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화
77화 - 최고의 게이머
#1
하이디엔은 브락시아의 시스템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유도가 높다.
브락시아는 그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과거 ‘스카이림’이, ‘GTA’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게임.
“브락시아의 레벨 디자인은 상당히 하드코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생생한 현장을 구현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열광했다.
정글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의 모험.
무척이나 현실 같지만, 현실처럼 목숨의 담보가 없는 세상.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성벽을 두 발로 오르내릴 수도 있으며 자신의 감정들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다소 하드한 게임이 되었습니다. 우려가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걸 또 알려 주실 점은 없으신가요?”
강일은 인터뷰하듯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은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던 것들을 대변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이디엔은 잠시 고민하더니 힌트 하나를 던졌다.
“아, 되게 중요한 힌트 하나를 드릴게요. 브락시아에서의 마나는 단순한 게임 스텟이 아니랍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마나라는 존재랍니다.”
강일이 느끼기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힌트였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정도.
빠르게 채팅 창을 훑었지만 반응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그렇구나-.’ 하는 수준.
‘현실이 아닌 게임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현실, 마나가 전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마나라는 것에 대한 인식은 게임,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미지의 물질.
“자, 얘기는 이쯤 하도록 하고 이제 제 계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강일은 휴대폰을 잘 거치한 다음, 컴퓨터를 바라봤다.
상당히 좋은 컴퓨터가 있었는데, 하이디엔은 능숙하게 프로그램을 다뤘다.
모니터는 직접 보여 줄 수 없었지만 그녀가 바쁘게 타이핑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그림이 나왔다.
“자, 이제 됐습니다. 대표인 제가 보증하는 거니 조작은 없습니다. 여기 보시면…….”
게임 캐릭터의 로그는 빡빡하게 채워져 있었다.
여태까지 드레젠이라는 캐릭터가 뭘 했는지, 그리고 혹시라도 비정상적인 로그는 없었는지.
캐릭터가 취한 결과에 비해, 그 과정이 부실하다면 바로 로그가 잡히는 형식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순정 게이머라는 거죠. 아직 회사의 기술을 응용해서 모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럼 그게 다 피지컬이었다는 거?
-마나가 어쩌고 하는 거 보면 드센세는 이미 알고 계셨던 듯
-크으;;
-그럼 진짜 베타테스터임?
[‘김철민’ 님 1,000코인 후원!]
[그러면 진짜 베타테스터였나요?]
하이디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완벽하게 세상에 증명할 수 있었다.
“네. 계약서를 작성하고 홍보 대사 겸, 공략을 진행하는 게이머로서 영입했습니다. 개발 단계부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었어요.”
-헐
-대박ㅋㅋㅋㅋ
-여윽싴ㅋㅋㅋㅋ
-공인 방송이었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도 아니었고, 요즘엔 다양한 방송 매체들이 이런 식으로 홍보를 하곤 했으니까.
인터넷 방송 시대로 넘어온 만큼, 사람들의 인식 역시 많이 바뀌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보여 주기 위해 혼자서 시간을 좀 투자했죠.”
-크으
-공략 ㅇㅈ
-물론 초보 수준의 공략은 아니지만ㅋㅋㅋ
-그래도 난 대리 만족 해서 좋음
-프로 안 나가시는 이유도 있었네!
“아직은 생각이 없네요.”
이미 돈은 충분히 많이 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방송할 시간도 빠듯했다.
편집자도 구할까 생각 중이었으니까.
시청자들은 왜 그가 프로를 지양하는지 대충 추측하고 있었다.
-양심 있으신 분ㅋㅋㅋ
-지금 나가면 오피짘ㅋㅋㅋ
-엌ㅋㅋㅋ밸런스 파괴 ㅇㅈ;;
강일은 뚜렷하게 처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입을 적당히 다물고 있자 좋은 내용들로 살이 붙었다.
딱히 막을 생각은 없었다.
부정적인 영향력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첫 야외 방송은 그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럼 이따 돌아가서 게임에서 뵙겠습니다.”
-드바!
-야방도 가끔씩 해 주세요!
-드바!
-ㄷㅂ!
방송이 마무리되었고, 강일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이디엔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저는 이제 회의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오늘 프로 팀 연습 있는 거 알아요? 시범 경기가 17층에서 있다고 하던데, 구경하고 가셔도 돼요.”
“그럴까. 이왕 나왔으니 조금 구경하고 갈게.”
하이디엔은 꾸벅 인사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강일은 시선을 위쪽으로 옮겼다.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저쪽에 원천을 보관하고 있나 본데.’
브락시아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곳.
거대한 결계 안에 수많은 기계 병사들.
그리고 수문장과 총 다섯 명의 관문 군주들이 지키고 있는 마나의 원천.
그 일부를 가져왔다고 했다.
‘딱 한 번,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 완숙한 용사가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대륙의 모든 병사들을 끌어모아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기계 병사들.
그 중심에서, 오연하게 앉아 있던 대검을 지닌 여성.
악마의 날개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가 봤던 악마와는 질적으로 달랐던 자.
-어서 와라.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군.
-네가 선택받은 자로군. 하지만…… 아직 그분의 선택을 받기엔 너무 약해.
-이만 돌아가라. 아마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니까.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던 대화였다.
대꾸했다간 압도적인 병력이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눌 것만 같아서.
그 후로 완성되기까지,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더없이 뼈저리게 느꼈었다.
‘영웅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뭐…… 지금은 저걸 흡수할 수도 없으니 마음 접어야지.’
마음 같아서는 원천에 있는 마나를 모조리 흡수하고 싶었다.
저렇게 순수하고 농도가 짙은 마나를 들이켰다간 육체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그가 17층으로 향했다.
못 먹는 떡을 삼켰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누가 책임질까.
#2
“그래, 그렇게 하고…….”
“이쪽도 세팅 끝났습니다.”
“장비는?”
“지급 완료됐습니다.”
가상 현실에서 서로가 맞붙는 게임은 그 흥미를 날로 더해 갔다.
팀 파이트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생겨날 정도였다.
방송도 꽤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었으니까.
시범 경기를 하는 것치고는 제법 제대로 하는 중이었다.
[대회용 캐릭이라 그런지, 조금 어색한데요?]
화면에서는 투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모니터의 우측 상단에는 팀의 시너지 모습을 보여 주는 UI가 자리했다.
강일은 한쪽 구석에 서서 가만히 지켜봤다.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스크림은 하이츠 전자와 용성입니다.]
[대회 규정에 따라 각 팀은 여덟 명입니다.]
여타 격투 게임처럼 1 대 1이 아닌, 소규모 단체전.
시너지와 적절한 상황 판단 능력이 만들어 내는 분대별 접전은, 생각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서로 뒤엉켜 싸우는 한타.
[대각선 뒤로! 탱커는 1 대 1로 분담해!]
[근딜! 한 명 돌아서 원딜을 보호한다!]
친목을 다지는 스크림이라고 하지만, 허투루 할 생각은 없었는지 살벌하게 오더를 내리는 양측 분대장들.
중계 화면에서는 양측의 오더가 전부 들렸지만, 실제 게임을 하고 있는 자들에겐 같은 팀 오더밖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투는 격렬했다.
[용성 - 한상국 리타이어]
[하이츠 - 이재림 리타이어]
[용성…….]
마법이 불을 뿜고, 암살자가 모습을 감췄다.
전사와 용병들끼리는 치열하게 마나를 휘둘렀다.
동일한 캐릭터 스펙, 비슷한 레벨의 장비였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흠. 저 녀석은 잘하겠는데.’
하이츠 전자의 이현성과 만났기 때문일까, 강일은 용성보단 하이츠 전자의 선수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나에 제법 소질이 있는 자.
용병 클래스를 주력으로 쓰고 있는 선수였다.
이름은…… 김수현.
“그런데 어째…… 다들 생각보다 수준은 떨어지네.”
강일은 답답한 마음에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운이 좋지 않았다.
때마침 그의 옆으로 프로 팀 관계자가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일반인 수준을 알고 있었던 그자의 눈이 찌푸려졌다.
“흠…….”
스크림은 용성의 승리로 끝났다.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마지막에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검을 내지르지 않았다면, 승리는 하이츠 것이 되었을 정도.
기사의 높은 방어력과 ‘미끄러짐’ 효과가 있는 갑옷이 승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김수현, 그리고 용성의 몇 명을 제외하면 고만고만한데.’
프로 게임단은 전국에서 가장 게임을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었다.
그만큼 피지컬은 보증이 되었을 텐데…… 강일이 보기엔 영 아니었다.
검 휘두르는 것, 스텝을 밟는 것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마나를 사용하는 부분은 크리스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그런 천재들이랑 비교하는 게 실례긴 하지.”
“저기요.”
“음? 누구시죠?”
“여기 관계자십니까?”
강일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용성의 매니저, 방금 강일의 혼잣말을 들었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심혈을 기울여 훈련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지원금을 주며 좋은 NPC를 찾아가 훈련하고 있는 선수들이기도 했다.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고작 일반인 주제에.’
하지만 그런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
자신 선수들을 비웃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뒤에서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앞에서 할까요? 프로라고 하기엔 실력이 영 형편없던데.”
“……그거 모욕죄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강일은 피식 웃었다.
그래, 자존심은 이해하겠다만…….
저대로 나가면 흥행은커녕 비웃음거리만 될지도 몰랐다.
“적어도 프로라면, 관중들 앞에서 멋있게 보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그렇죠.”
“저도 멋있게 안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멋있게 보일까요?”
“그쪽은 뭔데 그렇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겁니까?”
소란을 들었는지, 시선이 쏠렸다.
강일은 기기에서 나오는 선수들을 바라봤다.
역시 한 줌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으음…… 저번에 이분에게 명함을 받은 적은 있죠.”
지갑에 꽂아 두었던 명함을 매니저에게 건넸다.
이현성.
구단주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는 명함.
선수들 역시 의아한 눈빛으로 강일과 매니저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거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요.”
훈수 두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왕 걸려 버린 것이니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