의 왕자라고 불리는 그리폰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포식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와이번은 대놓고 정수를 뿌리고 다니니까…… 괜찮아.”
“그럼 어서 출발하자.”
“그런데 갑자기 저건 왜 쫓아가는 거야?”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나뭇가지의 끝을 밟으며 말했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예언, 잊었어?”
“아!”
“받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실버 문.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금발을 휘날리며 복면을 뒤집어쓴 여인이 나뭇가지를 밟으며 사라졌다.
뒤이어, 그녀를 쫓아가는 단원들.
여인, 하이디엔의 등에 매여 있는 창이 유독 검게만 보였다.
#4
“아 참. 와이렉스를 타고 이 근방을 지나가면 ‘이벤트’가 하나 발생할 겁니다.”
-오?
-무슨 이벤트죠?
-상상도 못 했던 정체인가!
드레젠은 세차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비록 ‘그녀’와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는 없었지만, 훗날 레드 드래곤과의 전투 후에 알게 되었다.
“이곳은 엘프들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엘프와 비스트 마스터는 상당한 앙숙이었죠.”
비스트 마스터는 특수한 몬스터들을 이용해 인류의 편에 서서 정복 전쟁을 했던 인물이었다.
필연적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자연을 어느 정도 억압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세울 때, 초대 황제는 수인족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그중 엘프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던 것이 비스트 마스터였다.
-오, 그러면 엘프 볼 수 있는 건가!
-판타지 하면 엘프지!
-와! 엘프!
-엘프 보고 싶다.
시청자들의 관심이 단숨에 엘프들에게 향했다.
생김새야 항상 생각해 오던 그런 생김새가 맞았다.
하지만 화면 속의 존재가 생생하게 튀어나온다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엘프들의 성격은 여러분들로선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
-왜유
-또또 말하다 끊어ㅜㅜ
시청자들을 궁금하게 하는 것도 은근히 재밌었다.
엘프.
그들은 정말 끝까지 말을 들어 먹지 않았던 족속들이었다.
덕분에 브락시아 대륙의 절반을 형성하고 있던 전선이 무너지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후퇴 작전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고개를 작게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그 부분은 시청자들이 생각하게 두기로 했다.
직접 겪어 보는 편이 좋겠지.
“곧 만나게 될 테니까 만나 보시면 알 겁니다. 다들 항암제 준비해 주시고요.”
-뭔가…… 뭔가 삘이 온다.
-발암의 기운이 온다!
-항암제! 항암제를 가져와!
드레젠이 한마디를 하니, 시청자들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시청자들이란…….
피식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멀리 첫 번째 거점인 ‘엘노아’ 마을이 보였다.
백작령의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
꽤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 이제부턴 자동 진행 좀 돌려놓겠습니다. 하늘 위로 날아가기 때문에 딱히 뭔가를 마주칠 이유는 없으니까-.”
-쉬는 시간 각입니다!
-잠깐 쉬는 시간 가즈아!
-팝콘 좀 가져와야지 허허
[‘뉴비환영해!’ 님 10,000코인 후원!]
[오늘도 새로운 기술 보여 주십니까?]
“새로운 기술이라…… 못 할 것도 없죠. 암살자들의 기술들 위주로 써 볼까요?”
-그거 조으다.
-그림자 장막 다음에 못 봤음 ㅇㅇ
-암살 대결 ㄲㄲ
“좋습니다. 다크몬드를 박살 낼 때 암살자들이 싸우는 방식으로 싸우죠. 아, 그리고 할레단 후작가를 뒤집어 놓을 땐, 마법사들의 또 다른 스타일을 보여 줄 겁니다.”
[‘크리드’ 님 100,000코인 후원!]
[코치님 오늘도 잘 배우겠습니다.]
“후원 감사합니다. 프로 팀들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겁니다.”
-프로 팀도 가르치는 그의 클라스;;
-ㄹㅇ 지렸다
-엌ㅋㅋㅋ 진짜 만인의 코치누
-대박 진짜 대박ㅋㅋㅋㅋ
드레젠은 피식 웃고 자동 진행을 실행했다.
다크몬드, 할레단 후작가와의 대결은 퍽 재밌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