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화
82화 - 지성소
#1
눈앞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아니, 사실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기척도, 살기도, 소리도 없었다.
드레젠은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림자 기사단을 상대론 절대 한눈팔면 안 됩니다.”
“그대가 드레젠인가?”
“그렇다만.”
남자는 뭐 하나 기억에 남을 만한 특징이 전혀 없었다.
길을 가다 부딪치거나 시비가 붙더라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평범함이었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그림자 기사단과 대치했다.
낡은 망토, 회색의 두건을 썼다가 내렸는지, 목에는 낡은 두건도 걸려 있었다.
“그대의 활약은 저 멀리, 탑까지 전해졌네. 하지만 하나 묻고 싶군. 어떻게 해서 기사단의 기술을 배웠는지.”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지만 정통으로 배웠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갈 사안이 아니네. 탑에서는 그대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논의하더군. 우리 기사단은 ‘그릇’이 된다면 어느 경로로든 입단을 환영하는 바이지.”
그림자 기사단.
세력만 컸더라면 대륙을 정복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을 세력.
그들의 기술은 분명 대단했고, 마스터도 함부로 대적하지 못할 위용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그림자 기사단이 음지에서 활약하는 이유는 바로 극소수로 이뤄진 단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기사단과 연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좋아, 볼일을 보고 가도록 하겠다.”
“감사하군. 우린 언제나 자네를 지켜볼 것이네. 그림자가 자넬 지켜 주길 바라지.”
스륵-.
그는 다시 장막 안으로 사라졌다.
자신을 그림자 기사단이라고 밝힌 자가 떠나간 곳엔, 작은 단검 두 자루가 교차되어 있는 회색 엠블럼이 떨어져 있었다.
말에서 내려, 그걸 주운 드레젠은 품 안에 고이 간직했다.
-그림자 기사단 포스 지리네;;
-쟤는 추적술로도 못 본다 했음
-ㄹㅇ 사기자너
-하 나도 그림자 기사단 마렵누
최고 세력 중 하나인 그림자 기사단.
그곳과 연을 맺어 둔다면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할 수 있었다.
드레젠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향했다.
저주받은 구릉까진 아직도 먼 거리를 달려야 했다.
‘이제는 강의 시간으로 때울 차례군.’
이제부터 본격적인 육성이 시작된다.
일반 유저들도 쉽고 빠르게 강해질 수 있도록, 비전들을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만약 진짜 현실이었다면 절대 유출되어선 안 되는 기술들.
그렇지만 뭐 어떤가.
‘가르쳐 줬다고 하루 이틀 걸려 바로 배우면, 그놈이 용사를 하는 게 맞지.’
나보다 잘난 놈이 세상을 구해 준다는데 그걸 마다한다고?
사서 고생하는 것은 성인(聖人)이나 호구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흔쾌히 세상을 구하게 떠넘길 생각이었다.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이 영상은 편집해서 올릴 거니까, 천천히 복습하세요.”
그는 심심한 여행길을 시청자들과 함께 보내며 북쪽으로, 북쪽으로 향했다.
#2
“읏차.”
강일은 어떤 던전 앞에서, 1부를 종료했다.
3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에, 2부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용병!
세계관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조직이자, 수많은 모험가들이 선택하는 길이었다.
“뭐, 부캐니까 가볍게 진행해야지.”
그는 최대한 많은 길을 제시하려고 부캐까지 동원한 것.
사람에게는 적성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예시를 많이 보여 주는 용도였다.
정말 가볍고, 정말 막장으로 진행해도 상관없었다.
“돈벌이지 뭐. 그런데…… 이건 뭐냐.”
아마존 TV에서 쪽지가 와 있었다.
운영자에게서 온 쪽지였다.
다른 쪽지는 모두 프로 팀 어쩌고, 스폰 어쩌고 하는 내용이라 흥미가 없었지만, 그 쪽지는 달랐다.
[아마존 TV 시상식에 초대합니다!]
“시상식이라.”
연말이면 항상 존재하는 시상식.
한 해를 정리하는 무대이자, 친목의 장이기도 했다.
수많은 BJ들이 유명인과 연줄을 만들고자, 그리고 자신의 인맥을 두텁게 쌓기 위해서 참여했다.
“꼭 가야 하나?”
하지만 드레젠, 강일은 생각이 좀 달랐다.
굳이 타 BJ의 도움이 없어도 돈을 버는 데 문제가 없었다.
이미 성장은 할 대로 했다.
하꼬라는 시절은 단 하루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 볼까.’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브락시아에서 하도 시달렸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부웅-.
때마침 울려온 전화가 그의 결정을 조금 미루게 만들었다.
“여보세요.”
“강일 님. 혹시 쪽지 확인하셨나요? 시상식.”
“어, 안 그래도 거절하려고. 왜?”
“사실 부탁드릴 것이 조금 있어서…….”
하이디엔과의 통화는 꽤 길었다.
그녀는 꽤 중요한 부탁을 해 왔다.
그 때문에, 결국 강일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래, 하지만 파티나 피로연은 안 갈 거야.”
“그건 마음대로 하셔도 될 거예요. 입금은 바로 해 드릴게요!”
“그래.”
통화를 종료했다.
곧이어 휴대 전화 화면에 알림이 찍혔다.
[인터넷 입금 : 20,000,000원]
[(주)브락시아]
[잔액…….]
단숨에 보유 현금이 1억 가까이로 불어났다.
강일은 피식 웃었다.
이제 슬슬 반지하를 벗어날 수 있는 자본금이 마련되고 있었다.
누군가 ‘최고의 동기 부여는 바로 돈’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
강일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돈을 벌 시간이었다.
#3
다음 날.
드레젠으로 돌아온 강일은 어떤 던전 앞에 서 있었다.
저주받은 구릉.
베스티안 백작령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인 드레이온 공작이 다스리는 영지가 나온다.
드레이온 공작령의 최남단, 브레이시스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저주받은 구릉이었다.
“크리스는 잘 살고 있겠죠.”
바로 전 마을에서, 크리스를 잠시 대기시켜 두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위험 요소는 거의 없었다.
드레젠은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주받은 구릉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곳은 블랙 드래곤이 살고 있던 곳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춘 블랙 드래곤.
블랙 드래곤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땅을 죽이고, 언데드를 파수병으로 내세웠다.
그 언데드가 자생하는 곳이 바로 이곳, 저주받은 구릉이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위험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던전으로 향합니다.”
지금부터는 공략의 시작이었다.
구릉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옆에 있는 작은 동굴로 들어가야만 했다.
던전을 발견하는 것도 기믹이 필요했다.
-전격 마법 메모!
-재밌겠다 ㄹㅇ
-하 여기도 고인물들만 깰 수 있겠지ㅜㅜ
-아직 서리 구덩이도 못 깨고 있음ㅋㅋㅋㅋ
또 다른 던전 공략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시청자들이 기대감을 표출했다.
드레젠은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자,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마법이 필요합니다. 별건 아니고, 전격 속성 마법 아무거나 사용하시면 됩니다.”
마법은 스크롤로 사용해도 되고, 자신이 사용해도 되며 동료를 구해도 상관없었다.
전격 마법만 어떻게든 사용한다면 문을 여는 조건은 충분했다.
다 썩어 가는 나무들을 헤치고 가니, 푸르른 색채를 유지하고 있는 지대가 나왔다.
사기, 죽음의 기운이 딱 끊기는 곳이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잘 온 겁니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회색 바위만 거대한 위용을 드러낼 뿐.
드레젠은 사박거리는 풀숲을 건너, 바위로 향했다.
파직-.
그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위대한 자의 잔재가 드러납니다.]
알림 표시가 떴고, 스파크가 한쪽 방향으로 휘었다.
이 번개는 이정표였다.
진짜 입구가 있는 길을 알려 줄 것이다.
번개를 따라가니, 다 낡아서 뭉툭한 형상만 남아 있는 성소가 보였다.
본래 모습은 정교하게 바위를 깎아 만든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세월의 풍파가 모든 것을 갉아먹었다.
“이곳은, 오딘의 지성소입니다. 숨겨진 던전이자, 꽤 진귀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곳이죠.”
-오딘!
-판타지엔 단골손님이지
-그럼 토르도 있겠누
-세계관 설정 잘해 놨네
오딘의 지성소.
한때 오딘을 모시던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모두가 떠나 버린 곳.
버려진 곳에는 수호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떠났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만…… 많은 역사학자들이 추측건대 아마도 암약하는 세력이 휩쓸었을 거라는 얘기가 있더군요.”
뭐, 이거까진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오딘의 지성소 안에는 역시 특별한 기믹이 존재했다.
각 성소에는 방이 존재했는데, 몹들을 상대하며 퍼즐을 풀어야 다음 방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방은 총 여섯 개. 끝에는 보스가 있을 겁니다. 첫 번째 방은 제법 쉬운 방입니다.”
거대한 동공.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엔 이끼가 잔뜩 낀 석상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드레젠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순히 힘만 쓰면 되는 일이거든요.”
쿠그그그-.
각 크기는 약 3미터.
정사각형으로 이뤄진 동공의 양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쿠웅-!
먼지가 자욱하게 퍼졌고, 잠자코 있던 석상들이 움직였다.
[그분의 위대한 뜻에 따라, 지금 성소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돌아가라.]
“미안, 난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거든.”
[경고한다.]
[돌아가라.]
“왜 오딘이 이곳에 신경 쓰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남은 이들도 좀 생각해 줘야지. 응?”
[침입자.]
[배제한다.]
콰르르르-.
닳아 없어진 부분이 모두 떨어졌다.
다시 조각한 듯,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순식간에 드레젠을 노리고 쏟아졌다.
쿠와아아앙-!
흙먼지와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도랏;;
-아니 저걸 어떻게 이곀ㅋㅋㅋㅋ
-드센세가 깰 거라고 했지, 우리가 깰 거라곤 안 했다.
-우린 다음 생에나 깰 듯ㅋㅋㅋ
파직-.
무더기처럼 쏟아져 내린 흙무더기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일었다.
퍼석-!
인간의 몸으로 바위를 때려 부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브락시아에선 충분히 가능했다.
“여긴 타격이 잘 먹힙니다.”
-ㄴㄷㅇ
-알아!
-알면 뭐 하눜ㅋㅋㅋ
피스트 마스터의 힘이 솟구쳤다.
두 주먹에 담긴 거력이 석상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콰앙-!
거대한 철구로 바위를 후려치는 소리가 동공 안을 울렸다.
주먹질을 한 번 할 때마다 지진이 나는 것처럼 동공이 흔들렸다.
[네자렉의 목걸이가 성좌의 힘을 불어 넣습니다.]
월요일.
속성의 힘을 증폭시켜 주는 옵션까지 발동되었다.
마나 자체에 들어 있는 속성을 증폭시켜 주는 월요일의 효과.
이는 달을 상징하는 헬라의 힘이었다.
[침입……자.]
쿠르르-.
거대한 석상들이 단순한 돌무더기로 변하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젠 제법 넉넉하게 채워진 마나 때문에 이 정도 전투는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석상이 쓰러지자, 석상의 이마에서 반짝이고 있는 돌을 챙겼다.
“적정 레벨은 90. 방어력은 최상으로 갖추고 오셔야 합니다. 이 돌멩이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특별한 비약의 재료이죠. 이벤트를 보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여기까지만 진행하셔도 좋습니다.”
달칵-.
석상들이 지키고 있는 곳, 딱 봐도 돌이 들어갈 장소에 돌을 끼워 넣었다.
문이 열렸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의 공간이 보였다.
“어서 와라.”
그리고 그곳에서, 있어선 안 될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