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화
86화 - 다크몬드
#1
“크윽-.”
암살자, 제이슨은 찌뿌둥한 격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마지막에 나타나, 자신을 후려쳤던 사람.
심지어 숙련된 암살자인 자신도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 광경을 다시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월 이 자식은 왜 보고를 이따위로 한 거야?’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잘못된 정보를 전해 준 ‘만월’을 향한 원망이었다.
마스터급의 전사.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드레젠이라는 자.
막상 겪고 보니 보통 괴물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덜컹-.
그의 생각을 끊어 버리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인영이 들어왔다.
단단한 체격의 남자와 한눈에 봐도 미인인 여성이었다.
후우-.
제이슨은 한숨을 쉬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간 훈련받은 것들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이졸데. 시작해.”
“예, 예. 바로 넣으면 되나요?”
“엉.”
다소 경박해 보이는 말투가 들렸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그의 볼을 잡아 입을 벌렸다.
여자가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물약 하나를 쫄쫄쫄 따라 냈다.
제이슨은 본능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 물약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이런 미친, 무식한 새끼가아아아-!’
금지된 물약이라고 알려져 있는 ‘에트몬의 입술’.
왜 금지된 물약이냐면, 치명적인 독성과 함께 자백제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란을 일으키거나 황족에 대한 암살 죄, 모독 죄 등을 저지른 범죄자를 조사할 때와 같이, 꼭 필요한 부분에서만 허가가 나는 물약이었다.
“크아아아! 이 미친놈아으아악!”
에트몬의 입술을 쓴다는 것은, 포섭할 여지가 없다는 것.
이졸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꾸역꾸역 포션을 다 넣었다.
드레젠은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동공이 풀려 가는 제이슨을 바라봤다.
-잔혹하다
-엌ㅋㅋㅋ자비 없누
-사이다 보솤ㅋㅋㅋ
-적에게는 가차 없는 그는 대체ㅋㅋㅋ
시청자들의 말대로, 적에겐 자비를 줄 생각이 없었다.
다크몬드를 그대로 꿀꺽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자신, 드레젠을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으…… 아…….”
결국 제이슨의 이성은 멈췄다.
남은 시간은 10분.
그 안에 정보를 캐내야 했다.
“누가 시켰나?”
“……할레단 후작가.”
역시.
그때의 떡밥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드레젠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군. 가장 가까운 지부는 어디 있지?”
“……군노이스 자작령, 군노라의 지하 상가에.”
이것도 예측 가능한 부분이었다.
이졸데는 가시가 돋친 표정으로 드레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거 다 업보인 거 아시죠?”
“할 말이 없네.”
“이젠 뭐 여쭤보실 거예요?”
드레젠은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지금도 과연 ‘그자’가 있을까?
‘정보부장으로는 제격이지.’
초승달부터 만월, 그리고 결국엔 다크몬드의 수장까지 올라가는 남자.
과묵한 성격에 뛰어난 전투 실력, 게다가 정보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능력까지.
한때 그림자 기사단마저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던 다크몬드를 만든 주역이었다.
“위도우 그레인. 녀석은 지금 만월인가?”
“……반월…… 할레단 후작가 지부에…….”
“그렇다는군. 볼일이 늘었어.”
드레젠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시청자들이 그 표정을 보고 또 난리가 났다.
-왔다
-사탄의 스승님
-ㅋㅋㅋㅋㅋ사탄의 스승님ㅋㅋㅋㅋ
-평화(물리)를 원하시는 선생님!
한때, 창식이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아우들의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졌다고.
사채를 쓴 어머니 대신, 어디선가 복귀한 드레젠, 강일에게 독촉하려다 호되게 당했던 경험담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사지 멀쩡히 돌아간 이는 없었다.
“그…… 성주님? 또 자리를 비우실 건가요?”
“응. 어차피 샤페론이랑 쿨레드가 있잖아. 그렇지?”
“…….”
이졸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밖에도 자잘한 질문들을 많이 했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고,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확실히 현실 시간으로 여덟 시간, 게임 시간으로 5일이라는 것은 꽤 짧은 일정이었다.
적당히 떡밥을 뿌려 놓고 끝내기로 했다.
“일단 너는 골렘이나 제작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러려고 왔으니까요.”
이졸데와 잡담을 나눈 드레젠은, 방송을 종료했다.
이제 용병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그럼, 2부에서 뵙겠습니다.”
-으아 1교시 끝!
-역시 드센세는 레전드!
-정주행한 우리 인생도 레게노!
-아무튼 다 레전드!
드레젠은 피식 웃으며 게임을 종료, 캡슐에서 나왔다.
남는 시간엔 영상 편집 조금, 그리고 하이디엔에게서 온 연락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2
몇 시간 전.
하이디엔은 서버 관리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한 곳에는, 드레젠의 플레이 영상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가 플레이하는 영상은 다른 직원들에게도 핫한 영상이었다.
“저곳은…….”
“역시 저곳으로 가는군요.”
그가 막 오딘의 지성소로 출발했을 때.
갑자기 건물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하이디엔은 원인이 무엇인지 바로 파악했다.
원천.
본사에 보관하고 있는 마나의 원천이 반응한 것.
그녀가 딱딱하게 인상을 굳혔다.
“화, 확인되지 않은 에러가 생겼습니다!”
“막대한 에너지가…… 서버 안으로……. 어?”
“이건, 성좌의……?”
“성좌라고?”
성좌라니.
이미 성좌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나?
하이디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게임에 성좌가 강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구현해 놓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시스템에서나 도입되었을 뿐.
‘그런데 왜?’
다른 계정들도 살펴봤으나, 그 어디에도 에러는 없었다.
오직 드레젠의 계정에서만 성좌의 에너지가 발생하고 있었다.
콰앙-!
소란스러운 소리가 던전 안쪽에서 울렸다.
캠을 황급히 돌려 보니, 웬 금발의 남자가 번개를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저자는?”
“토르.”
“꽤 고위급 성좌가 나타났군요.”
덤벼 오는 골렘들을 모두 때려잡은 남자는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봤다.
잠시 멈칫한 그가, 정확히 카메라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다들 흠칫 놀랐다.
“흠, 생각보다 잘했군. 생존자들.”
‘우리를 정확히 보고 있다고?’
하이디엔은 꿀꺽, 침을 삼켰다.
남자, 토르는 피식 웃고 다시 말했다.
“수많은 평행 세계의 시뮬레이션이라…… 마스터가 보면 좋아하겠어. 어쨌든 좋은 방법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건 안 들리겠지만, 용사 녀석을 잘 부탁하지.”
“…….”
하이디엔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
감히 그들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자들은 대륙에 얼마 없었으니까.
그 유명한 드래곤인 레드릭 역시 성좌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한낱 엘프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이제 신경 꺼라. 뭘 전해 주려고 왔으니까.”
토르는 이후 골렘의 처참한 사체 앞에서 기다렸다.
드레젠이 도착했고, 토르의 신물인 메긴교르드를 받는 것으로 상황은 끝났다.
하이디엔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원천을 향해서.
“성좌가 개입했다니. 대체 강일 님은…….”
우웅-.
곧이어 강일에게 톡이 왔다.
하이디엔은 떨리는 손을 들어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맘 같아서는 끝까지 가 보라고 종용하고 싶었지만, 이미 계약한 사안이기에 번복할 수 없었다.
흘러가게 두고 싶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원천.
찬란하게 마나를 뿜어내는 구체를 대면해야 할 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자칫 잘못해서 원천이 터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단순한 재앙으로 끝나진 않을 테니까.”
심호흡을 하고, 각종 버프 마법을 몸에 둘렀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이 원천을 관리하며 전반적인 시뮬레이션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우웅-!
문을 열자 거센 마나의 압력이 그녀를 짓눌렀다.
“후-. 얌전해져라. 얌전해져라, 얌전…….”
주문을 외우듯이 마나의 원천을 진정시킨 후, 그곳에서 여과된 마나를 흡수했다.
강일을 포함, 지금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1,000년은 흡수해도 모자라지 않을 마나가 잠들어 있었다.
순도가 너무 높아서 자칫 잘못하다간 온몸이 분해되어 버릴 위험성이 있지만.
-성좌는 외부 개입인 것 같습니다. 저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결국, 그녀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3
“흐음, 알아봐야 한다고.”
강일은 하이디엔의 짤막한 톡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좌가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찜찜했다.
폰을 내려놓고,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 마음대로 날 부려 먹어?”
절대.
네버.
기필코 불응할 생각이었다.
여태까지 구른 것도 참고 또 참아서 나온 결과였다.
또 엄청난 위협에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지금 사는 거에 만족한다고.’
게임이 나왔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성좌가 뭐.
그렇게 구를 때는 본체만체하더니, 이제 와서?
강일은 삐뚜름하게 비웃으며 다시 캡슐로 들어갔다.
지금은 성좌보다는 돈이었다.
“자, 2부 시작하겠습니다.”
2부는 용병에 관한 콘텐츠였다.
언제나 그랬듯, 시원시원한 전개로 용병왕의 자리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용병 일을 하면서, 용병에 관한 세계관과 얽혔던 이야기를 설명해 주는 시간.
2부를 시작하자마자 시청자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2부는 눈높이 교육이라 좋음
-그대로 가려고 하고 있는데, 너모 어려운 거시에요
-중간 노가다는 거의 스킵하는 기분이라 우리랑은 좀 다르지ㅜㅜ
“저는 과정만 보여 주는 거고, 그 중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벤트는 즐겨 주세요.”
“어이-! 빨리 준비해라, 신입.”
그가 속한 용병단은 ‘테그멘’ 용병단.
인성이 바른 이들만 있었고, 실력 또한 보장된 곳이었다.
용병단이라기보단 길드에 가까운 성질을 띠고 있었는데, 자체적으로 상단까지 운용할 정도로 저력 있는 곳이었다.
“갑니다.”
이름이 특이한 테그멘은 드레젠이 꽤 인상적으로 봤었던 곳이었다.
용병들의 생리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나마 기억에 남는 곳이기에 들어왔다.
글로 공부한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다르니까.
‘그래도 기본적인 상식은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임무를 수행하고, 등급을 높이고, 용병왕의 길까지 가 보기로 했다.
아주 좋은 콘텐츠였다.
오히려 본편보다 이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후원이 터지고, 화려한 활약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 드레젠.
강일은 그야말로 돈을 쓸어 모으는 중이었다.
그렇게 방송을 순조롭게 마친 후, 강일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보세요?”
“어이, 드레젠 선생님. 요즘 잘나가나 봐?”
“창식이 형님?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창식이었다.
강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정체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은근히 많은 것들을 노출했었지.
‘상관없지만.’
자신의 뒤에 하이디엔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누가 그를 건드릴까.
창식의 목소리 역시 악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야 인마, 그렇게 성공했으면 형한테 먼저 알려야 하는 거 아니냐?”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그랬죠. 그래도 빚은 빨리 갚을 수 있겠네요.”
“안 그래도 큰형님이 보자신다. 언제 시간 되냐?”
큰형님이라.
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덤덤하지만 자신의 식구들은 꽤 챙길 줄 아는 사람.
인사 한번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내일 바로 찾아뵙죠.”
“오냐. 아침에 데리러 가마.”
강일은 전화를 끊고, 하이디엔이 보내 준 옷들을 바라봤다.
큰형님 앞에서 주름 한번 잡을 때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