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화
81화 - 그림자가 도래하다
#1
‘어떡하지?’
풀숲에 숨어, 몰래 지켜보고 있는 남자.
자신의 동료가 끔찍한 고문을 받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은신이 감지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동료가 이렇게 일찍 들킬 줄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다 이딴 의뢰를 받아서는.”
“그러게. 왜 늬들은 이런 의뢰를 받았을까?”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런 사태에 대비해, 무수히 많은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의 계산 범위를 뛰어넘었을 때 당황하기 마련이다.
훈련을 받아 그 범위를 일반인보다 훨씬 늘려 놨을 뿐, 그 한계는 명확했다.
“이런 젠장-!”
평소 폭력과 부당함으로 점철된 훈련 교관이 지금 그의 모습을 봤다면 박수를 쳐 줬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훈련받은 대로, 몸이 기억하는 대로 반격을 가했다.
독이 듬뿍 발린 단검을 흩뿌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오우거라도 잠시 마비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이 발린 검이었다.
“음, 제법이네.”
“헙!”
콰아앙-!
필사적인 저항은 결국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암살자는, 골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드레젠은 기절한 암살자를 그대로 질질 끌고 열심히 복근 운동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네 친구도 왔다.”
“으으읍-!”
슉 하고 사라지더니 그대로 동료 하나를 끌고 오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소름이 돋았다.
전사인 줄만 알았는데, 추적술에도 능했던 것일까?
‘괴물 같은 놈!’
“자, 이제 말할 생각이 좀 들었겠지?”
“푸하! 아, 아는 건 다 말해 주겠습니다!”
아직도 뜨거운 열기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았다.
빨리 이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드레젠은 그 앞에서 불을 들쑤시며 말했다.
“너희, 등급이 뭐지?”
“초, 초승달입니다.”
“흠…… 의뢰의 내용은?”
“……‘동쪽에서 밝게 빛나는 달빛의 첫 번째 자식’으로부터의 의뢰였습니다.”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그들의 목을 직선으로 그어 버렸다.
푸확-.
황금색 폴리곤 덩어리가 흘러내려, 넘실거리던 불꽃을 꺼 버렸다.
-깔-끔
-조쿠연
-이 정도 가지고 정보가 됨?
-그러게, 알 만한 건 없었는데
드레젠은 채팅 창에서 보이는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로 했다.
다크몬드.
그들은 의뢰를 모두 풀어서 얘기하곤 했다.
“의뢰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져야 합니다. 내부에서도 수수께끼처럼 불리곤 하죠. 자, 여기서 문제를 내 볼까요? ‘동쪽에서 밝게 빛나는 달빛의 첫 번째 자식’ 올라간 자는 뭘 뜻할까요?”
-스무고개 가즈아
-거인인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진 않은데
[‘다영짱!’ 님 10,000코인 후원!]
[정답! 저번에 만났던 후작 떨거지입니다!]
“오오, 맞습니다. 드릴 건 없고 박수를 쳐 드릴게요. 자, 박수!”
-ㅉㅉㅉ
-짝짝!
-머리 좋누!
-짝짝짝!
채팅 창은 간단한 축하로 도배가 되었다.
드레젠은 간단한 팁을 주기로 했다.
“지하는 노예, 땅은 평민, 동산이나 산은 자작이나 남작, 검은 백작, 달빛은 후작, 하늘은 공작, 태양은 황제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 자식이니까 후작가의 장남이 암살자를 보낸 거겠네요.”
-신기하누
-대공은?
-대공은 공작이랑 똑같음ㅋㅋㅋ
-ㄴㄴ 대공이랑 공작이랑 다름
“브레이시스 제국에선 대공이 곧 공왕이고, 그 작위는 공작만 받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작위라고 보시면 됩니다.”
중요한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과 접촉한 단체라면 군노이스 자작, 하시스 성의 인물들, 베스티안 백작가, 마탑이 전부였다.
중간에 후작의 장남을 만났다곤 하지만…… 거기서 이렇게 빠르게 도착할 줄은.
‘확실히, 이곳은 내가 잘 모르는 지형이기도 하지.’
베스티안 백작가는 멸망해 버렸고, 군노이스 자작가는 몇 번 들렀던 적이 다였다.
겉으로 드러난 곳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음지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알진 못했다.
하시스 성에는 다크몬드 지부가 없었다.
가까운 곳이라면 베스티안 백작령, 혹은 군노이스 자작령.
“군노이스 자작령이나 베스티안 백작령 본토에서 파견 나온 녀석들이겠군요.”
-복수 가즈아!
-다크몬드도 죽이자!
-절대 복수해!
드레젠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은, 스트리머의 기본 소양이었다.
당연히 위험 수단은 전부 배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집 주변에서 위험한 놈들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당연히 위험한 것들이 주변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죠. 그럼 그 후작가에도 볼일이 생겼군요.”
어떻게 하면 신선하고 참신하게 커다란 엿을 먹일까 고민했다.
생각보다 시청자들의 머리는 비상했다.
드레젠은 생각도 못 한 방법으로 괴롭히자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평생 자식 못 보게 만드는 거임
-고 to the 자!
-누가 우리 드센세에게 덤비는 거야?
-가족끼리 난투극 가즈아!
나중에 투표를 해서 방법을 정하도록 하고, 오늘은 크리스의 수련을 마저 봐 주기로 했다.
크리스는 여전히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 휘두르다 보니, 자세가 많이 흐트러진 것이 보였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보폭 넓히고, 허리에 힘주고. 그렇지.”
“흐압!”
자세가 교정되면 당연히 힘도 더 많이 들어가는 법.
비교적 약한 부분부터 힘이 빠지니, 금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렇게 해가 거의 다 넘어갈 때쯤, 드레젠은 크리스의 반복 수련을 멈추게 했다.
“그만. 지금 다리가 좀 후들거리냐?”
“……네. 힘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좋아. 숨기는 건 없어서 좋네. 그럼 이제부터 실전 대련이다.”
크리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당한 폭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폭력이 아예 없는 훈련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리스의 의지가 남다르다는 점.
아직 10대 초중반인 아이가 고된 수련을 견뎌 내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그래도 의지박약은 아니네.
-안 그러면 뒈질 텐데 뭐.
-쓰레기답지 않아서 좋긴 해 깔깔.
자신을 굴리는 게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인 자들의 낯짝이 생각났다.
드레젠 본인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다듬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날 때마다 제법 그럴듯한 몽둥이 모양으로 변했다.
“네 신체가 극한까지 몰렸을 때, 집중력이 흐려지고 판단력이 저하됐을 때가 진짜 위기야.”
부웅-.
드레젠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눈으로 좇아 봤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꿀꺽.
이제부턴 상당한 고통이 자신을 괴롭히겠지.
크리스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고통은 익숙해져야 해.’
“준비됐습니다.”
“오냐, 난 페베스 검술만 사용할 거다.”
비록 형일 뿐이지만, 크리스에겐 많은 공부가 되겠지.
그렇게 자정이 될 때까지, 크리스는 흠씬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2
“으으…….”
“괜찮냐?”
“……예.”
“그래도 엎어져서 말을 탈 수 있어서 다행이네.”
다음 날.
드레젠은 평범하게 말을 타고 있었고, 크리스는 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크리스가 타고 있던 말의 고삐는 드레젠이 쥐었다.
‘죽을 만큼 힘든데…… 좋다.’
뿌듯함이 몸을 지배했다.
본래 가문에서는 나름대로 체계적인 방법으로 훈련을 시켰다.
이렇게 무식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평범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하지만…… 왜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겠어.’
자신이 전수받은 페베스 검술의 묘리를 사용할 때마다, 폭력성과 가학심이 꿈틀거렸다.
페베스 검술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혹자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했지만, 그렇게 강인했던 어른들도 페베스 검술의 힘 앞에선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페베스 검술은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다. 육체의 문제지. 네 안에 있는 마나를 어떻게 찍어 누르느냐. 얼마나 혹독한 환경에서 날뛰는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지.
어젯밤, 드레젠이 했던 말이었다.
그는 이 말을 먼 미래의 자신이 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좀 자 둬라. 이따가 또 수련해야 하니까.”
“예.”
크리스는 혹여 떨어질까 짐에 감겨 있는 줄을 풀어 자신도 묶었다.
그는 말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자마자 곧 새근새근 잠들었다.
#3
“가는 길에 마나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꿀강의
-프로들도 참고한다는 그의 강의!
-평등하다 평등해!
마나!
그 대단하고도 평등한 힘 때문에, 브락시아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세 시대와 격이 다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충분히 더 나은 문명으로 도약할 수 있었지만, 성좌들의 억압과 제안으로 인해 이런 수준에서 머물고 있었다.
편리함을 추구했지만, 겉으로는 발전하지 않는 사회.
“……그렇기 때문에 마도 공학 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좌들은 브락시아를 꽤나 아끼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하긴 뭐든 돋보이면 견제하기 마련임
-ㅋㅋㅋㅋ남 잘되는 꼴 못 보는 건 어딜 가나 똑같네
-그래서 마나는요!
“잠깐 세계관 얘기를 하다 보니 삼천포로 빠져 버렸군요. 어쨌든, 마나를 잘 다뤄야 게임이 편해질 겁니다.”
라이트 유저에겐 그저 게임 스텟처럼 써도 무방한 마나.
하지만 진짜 깊게 파고들어 가고 싶다면, 혹은 브락시아에서 한 끗발 날리고 싶다면 꼭 마나를 능수능란하게 다뤄야 했다.
“마나를 단순히 자원처럼 쓰느냐, 아니면 이해하고 컨트롤을 해 주느냐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뉩니다.”
물론 세이브 더 브락시아는 기본적인 게임의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것도 가능했다.
레벨을 올리고, 능력치를 올리고…….
하지만 그렇게 플레이해서는 결코 정점을 찍을 수 없었다.
PvP에서도 마나를 직접적으로 다루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명백했다.
“가장 쉽게 예를 들자면…… 스텟처럼 사용하는 마나는 스킬을 등록하고 쓸 수 있지만, 마나를 느끼고 사용하면 저처럼 스킬을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요는 마나로구만
-그래서 스킬 등록이 안 됐던 거였어!
“일단 강의를 마저 하기 전에…….”
드레젠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기척을 알아채기 힘든 존재들.
그 사람들이 지척에 와 있었다.
그림자 기사단.
이들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손님부터 맞이해야겠군요. 얘기는 그다음에 하죠.”
안 그래도 슬슬 찾아올 때가 되었다 싶었다.
그림자 기사단은 정말 강력한 암살자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또 아니었다.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덴 정말 많은 피와 목숨이 필요했다.
천천히 감았다가 뜬 드레젠의 눈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왓더
-우억 시야 왜 이래;;
-색 반전;;
-미친ㅋㅋㅋㅋ이게 뭐야
[‘뉴비환영해!’ 님 5,000코인 후원!]
[쓰앵님 머리 아파여ㅜㅜ]
색이 완전히 반전된 세계.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망토처럼 장막을 두르고 있는 그림자 기사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